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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書經]에 나타나는 동방민족의 역사
옛날 중국中國엔 좌우이사左右二史라는 제도가 있었다. 좌사左史는 왕王의 말씀을 우사右史는 왕王의 행사를 기록했다. 이들에게 전승傳承해오던 황제黃帝의 현손玄孫 제괴帝魁의 서書로부터 진秦 목공穆公에 이르기까지 3240편篇의 서書를 오래되고 확실하지 않은 걸 버리고 법도法度가 될 만할 120편篇만을 추려 정리한 것이(총總 편수篇數의 4%도 채 되지 않는데 그 많은 나머지는 왜 버렸을까? 도대체 어떤 내용을 기록했을까?) 상서尙書 즉 후세後世의 서경書經이 된 서적書籍이다. 따라서 지금의 서경書經 형태로 볼 때 유가적儒家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순전舜傳과 익직편益稷篇 그리고 탕서편湯書篇은 내용이 보충補充되거나 변질變質된 경향이 농후하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다. 서경書經은 진秦 이전까지 [서書]로 불려오다가 한漢에 이르러 [상서尙書]라 하였고 그 뒤에 현재의 서경書經이 된 것이다.
<마융馬融>은 [서전書傳 서序]에서 <상고上古 유우씨有虞氏에 대한 서書이므로 상서尙書라 했다>라 했고 <정현鄭玄>은 [서찬書贊]에서 <공자孔子가 서書를 편찬編撰했으므로 이를 높여서 상서尙書라 했다>라 했는데 [위공전僞孔傳]은 <한문제漢文帝 때 복생伏生이 서경書經을 구술口述하고 고서古書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라고 지적한다. 아무튼 [경經]이란 이름이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末葉으로 보는데 대부분 입을 모은다.
내용의 대강은 [우서虞書-하서夏書-상서商書-주서周書]로 이루어졌는데 전해지는 [서경書經] 58편篇 가운데 33편篇은 진秦의 박사博士 복생伏生에 의해 한漢 때 전해진 금문상서今文尙書이며 나머지 25편篇은 한무제漢武帝 말末 노魯 공왕공왕恭王에 의해 공자孔子의 구택舊宅 벽 안에서 발견되어 공안국孔安國이 검토한 고문상서古文尙書이다. 고문상서古文尙書는 송宋의 오함吳椷*주희朱喜*채심蔡沈 등에 의해 위작설僞作說이 제기되어 원대元代의 오징(吳澄 -서찬언書纂言에서 아예 빼버렸다)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고문상서古文尙書는 과두문자(蝌蚪文字 -머리는 둥글고 꼬리는 가늘어 올챙이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으로 종이가 없어 대나무 쪽에 옻칠을 하여 글자를 새겨 넣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문자이다)로 쓰여 졌는데 진秦 이전에 동부지방에서 흔히 쓰던 글자이다. 동방계열이 주로 근거하던 지방이었으므로 한漢 이후부터는 아예 위서僞書로 취급하여 관리조차 하지 않아
멸실滅失*훼손毁損되는 과정을 거쳤다. 분실된 이후 동진東晋에 이르러 예장내사豫章內史 매색梅賾 그리고 요방흥姚方興이 선진제서先秦諸書에 흩어져 있는 공안국孔安國의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모아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서경書經]에 포함된 내용들이다. (이에 대해 정현鄭玄이 지은 진고문상서眞古文尙書는 北朝에서만 인정되다가 결국 도태淘汰되었다).
아무튼 이 책의 위서론僞書論을 확정시키는 데 에 종지부終止符를 찍은 인물들은 청淸의 염약거閻若璩의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혜동惠棟의 실증적 연구인 [고문상서고古文尙書考]가 큰 영향을 미쳤다.
[서경書經]을 관통貫通하는 흐름은 훨씬 후대後代에 완성된
❶ 이상정치理想政治인 유가적덕치주의儒家的德治主義(요堯*순舜*우禹를 이상적 인물로 표현)
❷ 상고기上古期의 역사적 실체實體를 부정하는데 톡톡히 한 몫을 한 유교적천명주의儒敎的天命主義(주공周公을 표본으로 삼으며 천명天命은 변할 수 있어 주周가 그 운명을 받았다는 한족정통주의漢族正統主義 사상)
❸ 동방적 질서를 무너뜨린 주周를(무왕武王의 은殷 토벌討伐은 하극상下剋上이 아니다) 정당화하기 위한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 -이 이론이 올바르다면 왜 뒷날 동방계열이 정당하게 부르짖던 명호개혁시대名號改易時代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면서 끝까지 오호십륙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라고 비하卑下했을까?) 여기에서 주목할 시사점示唆點은 상商이나 주周가 모두 천天이라는 존재를 인정하지만 받아들이는 방법의 차이이다.
상商은 천天으로 표현된 어떤 실체實體에게서(제帝*상제上帝 -하늘 같은 큰 어르신) 직접 수명(受命 -말씀*가르침)을 받는 집권자(執權者 -벽왕辟王)로 행동하는 반면에 주周는 이런 관계를 끊으면서 전달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그 권위를 가진 대행자(代行者 -천자天子)라고 인식한다. 바로 동방계의 실체實體와 단절한다는 정체성正體性의 강조이다. 이런 모든 공자적孔子的 기준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저서著書의 왜곡歪曲과 변질變質로 말미암은 믿음을 떨어뜨렸다.
우서 虞書 - 요전堯傳
[우虞]는 순舜의 다른 이름이다. 그가 자신의 바탕 위에 계보系譜가 통하는 동방계열인 <구축瞿祝 즉 속호束虎와 오회吳回 성盛의 족단族團>을 합쳐서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우서虞書]라 불린 까닭인 순舜 때의 사관史官이 기록했기 때문이다. [요전堯傳*순전舜傳*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익직益稷]이란 5편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준帝俊의 덕을 능히 밝힘으로서 구이와 가까워졌으며 그들과 화목하게 지냈다...모든 어른들과 화합을 이루어나가자 여黎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여 때맞추어 누그러졌다.
..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旣睦...協和萬邦 黎民於變時雍...<요전堯傳>
제준帝俊은 중토中土로 나아간 모든 동방족들의 큰 어르신과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상商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제帝*상제上帝]의 다른 표현으로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요堯는 세력을 뭉칠 때 제준帝俊의 덕德을 따르며 이어간다고 내세웠으므로 동방계열을 빗대어 종종 말하여 지는 <구이九夷나 구여九黎 즉 구족九族>을 포용包容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즉 제준帝俊은
중용국을 낳았으며(帝俊生中容 -大荒東經) 담이국儋耳國을 세운 우호禺號를 낳았는데 그는 북해北海의 신神인 우강禺彊과 혈통血統이 같다
(有儋耳國 任姓 禺號子...北海之渚中 有愼 人面鳥神 珥兩靑蛇 踐兩赤蛇 名曰禺彊 -大荒東經)
우강禺彊은 대황동경大荒東經의 다른 대목에서 우호禺(豸+號)로 나오기 때문이다.
