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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산행기
이런저런 행사가 겹친 날이지만 가야산 산행을 택했다. 그만큼 가야산을 평소 특별한 산으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정상을 다녀오지는 못했었다. 가야산 언저리에 있는 해인사에는 여러 차례 다녀왔으나 가야산 정상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산은 해인사가 그 품 안에 있는 산이라는 것만으로도 갈 이유가 충분했다.
중부고속도로에서 중앙 내륙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충주휴게소에서 잠깐 쉬고 먼 길을 달려갔다. 서울서 출발 할 때는 안개가 끼었으나 날씨가 맑아져 충주를 지날 때부터는 파란하늘에 차장 밖으로 펼쳐보이는 산천에 봄기운이 가득했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어트가 1922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출간한 시 황무지(荒蕪地)라는 싯구절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라고 썼다.
가장 신비롭게 새 생명이 약동하는 달을 잔인한 달이라고 쓴 표현에서 역설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산만하도록 화려한 꽃잎이 곧 스러져가고 그 생식의 화려함이 생의 고통의 잉태임을 자각할 때면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우측 차창 밖으로 멀리 하늘에 맞닿은 듯 펼쳐진 산줄기가 백두대간 산행의 추억을 불러 일으켰다. 가다보니 길가에 가야산 관광호텔 등의 표지가 보였다. 그것을 보니 가야산에 거의 다 온 것 같아 신발 끈을 고쳐 배었다.
국립공원 가야산은 특별하게 여겨지는 산이다. 가야산이라는 이름은 이 산이 옛날 가야국이 있던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 훌륭한 산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야의 산이라고 부른 것으로 전해진다.
가야산은 백두대간의 지맥으로 분류되지만 산세로서 독립된 지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수도산 등과 함께 백두대간과 지세의 흐름이 이어지는 측면이 있지만 이 산의 형세나 의미상으로는 거대한 산군가운데 홀로 우뚝 선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인터넷 상에는 그 산이 소백산맥의 지맥으로 쓰여 있는데, 소백산맥은 오래전 지금의 백두대간을 지칭할 때 쓰던 용어이다.에로부터 조선8경의 하나로 꼽혔으며, 주봉인 상왕봉을 중심으로 톱날 같은 암봉인 두리봉, 남산, 비계산, 북두산 등 해발 1,000m가 넘믐 고봉들이 마치 병풍을 친 듯 이어져 있다.
그리고 가야산(1,430m)줄기를 본맥으로 매화산(954.1m)과 거창군계의 비계산(1,125.7m), 두무산(1,083.4m), 오도산(1,133.7m)그리고 산청군계의 황매산(1,108m) 등 큰 산이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악견산, 금성산, 허굴산, 의룡산과 북부의 가점산, 미숭산, 두무산 남쪽 군계의 자굴산, 미타산 등의 준봉과 높고 낮은 산맥이 첩첩으로 이어져 있다.
가야산이 소재한 합천은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속하였으며 부족 국가로는 다라국이 있었다. 대병면, 야로면 삼가면 등지의 많은 고분과 쌍책면 성산리 옥전고분군은 강력한 지배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그 후 신라 24대 진흥왕 23년(562) 신라 이사부와 이다함에 의한 대가야국 멸망으로 합천지방이 신라에 귀속되었다.
합천은 동쪽으로 성주, 고령, 북쪽으로 김천, 서측으로 무주, 거창, 남쪽으로 의령과 접해 있다. 합천은 좁은 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이 산이 많고 들판은 없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계곡이 많다는 뜻과 부합되는 것으로 풀이 되는데 1914년 3월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분지를 이루고 있는 초계와 삼가가 합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좁은 계곡 또는 좁은 내라는 뜻은 맞지 않다하여 (세 개의 고을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합천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한문식(漢文式) 표기방식은 그대로 존속하나 말할 때와 읽을 때는 “합천”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합천은‘대야성전투’로 유명한 대야성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백제에서 경주로 가기 위해 또는 신라에서 백제의 수도인 부여로 가기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 따라서 이곳은 두 나라에 모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10시 40분이 조금 지나 가야산 백운동 주차장에 도착해 간단히 준비 운동을 하고 백운동 탐방지원센타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입구 길가에서 아주머니가 큰 목소리로 맛있는 떡 사라고 소리쳤다. 무슨 떡이냐고 물으니 쑥떡이라고 해서 점심꺼리로 사서 배낭에 넣었다. 그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딸이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겸연쩍어 하는 듯 한 표정을 짓는 것이 순수해 보였다.
