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영제국 및 아일랜드의 여왕이며 동시에 인도의 여제인 빅토리아! 그의 남편이 독일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 가문의 알버트 왕자이다. 알버트공의 풀 네임은 프란시스 알베르트 아우구스투스 챨스 엠마누엘(1819-1861)이다. 아우구스투스라는 단어는 라틴어로서 현명하다는 뜻이다. 알버트는 작손공국(Saxon Duchy)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세에 외사촌인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하여 9명의 자녀를 두었다. 처음에 그는 여왕의 남편으로서 아무런 실권도 없이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한 일상을 보냈으나 나중에는 여왕을 진심으로 도와 국정에 많은 자문을 하였다. 특히 그는 교육제도의 개선, 노예제도의 폐지 등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고 문화예술과 과학의 진흥을 위해 많은 헌신을 하였다. 특히 1851년 런던의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대박람회(Great Exhibition)도 실질적으로 주관하여 영국의 국위를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한창 나이인 42세에 세상을 떠났다. 빅토리아여왕은 남편 알버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평생을 애도하며 지냈다. 빅토리아여왕이 평생을 검은 상복을 입고 지낸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빅토리아여왕은 하노버 가문이었으나 1901년 세상을 떠나고 빅토리아와 알버트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국왕에 오르자 그것으로 하노버 가문은 막을 내리고 부계의 원칙에 따라 알버트의 가계를 이은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 가문이 시작되었다. 에드워드는 나중에 가문의 명칭을 윈저(Windsor)가문으로 짧게 바꾸었다. 오늘날 엘리자베스여왕은 바로 에드워드7세에 의해 시작된 윈저가문을 이은 군주이다.
결혼 직후의 알버트 공. 1842년.
알버트는 독일 코부르크 인근의 로제나우(Rosenau) 성에서 1819년 8월 26일 태어났다. 빅토리아여왕은 같은 해 5월 24일에 태어났다. 빅토리아가 태어날 때에 산파였던 여인이 알버트가 태어날 때에도 산파를 맡아 한 것은 또 다른 인연이었다. 알버트의 아버지는 작세-코부르크-잘펠트 공작인 에르네스트3세(Ernest III)이며 어머니는 그의 첫째 부인인 작세-고타-알텐부르크(Saxe-Gotha-Altenburg)의 루이제공주였다. 알버트는 이들의 둘째 아들이었다. 평화로웠던 가정에 파탄이 일어난 것은 알버트의 어머니가 알렉산더 폰 한슈타인백작이라는 사람과 스캔들을 일으키고부터였다. 알버트의 어머니는 이혼당하여 코부르크 궁전에서 추방되었다. 알버트의 어머니는 결국 한슈타인백작과 결혼했지만 그 이후로는 생전에 두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30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버트의 아버지는 자기의 조카이며 알버트와는 사촌간인 뷔르템버그(Württemberg)의 안투아네트 마리공주와 재혼하였다. 알버트의 계모가 된 안투아네트 마리는 전처의 두 아들(에르네스트와 알버트)에게 아무런 관심도 기울여주지 않았다. 알버트는 본(Bonn)대학교에서 법학, 정치, 경제, 철학, 예술사를 공부했다. 그는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알았으며 운동도 잘하였다. 특히 펜싱과 승마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만하면 아주 괜찮은 청년이었다.
알버트공이 태어난 독일 바바리아 지방 코부르크의 로제나우 성(판화)
[결혼]
1836년, 알버트는 17세 때에 고모(메리 루이스 빅토리아) 켄트 공작부인의 딸인 영국의 빅토리아공주와 혼담이 오고갔다. 알버트의 삼촌으로서 벨기에의 국왕인 레오폴드가 중매에 앞장섰다. 빅토리아로서 보면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는 외삼촌이며 알버트는 또 다른 외삼촌의 아들이므로 외사촌에 해당한다. 당시 빅토리아는 삼촌 윌리엄4세가 자녀를 생산하지 않는 한 영국의 왕위계승자 서열 1번이었다.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는 여동생인 켄트공작부인(빅토리아의 어머니)에게 연락하여 코부르크 공작과 두 아들을 런던에 초청하라고 제시했다. 목적은 빅토리아와의 혼담을 진행시키기 위해서였다. 영국 국왕으로 빅토리아의 삼촌인 윌리엄4세는 다음 왕위계승자인 빅토리아가 작세-코부르크 가문과 맺어지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다. 왜냐하면 우선 영국의 하노버 가문에 비하여 지체가 낮았을 뿐만 아니라 후보자가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켄트공작부인의 조카이기 때문이었다. 윌리엄4세는 켄트공작부인을 여러 이유로 무척 싫어했다. 그래서 윌리엄4세는 조카인 빅토리아를 네덜란드 윌리엄2세 국왕의 둘째 아들인 알렉산더와 결혼시키려고 분주했었다.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빅토리아의 어머니 켄트공작부인은 알버트와의 혼담을 어서 추진하기 위해 알버트 일행을 런던에 급히 초청하였다. 관건은 빅토리아가 쥐고 있었다. 빅토리아도 어머니가 싫기 때문에 어머니 쪽의 사촌과 결혼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빅토리아와 알버트의 결혼식. 제임스궁의 왕실예배당에서 1840년 2월 10일.