묘예苗裔인 사유가 사유국을 백민이 백민국을 흑치가 흑치국을 만들었다
(有司幽之國 帝俊生安龍 安龍生司幽,,,有白民之國 帝俊生帝鴻 帝鴻生白民...有黑齒之國 帝俊生黑齒 -大荒東經)
아내인 아황이 삼신국을 낳았다(有人三身 帝俊妻娥皇 生此三身支國 -大荒南經)
계리를 낳아 계리국을 세웠으며(帝俊生季釐 故曰季釐支國 -大荒南經)
아내인 희화가 희화국을 만들었다(有羲和之國 有女子名曰羲和...羲和者 帝俊之妻 生十日 -大荒南經).
그래서 한인漢人들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준俊이라 한다(東方曰折 來風曰俊 -大荒東經). 그러므로 위 구절句節의 준俊은 반드시 <중토中土로 확산 된 동방계가 우러렀던 상제上帝인 제준帝俊>이어야 한다.
[여黎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여 때맞추어 누그러졌다(雍). 黎民於變時雍]는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그만큼 많은 그 무렵의 역사적인 상황을 함축含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요堯가 공자孔子의 색칠처럼 대단한 성인聖人이 아닌 권력욕에 파묻힌 한 사람이었을 뿐이라는 본보기 글이다. 상고금문上古金文의 기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사건史件의 전말顚末은 이렇다.
① 전욱顓頊의 맏이 계열로서 직계자손直系子孫인 <성축成祝-중리추허重黎郰墟> 세력은 제곡帝嚳 시대에도 <대형일을大兄日乙-형일계兄日癸>로 존경받을만큼(삼병명三兵銘의 기록) 막강한 족단族團이었다. 전욱顓頊의 셋째 아들인 중여衆艅 곤鯀이 제곡帝嚳에게 두 딸(간적簡狄과 종규終葵)을 보낸 장인丈人으로서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전욱顓頊의 첫째(성축成祝인 축융祝融)와 둘째 아들(구축瞿祝인 속호束虎)이 먼저 죽자 집안을 이끌어 간 인물로서 <중부일계中父日癸>로서 여씨黎氏들의 존경을 받았다.
② 이런 배경에서 중리추허重黎郰墟는 제곡帝嚳의 큰 사위(가재집고록 13책 10-1)로서 다음 자리를 이어갈 자격을 보장받은 재상宰相으로 있었다. 이런 시기에 제곡帝嚳의 큰 아들인 요堯가 등장한 것이다. 결국 권력다툼의 와중에서 중리추허重黎郰墟는 요堯에게 살해되고 만다. 중리추허重黎郰墟의 동생인 오회吳回도 요堯가 자리에 오른 다음 명목뿐인 자리를 주어 유주幽州로 내보내고 있다. 중여衆艅 곤鯀도 예외는 아니어서 요堯가 오른지 3년 뒤에는 권력의 압박에 승복承服하여 허리를 굽히면서 스스로 몸을 낮추게 된다(병오정丙午鼎 -가재집고록 5책 14-1).
③ 이에 대한 전욱계顓頊系와 신농계神農系 세력의 반발이 거세어지자 요堯는 이를 무마撫摩하려는 방편으로 이들 집단의 핵심 인물에게 작위爵位를 주거나 통혼을 하여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이를 명분으로 교외郊外로 몰아낸다(일례一例를 들자면 오회吳回의 아들인 육종陸終에게 딸 안安을 주어 사위로 삼은 뒤 둘 다 유주幽州로 보낸다).
④ 이런 일련一連의 사태를 못마땅하게 본 세력이 바로 여씨黎氏들인데 제곡帝嚳에 앞서 중앙과 지역에서 뿌리가 굵게 내린 전욱계顓頊系가 대표적이었다(맏이인 성축成祝의 네 번째 이름 여黎 또는 이犁*성축成祝의 맏아들인 중려추허重黎郰墟*전욱顓頊의 둘째아들인 구축瞿祝의 씨칭氏稱 여旅*세째인 중여衆黎 곤鯀*네째인 여목余目 또는 여목餘目이 모두 『여』를 이름자로 삼고 있다). 요堯가 이들의 집안 어른을 죽이거나 몰락시켰으니 냉담해진 건 마땅하다.
⑤ 요堯는 곤경에 빠지자 다시 한 번 묘수妙手를 부린다. 배 다른 동생인 지摯를 다음 자리로 양보하여 모든 허물을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는 8년 동안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를 보임으로서 돌아섰던 여씨黎氏들의 마음을 움직여 협력 벨트를 만든 다음 지摯를 끌어내리고 뒤를 이은 것이다. [黎民於變時雍]은 이런 상황을 한 마디로 함축含蓄하는데 공자孔子는 이를 무시했다.
희화씨羲和氏에게 말씀하기를 당신을(若) 큰 해님(昊天)처럼 공경하며 동방(辰)의 해달별을 상징象徵하는 ~이(易 yì)로서 어른 씨(人時 rén-shí)라는 이름을 정중하게 드립니다(敬授).
乃命羲和 欽若昊天 易象日月星辰 敬授人時...<요전堯傳>
여기에서 [희화羲和]는 희화씨羲和氏를 어른으로 모시는 세력이다. 왜냐하면 희화羲和는 신농神農의 아들인 희화羲和 주柱로서 아들이 전욱顓頊이다. 뒷날 전욱顓頊이 자리에 오르자 아비의 명命으로 남방을 다스리는 일을 맡은 손자 성축成祝을 도우면서 남악南嶽 형산衡山에서 생生을 마감했다. 그래서 [산해경山海經 대황남경大荒南經]에 희화국羲和國이 나오는데 이로보아 요堯가 있을 때에는 희화씨羲和氏 새력집단으로 충분히 기반을 닦은 만만치 않았던 중앙에서 몰락한 전욱계顓頊系의 지방 근거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요堯는 그들 세력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마치 요堯가 명한 것처럼 기록한 직책이 왜 [해와 달과 별을 관찰하여 책력冊曆으로 기록하는 일 易象日月星辰]일까? 상고금문上古金文을 보면 희화羲和 xì-hë는 우리말로 <해님 어른 씨>이란 뜻이며(그러므로 산해경山海經에서 어르신인 해를 낳아 씻기고 있다고 은유隱喩했다.
有女子名曰羲和 方日浴于甘淵 -大荒南經)
여기에서 [감천甘淵 gān]이 <어르신의 연못>이란 말임에서도 능히 짐작이 간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실들이 상고금문上古金文에서 그의 다른 이름으로 나오는 <큰 해님 어른 大和*해 日>이다. 바로 이를 <농사와 관련되는 하늘을 관찰하고 책력冊曆으로 만드는 일>로 둔갑시켰다. 그의 다른 이름에 처음 나오는 직稷 jì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 우리말로서 <어른 ~지>일 뿐이다. 공자孔子는 이런 사실을 숨기려고 애써 희羲와 화和를 분리시켜 해석하고 있다. 동방계를 사는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러 산란散亂시키는 수법과 매우 닮았다. 그런 까닭으로 <이에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호천昊天을 공경히 따라서 해와 달과 성진星辰을 역상易象하여 백성들의 농사철을 공경히 주게 하셨다>라고 해석한다. 어째서 이렇게도 어렵게 푸는가?
