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이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를 완성한 것은 1908년 9월 8일이고 초연은 다음 해인 1909년 1월 9일 파리의 에라르 홀에서 열렸다. 이 날 초연을 담당했던 피아니스트는 프랑스와 스페인 음악의 옹호자이자 라벨의 오랜 친구였던 리카르도 비녜스(Ricardo Viñes)였다. 1875년생 동갑이었던 두 사람은 모든 예술적 방향을 함께 하는 친구들의 모임에 속해있었는데, 비녜스는 1898년에 [고풍스러운 미뉴에트]를 초연하면서 라벨의 음악을 대중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고, 1902년 4월 5일에는 [물의 유희]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4년 뒤에는 [거울]을 초연했다. 이 가운데 [거울]의 각 악장들은 모임의 회원들에게 각각 헌정되었는데, 비녜스는 ‘슬픈 새’를 헌정받았다. 안타깝게도 비녜스는 라벨의 작품을 녹음으로 남기지도 못한 채 1943년 궁핍한 상태에서 생을 마감했다.
물이 튀고, 요정이 날아오르는 환상적인 이미지
비녜스는 학창시절 라벨에게 알로이쥐 베르트랑(Aloysius Bertrand, 1807~41)의 시를 소개해주었고, 여기에 영감을 받은 라벨은 ‘옹딘(물의 요정)’, ‘교수대’, ‘스카르보’, 이렇게 세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밤의 가스파르]를 피아노를 위해 작곡했다.
이 위대한 피아노 음악은 시상의 분위기와 느낌을 고스란히 음악으로 반영한 작품으로서, 연주자로 하여금 초인적인 비르투오시티와 천재적인 상상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난곡 중의 난곡으로 손꼽힌다. 과시적인 비르투오소 작품이라기보다는 참된 비르투오소를 필요로 하는 이 작품은, 정신과 기술을 최고의 경지에서 결합한 리스트의 위대한 피아노 작품들의 빛나는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의 근원이 된 시를 지은 베르트랑은 원명인 루이보다 세례명인 알로이쥐로 더 잘 알려진 시인으로서 프랑스의 선구적인 낭만주의 예술운동가다. 피에몬테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로랑 지방 출신의 헌병대 대장이었고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이었다. 루이 11세가 프랑스로 통합하기 이전의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였던 디종에 정착해 살았는데, 베르트랑은 몹시 가난했고 저널리스트로서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병약하기까지 해서 짧은 생애밖에 누릴 수 없었다. 그 시기에 그는 ‘밤의 가스파르’라는 제목으로 몇 개의 시와 낭만적인 펜화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1라벨은 [밤의 가스파르]에서 프랑스 인상파 음악의 섬세한 음향, 묘사력, 고난이도의 테크닉 모두를 선보이고 있다. <출처: NGD>
작가 샤를르 오귀스탱 생트-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 1804~1869)와 조각가 피에르 장 다비드(Pierre Jean David, 1789~1856)는 이 시집을 높이 평가했는데, 베르트랑이 그 원고를 맡겨만 두고 보수에 대해서는 처분만 바라고 있던 것을 지켜보다 못해 출판업자에게 서둘러서 출판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출판은 지연되었고 1842년 베르트랑이 세상을 떠난지 1년 뒤에야 비로소 비평가 생트-뵈브의 기나긴 찬사가 덧붙은 채 출판되었다. 이 지방시인의 시집은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와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에 의해 재발견되었는데, 특히 보들레르는 [밤의 가스파르]에 감동을 받아 최소 스무 번 정도를 읽은 후에 산문시집인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를 쓰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말라르메 또한 “베르트랑을 읽어라.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시대의 걸작으로 추앙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라벨 덕분이다.
1. 물의 요정 (Ondine)
베르트랑의 환상적인 언어가 라벨의 음악적 상상력을 자극한 첫 번째 장으로서, 물방울이 튀어오르는 모습과 파도치는 잔잔한 물결이 피아노로 구현되는 첫 대목은 순결한 아름다움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다.
옹딘은 남편의 사랑을 잃고 결국 남편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는 전설 속의 물의 요정으로서, 라벨은 신비롭지만 창백한 파란색이 연상되는 화성으로 상처받은 요정의 절박함과 음산함, 집착 등등을 32분 음표의 홍수로 황홀하게 펼쳐낸다. 리스트의 [에스테장의 분수]의 훌륭한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는 ‘물의 요정’은 [물의 유희 Jeux d'eau] 이후 물에 대한 라벨의 묘사력이 극한에 다다른 걸작으로서, 그의 작품을 꾸준하게 연주했던 영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해럴드 바우어(Harold Bauer, 1873~1951)에게 헌정되었다.
