아쉽게 찾지못한 또 다른 보물.
남간사지 석정과 창림사지 귀부를 찾아서.
월성중학교 2학년 6반 김민욱
남천의 다리들을 다 둘러보고 이번에는 작년 개천절 때 아쉽게 둘러보지 못한 또 다른 보물을 찾아 나섰다. 먼저 찾을 것은 남간사지 석정. 저번에는 시간이 없어서 눈에 딱 띄는 암간사지 당간지주만 찾았다. 결국 오늘 남간마을을 해매고 다니며 남간사지 석정을 찾아 다녔고 어쩌다 발견한 길목에서 공원으로 조성된 남간사지 석정을 찾을 수 있었다.
(우연하게 발견된 길목. 그 속에서 남간사지 석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원으로 조성된 남간사지 석정 일대. 왼족에 보이는 것이 석정이다.)
여기 마을이름도 남간마을이 듯이 남간사지는 상당히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 남간사지 석정은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있고 분황사 석정, 재매정과 더불어 신라시대 우물을 연구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안에는 아직도 물을 끌어다 쓰는지 여러 호스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천년이 지난 우물, 정말 신비로울 뿐 이다.
(남간사지 석정.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있다.)
(석정 내부. 여러 호스들이 있는 걸로 보아 아직도 물을 길어다 쓰는 것 같다.)
석정구경을 마치고 이번에는 창림사지 귀부를 찾으러 간다. 문제는 귀부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다행히 겨울이라 모든 논은 추수를 마쳤고 텅 빈 논만 남아 찾기는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 논밭부터 억새가 있는곳 까지 정말 이곳저곳 해맸다. 한번은 그냥 민묘에 있는 거북모양 비석을 귀부로 착각하고 간 적도 있었다. 단일 유물을 이렇게 찾기 힘든적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창림사지 일대. 저번에 봤던 탑이 오늘도 나를 반긴다.)
(죽어라 뒤졌던 허허벌판. 중앙에 보이는 민묘에 있는 거북을 보고 달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찾다가 주춧돌들이 나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자 더 많은 주춧돌들이 보였다. 나무밑둥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특이한 바위를 하나 발견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여겨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토록 찾던 귀부였다! 정말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날따라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더 멋지게 보였다.
(창림사지 주춧돌들. 이를 통해 옛날 화려했던 창림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창림사지 귀부. 처음에는 그냥 바위인줄 알았다. 중앙에 보이는 검은색 물체.)
창림사지 귀부는 안타깝게도 머리가 없었다. 하지막 잘 조각된 발과 등껍질 등은 이 귀부가 얼마나 잘 조각된 작품인지를 알려준다. 다행히도 쌍거북의 머리 중 하나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이 창림가지 귀부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신라 최고의 명필 김생의 비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생은 80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는 신필 중의 신필로 그의 글을 보고 중국인들은 왕희지가 부활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 김생은 왕희지의 서체를 본받았지만 자신만의 독창적인 필체로 완성시켰다. 하지만 딱히 그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충주에는 지금도 김생사지라는 절터가 남아 있으며 중국에서는 동국(東國)의 서성(書聖)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창림사지 귀부. 발이 굉장히 앙중맞다. 한 때 저위에는 신필, 김생의 비문이 서있었을 것이다.)
(창림사지 일대. 왼쪽이 추알미사지 귀부, 오른쪽이 창림사지 삼충석탑이다.)
분명히 재답사하는 기분으로 상당히 가볍게 갔는데 상당히 고생을 하고 온 기분이 든다. 어떤 답사도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않될 것 같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창림사지 귀부. 날씨가 좀 더 맑을 때 왔더라면 그 멋진 모습을 더 빛낼 수 있었을텐데. 좀 아쉽다.
(2013. 1. 13. 日)
새롭게 펼쳐라!
羅新
첫댓글 남산 일대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삼층석탑과 특이한 형태의 귀부가 남아 있는데 귀부는 거북 2마리가 조각된 것으로 잔등 위에 비신의 흔적이 있는데 답사를 한지 하도 오래되어 별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하여튼 답사를 하느라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