□□□□ [여기서 잠깐] □□□□
여기에서 우리가 매우 정교精巧하게 풀어야 할 부분이 있다. 요堯를 둘러 싼 사방四方의 정세와 세력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설명구조에서 다음과 같은 뚜렷한 논리전개의 규칙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신농神農의 첫 아들이며 집안의 어른 씨였던 희화羲和는 이런 방식에서 제외되었다. 그가 모든 세력의 중심이기 때문이다(그래서 日月星 辰으로 대표된다).
동방 주변 세력을 대표하는 희중羲仲은 해님 일日이라는 이름을 지닌 희화羲和의 핵심이며(日中) 때문에 <厥民析 鳥獸孶尾>이다.
남부 경계 세력을 대표하는 희숙羲叔은 해님 일日이라는 이름을 지닌 희화羲和의 먼 핏줄인 방계傍系이며(日永) 그래서 <厥民因 鳥獸希革>이다.
서편 변두리를 대표하는 화중和仲은 해님 일日이라는 이름을 지닌 희화羲和와 닮은 집단이며(宵中 -서로 닮을 소宵 xiāo는 소리가 『~저』로 전욱계顓頊系의 모범적인 씨칭氏稱이니 서로 씨氏가 섞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厥民夷 鳥獸毛毨>이다.
북쪽 접경接境 세력을 대표하는 화숙和叔은 해님 일日이라는 이름을 지닌 희화羲和와 깊은 관계를 가진 집단이며(正仲) 그런 까닭으로 <厥民隩 鳥獸氄毛>이다.
대단한 이중적 설명방식인데 이렇게 된 이유는 물론 孔子의 붓장난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작의 치명적인 缺陷은 孔子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글자를 빌려 쓸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바탕이 되는 소리글자를 정교하게 따라가면 원래 이야기하려고 했던 뿌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 문장文章들에서 선뜻 눈에 잡히는 부분은 후려무後斂句의 철저한 대응구조對應構造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무언가 말하려는 뜻이 숨어 있다. 이런 배경을 인식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그 무렵의 상황에 견주어 본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첫 구句는 민民이 키포인트이다.
❶ 동방을 지적한 <그 사람들은 씨라고 한다. 厥民析>에서 [석析 xī]은 소리 그대로 <씨>라고 부르는 동방계라는 말이다. 그런데 다음에 설명하는 전체 문장구조를 감안해 보았을 때 <석析은 아무래도 절折 zhē>의 왜곡歪曲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
[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大荒東經]을 보면
<해와 달이 돋는 동쪽을 절이라 하는데 이곳에 절단이라는 신인神人이 있어 바람을 보내고 거두어들인다. 大荒之中...日月所出 (학의행郝懿行은 유신有神 혹은 유인有人이 빠졌다고 지적한다) 名曰折丹 東方曰折 來風曰俊 處東極以出入風>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임. 바로 앞서 말한 전욱계顓頊系 우강禺彊 집단과 매우 친밀하다.
❷ 남방을 이야기한 <그 사람들은 인이라 한다. 厥民因>는 [산해경山海經 대황남경大荒南經]에서 <인인호라는 신이 있다. 남방을 인호라 하고 불어오는 바람을 호민이라 하는데 이 신이 바람을 들어가고 나가게 한다. 有神名曰因因戶 南方曰因戶 夸風曰戶民 處南極以出入風>라고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❸ 서부의 세력을 말하는 <그 사람들은 ~이라고 한다. 厥民夷>는 [산해경山海經 대황남경大荒南經]에서 <석이라는 사람이 있다. 서쪽을 이夷라 하고 바람을 불어오게 하는 걸 위라 하는데 서북쪽 모퉁이에 살면서 해와 달의 길고 짧음을 맡아보고 있다. 有人名曰石夷 來風曰韋 處西北隅以司日月之長短>라고 기술되었다.
❹ 북쪽의 집단을 말하는 <그 사람들은 여씨이다. 厥民隩>에서 [오隩 yù]는 전욱계顓頊系와 신농계神農系가 합쳐진 여씨余氏들이다. 그래서 [대황북경大荒北經]은 전욱계顓頊系의 자손들로 이루어진 고을나라가 많으며 서북면을 지키는 신神으로 <서북해 밖 적수 북쪽에 촉룡이라는 신이 있다. 사람 얼굴에 뱀의 몸인 촉룡이 있는데 눈을 감으며 어두워지고 뜨면 밝아지며 비바람을 불러올 수 있다. 西北海之外 赤水之北 有章尾山 有神 人面蛇身而赤 直目正乘 其暝乃晦 其視乃明 不食不寢不息 風雨是謁 是燭九陰 是謂燭龍>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어지는 구문句文도 조금 달리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① 동방의 <鳥獸孶尾>에서 [자미孶尾 zī-yĭ]가 소리로서는 <절折이라고 불리는 희중羲仲을 따르는 이들의 어른>이라 풀어지는데 필자筆者는 오히려 앞부분에서처럼 [자孶가 얼孼>을 살짝 비튼 것으로 보고 싶다.
② 남부를 설명한 [鳥獸希革]에서 <희혁希革 xī-gé*jí>은 <인因으로도 불리는 희숙羲叔 계열의 어른 씨 –gé는 해가 변화한 소리 값이기도 하다>로
③ 서편을 말하는 [鳥獸毛毨]에서 <모선毛毨 máo-xiăn>는 <이夷로 불리는 신농계(神農系 -선毨은 모범적인 지표指標 소리 값이다)와 전욱계(顓頊系 -앞 절節에서 대응시킨 소宵와 모毛는 [1] 전욱계顓頊系의 대표소리 값이다)의 혼합 집단>으로
④ 북쪽을 이야기하는 [鳥獸氄毛]에서 [용모氄毛 rŏng-máo]는 <뒷날 용방龍方 lóng*庸 yōng으로도 나타나는 신농계神農系 nóng와 전욱계顓頊系의 결합세력>이다. [산해경山海經]에서도 이들 세력의 뿌리를 짐작할 수 있는 [촉룡燭龍]이라는 신神이 등장하고 있다.
[1] 모민毛民은 <~저>라는 작인綽人 chuõ으로 표현되며 같은 서북 지역에 있는 것으로 기록된 묘민苗民은 환두驩頭와 같이 전욱顓頊의 자손이다(대황북경大荒北經). 같은 계열로 보이는 우민국도 전욱顓頊의 자손이다(대황남경大荒南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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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이라는 우이의 터에 있던 희중에게도 말하기를 해가 돋는 곳의 손님으로서 삼가고 공경하게 맞을 것(寅賓)이니 해님 어르신을 중심으로(日中) 샛별처럼 어우러져 있는(星鳥) 동편의 어른(秩 zhì)들을 잘 바로잡아 다스려 주십시오(平作)...