조금 앞쪽 좌측 길가에 세워진 식물원을 돌아드니 안쪽으로 가야산 정상부 능선이 아스라이 펼쳐보였다. 옆에 걷던 일행이 “저렇게 멀고 높은 곳을 언제 다 넘어가나?” 라고 엄살 부리듯 말했다. 가다가 멈춰 서서 그 풍경을 스케치 했다.
스케치를 하고 일행이 보이지 않아 빠른 걸음으로 가다보니 우측에 가야산 탐방 안내소가 나타났다. 거기서 무심코 다리를 건너 한참을 가도 일행이 나타나지 않아서 되돌아 나오다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불으니 많은 일행이 입구에서 왼쪽으로 갔다고 했다.
다시 입구까지 되돌아 나와 그 길로 올라섰다. 경사가 급한 오름길을 한동안 올라갔으나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20분쯤 잘못든 길을 오가는 동안 거리가 많이 떨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걸음이 빠른 편이라 가다보면 일행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오르다 뒤돌아보니 올라온 길 뒤로 주변의 얕은 산자락과 드문드문 떨어진 농가 들이 보였다. 그리고 위쪽으로는 입구에서 올려다본 산세가 조금씩 가깝게 펼쳐 보였다. 걷고 있는 길은 만물상 코스로 상왕봉과 칠불봉 등 정상부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암릉길로 다가가는 형국인데 앞으로 향하는 날 선 능선 길에 촘촘히 박힌 커다란 바위가 앞뒤로 열 지어 서서 큰 소나무와 함께 산세를 장엄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대문처럼 우뚝 선 바위 사이로 정상부가 아스라이 보이기도 했다.
가다가 그처럼 풍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장면을 대할 때마다 일행과 떨어지지 않도록 의식하면서 가야산만의 특별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장면들이 포착될 때면 가끔 잠시 멈춰서 스케치를 했다. 그렇게 스케치를 하다 보면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온 다른 일행들이 다시 앞서 나가고 스케치를 마친 후 내가 다시 그들을 추월하게 되어서 몇 번씩 조우하게 되기도 했다.
경사가 급한 암릉길을 오르다 보니 바로위에 일행 중 일부가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인사를 하며 다가가며 돌아보니 수많은 바위들이 파편처럼 박힌 채 좌측으로 길게 흐르는 능선이 장쾌하게 뻗쳐 보여 다시 스케치를 했다.
그 사이 일행이 출발해서 스케치를 마친 다음 다시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 갔다. 오름길을 올라 봉우리에 서니 아까 지나올 때 그 봉우리에 가려있던 속 풍경이 펼쳐 보였다.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건너 봉우리의 절벽 길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까지 가려면 앞쪽의 험한 봉우리를 넘어가야 했다.
먼 곳에서는 앞뒤 거리가 느껴지지 않던 곳들이 새로운 공간으로 펼쳐 보이고 험준한 기암절벽을 오르는 사람들의 호흡이 느껴졌다. 그리고 건너편 봉우리를 향해 오르는 긴 오름 길에 등산객들의 복장이 형형색색 수를 놓은 듯이 보였다. 지나며 대하는 만물상 코스 풍광이 가야산에서 가장 빼어난 장면일 것 같았다.
건너 보이던 봉우리에 오르니 다시 새로운 풍광이 펼쳐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만물상 코스를 이루는 수많은 기암대신 옆으로 길게 파노라마를 연출하는 커다란 산세가 시원스레 펼쳐보였다. 정상부에는 기암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지만 산 덩치의 표면은 멀리 아직 앙상하게 보이는 나무 가지들이 봄볕에 산란되어 솜사탕처럼 보드라운 연갈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지나면서 보았던 만 불상의 기암들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더 특별한 풍치로 느껴지게 하였다.
좌측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지나 그 평온하게 느껴지는 산의 품에 들면 누구나 편안함을 느끼며 쉬어가게 될 것 같았다. 서성재를 약 300m 앞둔 지점에서 상아덤 표지가 보였다. 그 곳은 가야산의 여신인 정견모주와 하늘의 신 이비하가 만났다는 전설이 서린 곳으로서 서장대로도 불리는 곳이다.