1곡 ‘물의 요정’은 물에 대한 묘사력, 요정의 음산한 느낌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내고 있다. <출처: wikipedia>
“들어봐요, 들어봐요! 부드러운 달빛에 비친 당신의 유리창에 물방울을 흩뿌려 울리게 하는 것은, 나 물의 요정이랍니다. 그리고 여기 무지갯빛 가운을 걸친 저택의 아가씨가 발코니에 서서 별이 총총한 밤의 아름다움과 잠든 호수를 바라보고 있어요. 흐름을 헤엄치는 물방을 하나 하나가 물의 요정이고, 흐름의 하나하나가 나의 거처로 가는 오솔길이며, 그리고 나의 거처는 깊은 호수 속에 불과 흙과 공기의 세모꼴 속에 물로 만들어져 있죠 들어봐요, 들어봐요! 나의 아버지는 푸른 버드나무 가지로 물가를 찰랑거리고 계시죠. 그리고 나의 자매들은 그 물거품의 팔로 물백합과 글라디올러스가 우거진 푸른 풀의 섬을 쓰다듬고, 수염을 드리우고 구부정하게 강물에서 낚시하는 버드나무를 놀려대지요”
낮은 목소리로 그녀는 나에게 애원했다. 그녀의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고 물의 요정의 남편이 되어 그녀의 거처에 와서 호수의 왕이 되라고. 그리고 나는 인간 여성을 사랑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샐쭉해져서 투정부리며 나지막하게 울고, 갑작스럽게 소리내어 웃더니 물방울이 되어 나의 푸르스름한 창문을 타고 하얗게 흘러내려서는 이내 흩어져버렸다.
2. 교수대 (Le Gibet)
해질 무렵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을 황량하고 조용하며 엄숙하게 묘사한 두 번째 장인 ‘교수대’는, 앞선 ‘물의 요정’의 관능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와 사뭇 대조를 이룬다. 죽음을 암시하는 B 플랫의 종소리가 페달의 효과와 저역의 반복적인 리듬과 함께 집요하게 울려퍼지며, 나른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더불어 일종의 종교적인 정화의 이미지까지를 기괴하게 내비친다. 음악 평론가 장 마르놀은 친구였던 라벨의 음악을 열정적으로 옹호했는데, 라벨은 “이 곡은 셋 중에서 가장 덜 어려우니까 자네도 연주할 수 있을꺼야”라는 편지와 함께 이 작품을 그에게 헌정했다.
아! 내가 들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밤바람의 음산한 울림이었던가? 아니면 교수대에 매달린 죽은 이의 한숨인가? 아니면 그것은 나무가 불쌍히 여겨 보호해 주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었던가? 그것은 죽음의 소리에 멀어버린 귓가에서 파리가 먹이를 찾는 신호인가? 아니면 벗겨진 머리의 피투성이 머리칼을 잡아뜯는 풍뎅이인가? 아니면 아마도 죄어진 그 목을 장식하려고 길다란 머슬린을 짜는 몇 마리의 거미인가? 그것은 지평선 너머 마을의 벽에서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붉은 석양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목 매달린 시체...
3. 스카르보 (Scarbo) ‘스카르보’는 피아노 역사상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손꼽히는데, 그 연주 효과 또한 최고 수준이다. 라벨은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 Islamey]보다 더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을 작곡하고자 했고, 결국 그 염원은 ‘스카르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장난치기 좋아하는 난쟁이 요정인 스카르보의 익살스러움과 괴기스러움을 그려낸 이 음악은 격렬한 액센트와 숨가쁘게 전환되는 장면들, 질주하는 음표와 옥타브의 향연으로 점철되어있는 만큼, 연주자로 하여금 고도의 테크닉과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요구한다.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저 수많은 음표를 또렷이 살려내야 하는 테크닉과 여기에 격정과 몽환을 오고가야 하는 컨트롤도 중요하지만, 특히 건조한 페달과 깊은 페달의 효과적인 사용을 통해 악보에 적혀있는 것 이상의 음향 조탁과 영상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 곡은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스위스 출신의 피아니스트 루돌프 간츠(Rudolph Ganz, 1877~1972)에게 헌정되었다.
오! 몇 번이나 나는 스카르보를 보고 들었던가. 황금빛 꿀벌로 얼룩진 남색 깃발 위에 은화 같이 달이 밝은 한 밤중에! 몇 번이나 나는 들었던가, 내 침대를 둘러싼 실크 커튼 속에서 긁어대는 듯 울려퍼지는 그의 웃음소리를. 몇 번이나 나는 보았던가, 천정에서 떨어져서 손을 놓은 마녀의 빗자루처럼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것을. 그리고 그가 사라지는가 하고 생각하자마자, 그는 대성당의 첨탑처럼 커지고 또 커져서 달빛을 가리고 그의 뾰족한 모자에서는 금종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의 몸은 푸르게 변하여 마치 촛농처럼 투명해졌다. 그의 얼굴은 꺼져가는 양초처럼 창백해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추천음반 라벨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로베르 카자드쥐의 연주(SONY)는 그 일관성 높은 템포와 화성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으로 명반으로 칭송받아왔다. 한편 알프레드 코르토와 마그리트 롱을 사사한 마르셀 마이어의 연주(EMI) 또한 강력한 힘과 긴장감 넘치는 표현으로 개성적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DG)는 이 작품이 표현할 수 있는 정점을 보여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듯한 호연을 보여준 바 있다. 마지막으로 장-이브 티보데(DECCA)는 음색과 터치, 다채로운 음향과 다양한 리듬의 향연을 펼쳐내며 라벨 피아니즘 고유의 화려함과 우아함을 선보인다.
글 박제성 / 음악 칼럼니스트,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 역자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