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 日中 星鳥...<요전堯傳>
이 대목의 키포인트는 희중羲仲에게 우이嵎夷 지방을 맡겼다는 것이다. 우이嵎夷는 한족漢族의 여러 문헌文獻에서 <우愚*偶*于*隅*虞*尤*芋*嵎*禺*紆>로 가장 어지럽혀 놓은 글자이다. 그만큼 알려주고 싶지 않은 그러나 잊혀 잘 수 없는 동방의 강력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인식해서였을까?
왜냐하면 [우嵎 yú]는 우리말로 <여>이니 바로 요堯가 무너뜨린 전욱顓頊 계열이다. [산해경]에서 등장하는 동방이나 동북방지역의 신인神人들인 <우강禺彊*우경禺京*우아于兒*우호禺(豸+虎)*우호禺號> 등이 모두 친밀하다. 우이嵎夷의 어른이 계보적系譜的으로 이어져 있음을 말한 것이다.
결국 요堯는 남방의 희화羲和와 그 동부와 동북부에 걸쳐 연결되어 있던 희중羲仲의 세력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희중羲仲은 어떤 존재로 나타나고 있을까? 전욱顓頊이 신농神農의 아들로 표현될 만큼 두 씨氏들은 혈통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감안할 때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의 다음 기록이 주목된다. 염제의 아내요 적수의 딸인 청요가 염거를 낳고 염거가 절병을 낳고 절병이 희기를 낳고 희기가 축융을 낳았는데 축융이 강수에 내려와 살면서 공공을 낳고 공공이 술기를 낳았다.
..炎帝之妻赤水之子廳訞生炎居 炎居生節並 節並生戱器 戱器生祝融 祝融降處于江水 生共工...
즉 염제(炎帝 -신농계神農系)와 청요(廳訞 yāo -여씨黎氏로 전욱계顓頊系)가 통혼관계通婚關係를 맺어 그 자손 가운데 희기戱器라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희戱 xì]는 희羲와 소리가 같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구文句에서는 아예 전욱顓頊의 아들인 축융祝融과 묶어(戱器生祝融) 매우 친밀한 혈통血統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축융祝融도 신농계神農系의 텃밭인 강수江水 지역에 자주 들락거린다(祝融降處于江水). 이제 여러분은 왜 희중羲仲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도 희씨羲氏이지만 희화羲和처럼 직계直系가 아닌 두 씨가 섞인 방계傍系이므로 [버금가는 중仲]이란 표현을 한 것이다. 희숙羲叔은 신농神農 집안을 이끌고 있던 전욱顓頊의 말씀에 따라 남쪽으로 가서 밝은 터(明都)라 이르는 데에 자리를 잡았다. 남쪽의 그릇된 어른들을 바로잡으라는 말씀을 정중하게 받아들여 정성을 다했다.
申命羲叔 宅南交 曰明都 平秩南訛 敬致...<요전堯傳>
이 부분은 조금 깊은 통찰通察이 필요하다. 첫마디를 다른 대목과는 다르게 신농계神農系의 상징인 [신申]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집안의 말씀에 따라 남쪽으로 가서 터전을 잡았다고 하니 마치 전욱顓頊이 남쪽의 동방계를 어우르려고 맏이인 축융祝融을 보낼 때 같이 가서 도와 준 장인丈人 희화羲和를 보는 듯하다. 한인漢人들은 [남교南交의 교交]를 교지交趾라 한다. 억지도 유분수지 이 무렵에 그곳까지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 매곡이라는 서쪽 터에 살고 있던 화중에게 말하기를 해님 어른을 받아들여(納日) 서쪽의 어른들을 바로잡아 기틀을 이루었으니 삼가고 정중한 마음으로(같은 동료同僚로서) 가는 걸 막지 않으리다(寅餞)...신농神農(신)은 화숙을 유도라고 하는 북쪽 땅(朔方)에 터를 잡게 하고 북방에 살고 있는 이(易 yì)을 바로 잡으라 말씀하였다.
分命和仲 宅西 曰昧谷 寅餞納日 平秩西成 宵中星虛...申命和叔宅朔方曰幽都 平在朔易 日短星昻...<요전>
요堯는 제곡帝嚳의 터를 이어받았다. 제곡帝嚳은 부인들의 출자出自에서도 보이다시피 사방四方의 동방계열 어르신들과 씨氏의 통합을 이루려고 애쓴 사람이다. 그러나 요堯가 억지로 자리를 잇는 과정에서 지난날 제곡帝嚳과 통혼通婚 때의 말다짐들을 깨뜨리는 결과를 빚는 바람에 사방四方의 동방세력들이 등을 돌렸다. 다시 말해 비록 요堯가 중앙의 탓밭을 얻기는 했으나 그 주변은 다시 전욱계顓頊系와 신농계神農系로 떨어져나가는 상황을 색칠하여 그린 것이다. 이 당시 [朔方曰幽都]는 경수涇水와 분수汾水의 위쪽을 말한다. 그곳에 신농씨神農氏 계열인 화숙和叔이 근거하고 있었다. 요堯가 희화羲和에게 자문諮問을 구했다. 동방계의 많은 씨 어른들의 언니(允)로서(마음을 얻어내고) 여러 어른(績)들을 두루 밝고 빛나게 어우르는 길에 관해서였다.
帝曰 咨汝羲曁和...允釐百工 庶績咸熙...<요전堯傳>
[자여咨汝]는 서로 대등對等한 위치에서 묻는 것이기도 하다. 구태여 이 문구文句를 쓴 까닭이 바로 필자筆者가 설명한 위의 내용을 역설적逆說的으로 증명해준다. 따라서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이 기록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즉 요堯는 희화계羲和系 세력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물음을 구한 이유가 공자식孔子式대로 풀면 뚜렷하지가 않다. 그렇다면 요堯는 과연 무얼 물었을까? 아마도 그가 자리에 오르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사방四方의 동방 세력에 대한 기득권旣得權을 인정하였다면 물은 내용은 마땅히 <동방계의 많은 우두머리들의 언니로서 여러 어른들을 두루 밝고 빛나게 어우르는 길 允釐百工 庶績咸熙>이다. 그러므로 [윤允]은 소리대로 하면 <언니 뻘>이며 뜻을 받아들인다면 <마음을 얻는 것>이고 당연히 [이釐 lí]는 <동방계라는 리>이며 이에 대응하는 [적績 jī]은 <어른 ~지>이다.
요가 말하기를 전욱씨의 어른들은(疇咨) 때를 어기지 않고(時) 그동안의 도리道理에 따라(若) 신농씨의 무리들과 함께(庸) 이루어졌구나(登)! 방제가 대답하여 맏아들인(胤子) 단주丹朱가 밝게 깨우쳐 이끌 것입니다. 요가 말했다. 아(吁)! 어리석고 다투기만 하니(嚚訟) 어찌 올바르겠는가?