10시 방향에 보이던 봉우리를 오르며 뒤돌아보니 지나온 산세가 한눈에 펼쳐 보였다. 봉우리 정상부에 오르니 안치규 건축사 부부와 그들과 함께 온 일행이, 성곽의 여장에 뚫린 구멍처럼 개구부를 이루며 놓인 큰 덮개돌과 바위를 그늘 삼아 단란하게 식사를 하면서 음식을 권해 먹음직스런 두부조림을 한 개 먹어보니 맛이 그만이었다. 우측 아래 안부를 보니 많은 우리 일행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 곳이 지도상에 나타난 서성재였다.
안부로 내려와 빈자리를 잡고 아까 입구에서 산 쑥떡으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 곳 가야산 언저리에서 나는 쑥 향기가 베인 느낌이 좋아서 옆 사람들에게 권하니 맛이 좋다고 했다. 회원들이 각자 준비해온 반찬과 과일 야채 등이 푸짐하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그 음식들을 서로 권하며 일상의 번잡함을 다 잊고 명산의 기운을 쏘이며 맑은 표정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예정된 코스대로 바로 앞쪽에 솟아 오른 정상부를 향해 출발했다. 거기서 거리는 0.6k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계속해서 그 정상까지 올라가는 코스여서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앞서 오르다 급한 경사길 에 잠시 뒤돌아보니 지나온 길 주변의 산세가 수려한 풍광으로 바라보여 다시 멈춰 스케치를 했다.
뒤따라 올라오던 일행들도 잠시 그 풍광을 뒤돌아보다 앞서 올라갔다. 스케치를 마치고 급경사 길을 오르니 칠불봉이 우측으로 조금 비켜서듯 서 있었다.
칠불봉에 오르니 주변 산세가 모두 아래에 펼쳐 보였다. 오르면 높고 험준하게 보이던 만물상 능선과 봉우리들도 여기서는 한갓 평범한 작은 산모퉁이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건너보이는 상왕봉은 그 봉우리만이 힘 찬 기운으로 위엄 있게 우뚝 솟아 보였다.
칠불봉에 놓인 정상석과 설명문이 적힌 표지석을 보니 최근 그 곳이 가야산의 최정상으로 확인되었다고 했다. 이전까지는 250m 정도 떨어져 있는 상왕봉이 가장 높은 봉우리로 여겨져 왔는데 정밀 측정 결과 그렇게 밝혀졌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아직도 가야산의 상징적인 정상은 상왕봉으로 인식될 것 같았다.
상왕봉을 바라보며 스케치를 하던 중에 옆에서 쉬고 있던 일행이 허브향의 따뜻한 차를 주어 한 모금 마시니 입안에 향기가 감돌았다. 상왕봉의 상징성을 의식하며 조심스레 그리는 사이 일행들이 그 곳을 향해 출발했다.
스케치를 마치고 잡시 후 상왕봉에 올랐다. 그 곳에 오르니 칠불봉에서 보이던 장엄한 느낌은 느껴지지 않은채 큰 바위 덩어리로만 보였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는 사이 다른 세사람의 일행이 올라와 함께 돌아보았다. 그 들은 새벽 4시에 수도산을 출발해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소위 ‘수도가야’ 종주 길을 걷는 중이라고 했다.
상왕봉 표지석은 우두봉으로 쓰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칠불봉에서 보이던 모습이 흡사 소 머리 같은 형상으로 느껴지기도 했었다. 주봉인 상왕봉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해졌던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 해왔다고 하여 우두봉이라고 불리우며, 상왕봉의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가야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해인사의 입구까지 이르는 4km의 홍류동(紅流洞) 계곡은 가을단풍이 붉어서 물이 붉게 보인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시간을 보니 벌써 3시 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상왕봉을 정점으로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해인사까지 계속 내림길로 이어질 것 같았다. 거리는 적지 않지만 산행 시간은 그리 많이 걸릴 것 같지 않았다.
경사가 급한 내림길을 내려와 약간 완만해진 길을 가다보니 좌측에 마애불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옯겨 100m 정도 들어가니 큰 바위가 병풍처럼 놓인 앞에 3.5m 정도 높이의 마애불이 보였다. 그 앞에 있는 제례석 위에는 제수를 올리는 금속 제기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방금 내려온 상왕봉이 마애불을 장엄하듯 둘러치고 있었다.
다시 주 등산로로 되돌아 나와 내림길을 걸었다. 계곡 방향으로 난 길이라 시선이 트이지 않는 위치였다. 올라올때처럼 능선길로 가면 주변 산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한참 걸었다 싶었지만 긴 게곡을 지나는 길이어서 그런지, 고도상으로는 내려온 지점이었지만 이정표에는 아직 먼 거리가 남아 있었다.