帝曰 疇咨若時登庸 放齊曰 胤子朱啓明 帝曰 吁 嚚訟 可乎?...<요전堯傳>
[이아爾雅 석고釋詁 하下]에서 <주는 누구*어떤 사람이다*등은 이루다*이루어지다. 주疇...수야誰也*登...成也>로 [석고釋詁 상上]에서 <자는 꾀하다. 咨...謨也>로 [석언釋言]은 <약은 도리를 따르다*순하다. 若...順也>라 했는데 근거를 모두 [주역周易*예기禮記*국어國語*서경書經]에서 들고 있다. 결국 한인漢人들이 그렇게 해석한다면 우리도 이렇게 풀 수 있다는 결론이다. 즉 [주자疇咨 chóu-zī]는 <저는*저희를 인칭대명사人稱代名詞로 쓴 전욱계顓頊系 저씨(豬氏 -시씨豕氏 *해씨亥氏*돈씨豚氏로 확장된다)의 어른>이며 이와 대비되는 [용庸 yōng]은 신농계神農系의 어른 씨이다. <방제放齊>는 요堯와는 혈통血統이 조금 다른 <방씨方氏 족단族團>으로서 우리나라에서도 잡기雜鬼*역귀疫鬼를 쫒는 귀신鬼神으로 널리 알려진 방상씨(方相氏 -주周의 하관下官이니 하는 기록은 믿지 않는다)를 필두筆頭로 제곡帝嚳 때 견융犬戎의 시조로서 알려진 반호盤瓠가 정벌征伐한 방왕房王의 후손後孫일 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순舜 무렵의 방악씨方岳氏*우禹 때의 방풍씨防風氏로 불려졌는데 하대夏代의 방이方夷로 이어진다(죽서기년竹書紀年). 결론적으로 요堯는 후계後繼를 잘못 골라 다시 동방계에게 흔들려 무너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 요가 말하였다. 전욱씨의 어른들은(疇咨) 그동안의 정리情理에 따라(若) 크게 여黎의 무리가 되었구나! 환두가 대답했다. 아하(都)! 적어도 ~저씨豬氏들에(鳩 jiū) 관한 방면方面에서는 공공씨들이 공적功績을 나타내었습니다. 요는 탄식하며 말했다. 신농씨神農氏를 위반違反할 때에도 말은 정숙靜肅했다. 그러므로 비록 인상印象이 공손恭遜하여도 마침내 나(천군天君)를 넘어설 것이다.
帝曰 疇咨若予采 驩兜曰 都 共工方鳩 功 帝曰 吁 靜言庸違 象恭滔天...<요전堯傳>
[여채予采 yú-căi]는 소리대로 <여씨의 큰 무리>이며 [이아爾雅 석고釋詁 부上]에 <도는 감탄사이다. 都...於也>라 했다. 하여튼 원문原文을 있는 그대로 보면 마치 토막나버린 끈과도 같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 공공共工이 왜 그리고 어떤 공功이 있는지? 요堯가 여씨黎氏들의 움직임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데 왜 별안간 공공共工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지? 도무지 이해가 어렵다. 허나 공공共工이 전욱계顓頊系와 치열한 격돌激突을 벌인 사실을(부주산不周山 전역戰役을 알려 준 여와보천女媧補天 설화說話) 이해하면 궁금증이 금방 풀린다. 요堯 무렵에는 물론 이런 기억이 생생하였을 터이니 거세게 일어나는 여씨黎氏 세력을 컨트럴하기에는 공공共工이 가장 알맞다고 추천한 것이다.
필자筆者가 해석한 요堯의 말(疇咨若予采)이 일정한 부분에서 일리가 있음을 입증立證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方鳩]를 <모을 구鳩>라고 구차스헙게 해석하는 입장보다는 문맥文脈에 따라 <적어도 ~저씨豬氏들에 관한 방면方面에서는>으로 보는 게 훨씬 편하다. 이들의 존재와 관련하여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 나타나는 동방의 신인神人으로서 소호계(少皥系 -새의 몸에 사람 얼굴로서 두 마리 용을 탔다. 鳥身人面 乘兩龍)와 결합한 구망句芒 jû-máng이나 [대황북경大荒北經]에서 모범적인 소호계少皥系 신인神人 구봉九鳳 jiū(九首人面鳥身)과 같이 근거하는 강량(彊良 -전욱顓頊과 친밀한 우강禺彊 계열이다. 虎首人面)이 있다. 강량彊良은 속호(束虎 -전욱顓頊의 둘째 아들인 구축瞿祝 ju의 다른 씨칭氏稱이다)와 계통이 같은데 여기에서 한족漢族들이 즐겨 바꾸어가며 소리 값을 표기表記하는 [구鳩*句*九*仇.*瞿]는 모두 소리가 같거나 닮았다. 이러한 언어적言語的 접근방식을 더 들자면 [대황동경大荒東經]의 <곤민국 kùn은 중여衆艅 곤鯀 gŭn의 묘예苗裔로서 구성句姓 jû이다. 有困民國 句姓>와 같은 예例이다.
[해내경海內經]을 보면 환두驩兜가 공공共工 존재를 요堯에게 알려주는 까닭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인다. <축융이 강수에 내려와 공공을 낳았다. 공공은 술기를 낳았는데 술기는 이마가 모나고 평평하였다. 그는 땅을 되찾아 강수에서 살았다. 祝融降處于江水 生共工 共工生術器 術器首方顚 是復土穰以處江水>라 하여 전욱계顓頊系인 축융祝融이 신농계神農系와 손을 잡으면서 그의 터전이 되었던 강수江水에 근거를 마련했는데 거기에서 공공共工과 만났으며 공공共工의 자손인 술기術器 무렵에 부주산不周山 전역戰役에서 패敗해 잃었던 강수江水 지역을 다시 찾은 듯하다. 그러므로 이 무렵 공공共工 세력은 요堯와 전욱顓頊 계열과의 사이 어디엔 가에 있었다. 이를 대변代辯해주는 기록으로 [해외북경海外北經]에서 공공共工의 신하臣下로 나타나는 상류씨相柳氏가 우禹에게 패敗하는 기록이 보이는데 (共工之臣曰相柳氏 九首 以食于九山...禹殺相柳) [대황북경大荒北經]에도 이름만 조금 다르게 나온다(共工之臣曰相繇 九首蛇身 自環 食于九土...禹湮洪水 殺相繇). 우禹는 요堯와 순舜의 중심 강역疆域을 대부분 이어받았으니 이 때까지 공공共工의 세력이 인근隣近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이 나타난다. 요堯가 환두驩兜의 도움말을 물리치는 까닭으로 공공共工이 [靜言庸違 象恭滔天]의 행동을 하거나 할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한 부분이다. 바로 공공共工 세력의 과거 행적行蹟을 알려주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용庸 yōng]은 소리로 보아 신농계神農系를 말하므로 부주산不周山 전역戰役을 전후前後로 하여 전욱顓頊과 손을 잡은 신농神農 계열에 실망하여 등을 돌린 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인 과정을 요堯가 잘 알고 있음을 알려준다. 아울러 상고금문上古金文을 살펴보면 요堯가 천군天君이라 행세한 기록이 뚜렷하다(병오정丙午鼎 –가재집고록 5책 14-1).
요가 말했다. 사방四方의 어른(咨 zī)들이여! (세상을) 큰 물결이 움직이고 흔들며 사방四方을 분할分割하고 있어 산마다 이르러 머무르며 큰 언덕마다 올라가 머리를 쳐들고 단번에 쓸어버릴듯하니 마치 나를 타고 넘칠 듯이 호탕浩蕩하구나! 백성들은 그 어른들에게(咨) 몰리니 재눙이 뛰어난 이에게 시켜 이를 다스리게 하고 싶다.
帝曰 咨四岳 湯湯洪水方割 蕩蕩懷山襄陵 浩浩滔天 下民其咨 有能俾乂...<요전堯傳>
공자孔子는 마치 요堯가 사악四岳을 거느린 듯이 해석했지만 실은 과장誇張이다. 필자筆者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요堯는 자리를 내어줄 때 심지어 무작정 거리로 나아가거나 여러 현인賢人들을 찾아가서 거취去就를 물어보았으나 냉소적冷笑的인 취급을 많이 당했을 만큼 궁색한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악四岳은 그 무렵 요堯의 변경邊境을 둘러싼 채 지속적인 압박을 가한 사방四方의 동방 세력을 말한다고 보는 게 옳다. 그러므로 과거의 해석대로 과연 이를 홍수洪水로 볼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요堯가 진심으로 큰물이 지는 걸 이야기했을까? 아니면 벌써부터 자신의 영역을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오면서 나누고 쪼개어 갖는(方割) 사방四方의 동방 세력을 걱정한 것일까? [이아爾雅 석고釋詁 상上]은 <회는 이르다. 懷...至也>로 소疏는 방언方言으로서 <품다>는 뜻이 있다고 해석한다. [석고釋詁 하下]에서도 <회는 그쳐서 머무르다*이르러 그치다. 懷...止也>라 했다. [석언釋言]도 <회는 오다*불러오다. 懷...來也>라 한다. [예乂 yì]는 우리말 <~이>와 같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僉曰) 같은 여씨(於)로서 곤이 적당합니다. 요가 탄식하며 그렇지 않다! 내 말을 함부로 하며 우리 겨레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사악四岳이 말했다. 비록 뿌리가 이(异 yì)이지만 한번 시험해보고 그만 두는 게(乃已) 옳다. 요가 말했다. 가서 공손히 일을 맡으라! (그러나 곤은)서로를 <저의~*저희~>라고 말하는 아홉 무리의 여씨黎氏들을 만나(九載) 그들과 이어져 부리고 다스리며(績用) 빠르게 세력을 이루었다(弗成)
僉曰 於鯀哉 帝曰 吁 咈哉 方命圮族 岳曰 异哉 試可乃已 帝曰 往欽哉 九載績用弗成...<요전堯傳>
[어於 yü]는 보통 어조사語助辭로 읽는데 필자筆者는 문맥文脈을 감안할 때 곤씨鯀氏들이 왜 추천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수식어修飾語로 본다. 다시 말하여 <이 난국難局을 수습하려면 같은 여씨黎氏인 곤씨鯀氏가 좋다>고 도움말을 한 것이다. 요堯는 한마디로 물리치는데 자칫 호랑이 입에 먹이를 넣어주는 결과를 맞아 명命을 빙자憑藉하여 그들과 몰래 손을 잡을 것이 두려웠을 듯하다. [九載績用弗成]이 주목을 끄는 까닭은 비록 공자孔子가 홍수洪水를 미끼로 삼아 요堯의 허물을 덮으려고 말을 돌렸지만 상고금문上古金文으로 짐작이 가능한 당시의 정세변화와 묘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요堯는 자리에 오르면서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전욱顓頊 계열의 권위權威를 무너뜨리는 일을 꾀하였다. 정적政敵이었던 성축成祝의 아들 중리취허重黎郰墟 [1] 까지 제거한 마당에 마땅한 수순手順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작업은 추허郰墟의 동생인 오회吳回 성盛과 그 아들인 육종陸終에게 명목뿐인 자리를 주어 유주幽州로보내는 일로부터 진행된다.
[1] 집안의 제사祭祀를 모시는 어른인 중리취허重黎郰墟가 저이중려儲荑中黎란 다른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로 보아 이 무렵 이들 족단族團의 씨칭氏稱으로서 <저는*저희라고 하는 저豬라는 말이 완성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마지막 단계로서 요堯 3년을 전후前後하여 전욱顓頊 집안의 실질적인 어르신(中父日癸 -삼병명三兵銘)이었던 중여衆艅 곤鯀으로부터 자신을 천군天君이라고 부르도록 유도誘導해내었다(병오정丙午鼎 –가재집고록 5책 14-1). 몰락沒落의 분기점分岐點이었다. 그런 다음에 일어난 일들이니 내용은 그럴듯하지만 요堯가 다시 새로운 명분名分을 세워 곤鯀까지 중앙에서 몰아내는 과정을 이 대목에 함축含蓄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해결책을 낸 인물들이 공교롭게도 동방주의자東方主義者로 이해되는 사악四岳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었으니 곤鯀의 위엄이 여기에서도 입증되며 그들은 아마도 압박해오는 위험을 느낀 곤鯀과 몰래 만나서 그도 살려 뒷날을 도모하는 계기를 주고 요堯의 걱정거리도 사라지게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는 아이디어를 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옥죄어오는 그물을 벗어난 곤鯀이 돌을 맞는 개구리에서(실제로 병오정丙午鼎의 새김글을 보면
요에게 자신을 개구리 비슷한 그림글자로 낮추었다) 요堯를 노려보는 호랑이가 되었으니 고분고분할 까닭이 없다. 이를 <9년이 지나도록 공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九載績用弗成>라 표현한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筆者는 이 또한 이중적 표현으로 보고 싶다. 즉 [재載 zăi]는 소리 그대로 <저의~*저희~>이니 이렇게 서로를 말하는 아홉 무리의 여씨黎氏들을 만나(九載) 그들과 이어져 부리고 다스리며(績用 -이런 바탕에서 적績 jī을 우리말 어른 ~지로 보아도 좋다) 빠르게 세력을 이루었다(弗成)라고 이해한다. 공자孔子에게 성인聖人으로 추어 올려진 요堯가 결국 곤鯀을 죽인 이유가 자연히 풀려진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숨기고 사기를 친 공자孔子도 그렇게 공정하고 현명한 인물은 아니다. 사실 내용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 가장 완전하게 거짓말을 꾸미는 법이다.
※ <채심蔡沈>은 [서경집전書經集傳]에서 [方命]을 들어 <왕씨가 말하기를 둥글면 굴러가고 모나면 멈추니 방명方命은 그 명령을 버린다는 말이다. 곤의 사람됨이 고집이 세고 이그러져 자신의 주장만 알고 위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王氏曰 圓則行 方則止 方命猶今言廢閣詔命也 蓋鯀之爲人 悻戾自用 不從上令也>라고 해석했으며 [초사楚辭]도 <곤은 강직剛直하고 곧았다. 鯀...婞直>이라 하였다. 왜 이렇게 말했는지? 필자筆者가 이야기한 배경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채심蔡沈이 공자孔子보다 현명하다. 요가 사방四方의 어른들(咨)에게 말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지도 70해이다(더는 미련이 없다는 말이다). 그대들은 능히 동방주의자(庸)들에게 말을 내릴 수 있으니 내 자리를 받으시오. 사악이 대답했다. 그 자리를 내가 받아 더 앉아 있다면 그것은 어진 게(德) 아니다.