가다 일행이 보이는지 먼 앞을 보다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갑작스런 돌발 상황이 되어서 미처 손을 짚지 못하고 온 몸이 떨썩 바닥에 부딧치고 말았다. 뜻 밖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 멍멍한 상태로 그대로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카메라 랜즈가 빠져 나와 있어 몸이 괜찮을지 염려가 되었다. 잘린 나무 그루터기가 가슴쪽 밑에 보였다. 다행히 그 것에 심히 부딧치지는 않은 듯해서 안심이 되었다.
심호흡을 하며 몸을 추스려 다시 걸었다. 잠시 후 후미 쪽에서 걷던 일행들을 만났다. 박기현 회장과 김준식 건축사가 길 옆에 귀하게 핀 얼레지 꽃에 반한 듯 정성스레 업드려 촬영을 하고 있었다. 다시 조금 내려가다 보니 일행이 계곡물에 탁족을 하고 있었다. 오늘 기온이 20도 가량까지 높게 오른 상태라 벌써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자연스레 느껴졌다. 그 계곡이 바로 홍류동 계곡으로 산 입구에서 해인사까지 약 4km에 이르는 홍류동계곡은 가야천을 이루는 계곡이다 그 물이 덕유산에서 발원한 황강과 만나게 되고 그 황강이 다시 합천군 창덕면 적포리에서 낙동강과 합류하게 된다.
잠시 후 해인사로 내려왔다. 해인사에는 여러차례 답사를 다녀가서 배치 구조를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는 편이다. 내림길에서 먼저 나타나는 좌측 언덕 너머가 팔만대장경 대장경고가 있는 곳이다. 우측 화장실에 들러 세수를 하고 그 쪽으로 올라갔다. 팔만 대장경이 수장되어 있는 두 채의 건물 사이 마당과 주변을 돌아보고 나오다 내려보이는 해인사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해인사[海印寺]를 품고 있는 가야산은 가야산보다 해인사로 유명하다. 바다 해(海)자와 도장 인(印)자를 쓰는 해인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따왔다고 한다. 해인은 풍랑처럼 일던 번뇌가 사라진 마음처럼 고요한 바다에 만상이 비친 듯한 경지를 일컫는다고 한다.
해인사는 삼보사찰 ( 三寶寺刹)]중 법보사찰(法寶寺刹)로 불린다. 국보 32호인 팔만대장경을 팔만대장경 경판을 소장하고 있으며, 국보 52호인 장경판전을 비롯해서 15점의 보물과 200여 점의 사보등 수많은 문화재와 고적이 있다. 팔만대장경은 가로 24cm 세로 69cm 무게2.4~3.75kg인데, 경판 8만1340장은 전체 무게가 무려 26만kg에 이른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왕조가 피난했던 강화도에 보관돼 왔으며 1398년(태조 7년) 서울 지천사(용산 강변)를 거쳐 그해 가을 육로로 경남 합천군 가야산의 해인사로 옮겨졌다. 팔만대장경은 그 수장각과 함께 1995년 12월 9일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로써 이 문화유산의 가치는 세게적인 것이 되었다.
큰 사찰이라 천천히 이곳저곳을 다 둘러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곳이지만 서울로 출발할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아 바삐 입구 출입문을 빠져나오다 좌측에 있는 성철 스님 사리탑을 보고 내려왔다. 그곳에서도 주차장까지 거리가 제법 멀었다. 일행이 기다릴세라 바삐 걷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정병협 건축사가 차에 타고 있었다. 웬일인가 싶어 물으니 스님이 태워주셨다며 타라고 했다. 얼떨결에 차 안을 보니 인상 좋은 스님이 괜찮다고 하면서 주차장 입구까지 가서 내려 주었다.
뒤풀이 식당인 부산집에 들르니 먼저 온 회원들이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빈자리에 앉아 시장하던 차에 맛있는 음식을 더욱 맛있게 먹었다. 동동주도 맛있고 시원했다. 주인은 상차림 된 나물 반찬과 찌개 안에 넣은 버섯향 등을 설명해주며 비워지는 대로 더 갖다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주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일행이 서둘러 차에 올라 7시 정각에 서울을 행해 출발했다. 먼거리를 오가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명산을 다녀가는 기분이 뿌듯했다.
(2012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