帝曰 咨四岳 朕在位70載 汝能庸命 巽朕位 岳曰 否德 添帝位...<요전堯傳>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요전堯傳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용庸 yōng]이란 글자이다. <쓰다*따르다>란 뜻이라면 <용用*종人人>이라는 더 오래고 쉬운 글자도 있는데 굳이 이 글자를 쓴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용庸]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지명地名으로 이어지며 (상商의 주요 거점지대據點地帶인 용鄘*상商과 치열하게 격돌한 서북면의 용방龍方*주周의 남부에 있던 용庸 등) 상고금문上古金文에서는 농農*융戎*融*娀과 통하는 용(甬 -전욱顓頊의 일곱째 아들도 이름이 같다)으로 나타나 신농계神農系와 전욱계顓頊系를 가리지 않고 동시에 등장하는 지표어군指標語群이다. 아마도 두 씨氏들이 어느 무렵에서인가 혼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이런 상황은 요堯 때에도 거의 다르지 않았다. [1]
[1] 두 씨氏들의 지표지명指標地名이 뒤섞여 있는 [산해경山海經 중차팔경中次八經]에 그들의 대표적인 지명地名인 용산龍山과 형산衡山이 나란히 있다. [서차이경西次二經]도 서북면의 신농계神農系 대표적인 활동지역인 경수涇水 부근에 있는 용수산龍首山이 나오고*태행산太行山부터 시작하는 [북차삼경北次三經]의 용후산龍侯山이 있다. [해외서경海外西經]을 보면 북쪽의 언덕에 용어(龍魚 -달리 하鰕 xiā라rh 한다는 말은 이들이 씨氏들이라는 걸 알려주는 장치이다. 一曰鰕)가 사는데(龍魚陵居在其北) 물고기가 그곳에 살 수는 없으니 어떤 실체實體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어魚 yû]는 전욱계열顓頊系列의 지표어군指標語群이기도 하다. 서로 섞인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文章에서 <혹은 자라(鼈魚)가 동방족의 파라다이스인 제요야諸夭野 북쪽에 있는데...鼈魚在夭野北>라고 덧붙여 설명해준다.
주별어珠鼈魚는 우리말로 가라산인 갈산지수葛山之首에 사는 전욱계顓頊系의 상징이다(동차이경東次二經). 그렇다면 어떤 씨氏와 합쳐졌는가? 그리고 왜 용어龍魚는 신성神聖한 사람만이 이걸 타고 천하天下를 누빌 수 있다고 했는가?(卽有神聖乘此以行九野) 어째서 특별한 씨氏만을 골라서 태우는가?
[중차오경中次五經]엔 경수涇水와 멀지 않은 낙수洛水로 흘러드는 <용여수龍餘水>가 있는데 아예 두 씨氏의 상징글자가 결합되어 있다. [동산경東山經]의 <용용어鱅鱅魚 -여우같은 생김새*소리는 돼지울음과 같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관점에서 [汝能庸命]은 조금 달리 풀어져야 한다. <여汝>는 대등對等한 위치에서 부르는 대명사代名詞이기도 하니 사악四岳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왜 그들인가? 용庸 즉 동방 세력과 친밀하기 때문이다. 물론 동방계와 손을 잡은 곤鯀의 요堯에 대한 압력도 거세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청請을 거절한다. 이미 대세는 기울고 마음도 돌아섰을 듯하다. 요가 말했다. 근처에 세상을 피해 은거隱居하고 있는(側陋) 현자賢者를 밝혀서(明明) 말씀을 올리도록 하오(揚). 아는 것이 많은 이(師)가 요堯에게 귀띔을 주었다(錫曰). 환씨桓氏가 남쪽에서 살고 있는데 우순이라 합니다. 요가 말했다. 여씨라! 여씨 계열이란 소문所聞은 들었다. 어떠하오?
曰 明明揚側陋 師錫帝曰 有鰥在下 曰虞舜 帝曰 兪 予聞 如何...<요전堯傳>
[이아爾雅 석언釋言]은 <루는 몸을 감추다*피하여 숨어 살다. 陋...隱也>라 했다. 특히 이 부분에서의 키 워드라고 할 수 있는 [환鰥 guān –huān이 구개음화口蓋音化되었다]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밝혀야 한다. 남쪽에 있다는 순舜과 관련하여 [중차사경中次四經]의 환거산(讙擧山 huãn-jŭ 즉 요堯 지역과 멀지 않은 낙수洛水 수계水系에 있다)이 주목된다. 마장(馬腸 -기마騎馬 무리의 중심이란 뜻이다)이라는 괴수怪獸가 근거하는데 조금 서편으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에 있는 만거산蔓渠山(중차이경中次二經)에 같은 무리로 보이는 마복(馬腹 -호랑이 몸에 사람 얼굴) 세력과 연결되어 있다. 모두 전욱계顓頊系로서 순舜과 혈족血族이다.
[1] [남차이경南次二經]의 순수洵水가 나오는 순산洵山의 환(羊+患)이란 양羊 같은 괴수怪獸는 죽지 않는다 했으니 그만큼 맥脈이 길고 여가가 오래된 세력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알택閼澤]이 있다. 순洵 xún은 순舜 shùn과 소리가 같다. [서차삼경西次三經]의 익망산翼望山에 근거한 환(讙 huãn –외눈(一目)에 꼬리가 셋이라는 것은 전욱계인 成祝의 상징이다)과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까마귀인 기여(奇+鳥余+鳥)가 같이 있다. 이들과 있으면 사람들을 흉凶한 일에서 지켜준다. 주목할 것은 [북산경北山經]에서도 환소(月+雚)疏와 기여(奇+鳥余+鳥)가 나란히 나타난다는 점이다. [해내경海內經]은 짐승 머리에 사람 몸인 환구環狗 huán를 등장시켜 견융犬戎이 환족桓族 계열임을 밝혀준다(環狗 其爲人獸首人身 一曰蝟狀如狗). [대황남경大荒南經]의 환두驩頭 huān가 있는 부근에 [제곡帝嚳-요堯-순舜]을 장사葬事지냈다는 악산(岳山 -순舜을 추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악四岳과 친연성親緣性을 보인다)이 자리 잡고 있다(帝堯帝嚳帝舜葬于岳山).
[대황북경大荒北經]을 보면 환구環狗라고도 기록된 견융국(犬戎國 -有犬戎國 有神 人面獸身 名曰犬戎)의 아래쪽에 환두국(驩頭國 -西北海外 黑水之北 有人有翼 名曰苗民 顓頊生驩頭 驩頭生苗民)이 있는데 전욱顓頊이 낳았다고 하였으며 환두驩頭가 묘민苗民의 선조先祖로 되어있다. 아무튼 모두가 줄줄이 사탕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걸 보여준다.
원문原文으로 돌아가서 그래도 한족漢族들은 꿋꿋하게 <홀아비 환鰥>라고 우겨댄다. 순舜이 곤鯀의 계보系譜임은 글자 모양에서도 알 수 있는데 말이다(鰥⇔鯀). 그러므로 [유兪*여予 yú]도 소리 값으로 이해하는 게 더 알맞다. 사악이 대답했다. 거호巨互(瞽)의 자식입니다. 아비는 북방에 뿌리가 있고(頑) 어미는 괵수虢水와 낙수洛水에 근거한 동방계 어른 씨의 딸이며(주周시대 괵공虢公 모보로 크게 이름을 날린다) 오회吳回 성盛이 배가 다른 형님뻘 집안입니다. 그는 집안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씨들을(孝 xiào) 고르게 화합하였습니다. 이(乂 yì)의 여러 무리들과 옳지 않게 겨루지도(格姦) 않았습니다.
岳曰 瞽子 父頑母嚚象傲 克諧以孝 烝烝乂 不格姦...<요전堯傳>
공자孔子는 [서경書經]을 통해 이상국가理想國家의 전형典型을 설명하려 했는데 나라들 간에 약육강식弱肉强食만 존재하던 각축角逐이 치열하고 인仁이나 효孝보다는 실리實利를 추구하는 풍조風潮가 넘쳐 사상적思想的으로 혼란이 격심하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태어나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어려움이 일상화日常化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올바르게 공경恭敬받을 수 있는 치도治道의 모범을 [서경書經] 속의 요堯*순舜과 주공周公이라는 사람들을 빌려 모델링하였다. 가장 인의仁義와 효덕孝德이 뛰어난 성인聖人으로서의 전형적인 인물상人物相을 가공加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따르거나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무결점의 표본이어야 했다. 이런 세상이 일반화될 때 공자孔子는 그동안의 곤경困境에서 벗어나 출세出世가 보장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瞽子-不格姦]의 구절句節은 공자孔子의 이상理想이 완전히 녹아들어간 캐스팅보드의 역할을 맡는다. 다시 말하여 한 인물에 대한 가공작업의 견본見本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포장되기 앞서의 원형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변질 형태의 기본 모습이 소리글자에 맞추어 다른 표기글자로 바꾼다는 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고瞽 gŭ]는 <눈먼 소경 고수瞽瞍>가 이름으로서 상고금문上古金文의 계보系譜엔 전욱顓頊의 다섯째 아들인 거호巨互로 나타난다(부계종이父癸宗彛 –군고록 권 2-1-33). 거巨는 <사람이 활을 가지고 터전을 지킨다>는 뜻이 합쳐있다. 그림에서 보여주는 <활>은 시위를 풀었을 때 반대로 휘어져 [ C ] 모양이 되는 전형적인 각궁角弓이다. 그가 처음으로 발상發想의 전환轉換을 하여 강한 탄성彈性을 지니도록 한 활채를 기발奇拔한 상상력을 곁드려서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의 이름에 <호互>라는 그림글자가 수식修飾되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지극히 동방적인 가문家門의 비법秘法을 내려 받은 순舜의 기마騎馬 세력이 마복馬腹으로 상징되었다는 사실도 매우 뜻이 깊다. 이런 일이 가능한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처음으로 중토中土에 말 飼育과 騎馬術을 傳播하고 정착시킨 인물이 그의 삼촌인 승축(乘祝 –그림글자는 羊止己馬로서 牛羊族과도 친밀한 말 아비라는 뜻이다 –양지기마작羊止己馬爵 군고록 권 1-3-40) 이 있기 때문이다. 순舜은 공자孔子가 요堯를 올리기 위해 가공加工해낸 순하고 농사만 지었던 헛된 나부랭이가 아니다. 강력한 무장기마집단武裝騎馬集團을 거느린 어른이었다. 이런 측면側面을 고려할 때 [고瞽 gŭ]는 <거巨 jù>를 비틀은 것이다(동방계 소리 값에 특유한 구개음화口蓋音化 현상을 이용했다). 원래 옛날에는 어떤 인물을 소개할 때 반드시 출자出自와 계보系譜와 집안에서의 위치 그리고 현재 다른 씨와의 관계를 언급한다(지금도 우리는 나주羅州 어느 씨 무슨 파이며 아비는 어디에 근본이 있고 어미는 어디 출신이며 현재는 어떻게 갈라졌다라고 한다). 상고금문上古金文이 온통 그런 글자로 뒤범벅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공자孔子가 장난친 원래의 뜻을 찾는다면 아무래도 다시 [산해경山海經]이 필요하다.
① [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大荒東經]에 똑똑하게 <완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북방을 완이라 하고 거기에서 부는 바람을 염이라 한다. 有人名曰(鳥 밑에 宛) 北方曰(鳥 밑에 宛) 來之風曰(犭+炎)>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방계임을 조부鳥部와 견부犭部로서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완頑 wán]은 완(鳥 밑에 宛)과 소리가 같다.
② [산해경山海經 중차삼경中次三經]에 <부저산扶豬山에 오랑캐같은 생김새에 사람의 눈을 가진 은이라는 괴수가 있다. 曰扶豬之山...有獸焉 其狀如貉而人目 其名曰(鹿 밑에 言)>라 하여 이들이 동방계임을 알려주며(맥貉) 괵수虢水가 나와 낙수洛水에 들어간다. [은嚚 yín]은 은(鹿 밑에 言)과 소리가 같다. 부저산扶豬山은 모범적인 전욱계顓頊系 지표지명指標地名이다.
③ 상고금문上古金文의 계보系譜를 보면 전욱顓頊의 맏이인 성축成祝의 둘째 아들이 오회吳回 성盛이며 배다른 아들인 거호巨互의 자식子息이 순舜이다. 그러므로 오회吳回 성盛은 집안의 형님뻘이 된다. [상象 xiáng]은 성님이라는 우리말 <성>과 소리가 같고 [오傲 ào]는 오吳 wú와 소리가 닮았다.
요가 말했다. 내가 그걸 시험해보겠다. 때를 어기지 않고 딸을 주어 두 딸로 하여금 그처럼 올바른 도리道理가 있는지 살펴보겠다. 그래서 두 딸을 규嬀라는 물굽이 (汭)에 살던 동방계 마을(釐 lí)에 보내어 순舜의 아내가 되게 하면서 그를 공손히 받들라 하였다.
帝曰 我其試哉 女于時 觀厥刑于二女 釐降二女于嬀汭 嬪于虞 帝曰 欽哉 <요전堯傳>
이렇게 동방계의 기록이라고 생각하고 풀면 아주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그 당시의 세력판도까지 알 수 있는데 공자孔子는 어째서 그렇게 비비 꼬아 놓아 후세後世 학자들도 매우 난해難解하다고 고개를 흔들도록 이해가 어렵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