George Hayter 그림.
그러나 빅토리아 공주는 알버트를 만나보고 나자 마음이 바뀌었다. 알버트가 너무 멋있어서 단번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빅토리아는 일기장에 ‘알버트는 너무 핸섬하다. 머리칼의 색깔도 나와 같다. 그의 눈은 크고 푸르다. 코가 잘 생겼고 치아가 고른 것이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그의 진짜 매력은 그의 말씨이다. 그와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너무 즐겁다. 너무 좋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알렉산더는 너무 평범하게 생겼다’라고 쓴 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빅토리아는 나중에 큰 외삼촌인 벨기에의 레오폴드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알버트를 주선해 준데 대하여 깊이 감사까지 했다. 빅토리아 공주가 알버트에 대하여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자 두 사람간의 공식 약혼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양가는 곧 성혼이 될 것으로 믿고 준비하였다.
그로부터 3년후인 1839년 10월, 알버트는 형 에르네스트와 함께 다시 런던을 방문하였다. 빅토리아는 2년전인 1837년 6월 20일에 여왕으로 대관식을 가졌다.여왕이 된 빅토리아는 알버트에게 편지를 보내어 앞으로 (여왕의 남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지도 모르므로 모든 면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줄것을 당부했다. 빅토리아는 이미 알버트와 결혼하기로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서로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 유럽의 왕실들에서는 대부분의 결혼이 정략적이어서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이 통상적이었다. 그래서 이혼도 많았다. 하지만 빅토리아와 알버트의 경우는 정략적이기도 했지만 사랑이 기반이 되었다. 빅토리아여왕은 1839년 10월 15일 자기를 만나러 런던에 온 알버트에게 정식으로 청혼하였다. 형식적으로는 빅토리아여왕이 청혼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알버트의 청혼을 수락한 것이었다. 양가대표는 그해 11월 23일 Privy Council(궁내청과 같은 기구)에 두 선남선녀의 결혼예정을 통보하고 국혼의 준비를 당부했다.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이듬해인 1840년 2월 10일, 날씨는 조금 쌀쌀했지만 개의치 않고 성제임스궁의 로열 채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알버트는 결혼식을 올리기 며칠전에 영국시민으로 귀화하였다. 영국의회법에 의해 군주의 배우자는 영국시민이어야 했다.
대관식후의 빅토리아여왕(1819~1901). George Hayter 그림
알버트는 처음에 영국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없었다. 도대체 작세-코부르크 공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독일은 수백 개의 공국으로 갈라져 있었다. 때문에 작손(Saxon)이라는 조그만 공국하나는 대단치도 않았다. 실제로 작세-코부르크 공국(또는 작손공국)은 영국의 1개 지방보다도 영토가 작았다. 반면 빅토리아는 어떠했는가? 대영제국 및 아일랜드의 여왕이며 세계의 수많은 영국 식민지의 수장이 아니던가? 게다가 나중에는 인도의 여제(女帝)로 대관식을 갖기도 했으니 그런 빅토리아와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보다 작은 공국의 둘째 왕자와 결혼하였으므로 알버트에 대한 인기가 없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알버트가 빅토리아여왕의 남편이 되자 호칭 및 작위 문제로 런던의 정가는 심심치 않았다. 수상인 멜버른경은 여왕이 알버트의 호칭을 King Consort(국왕의 배우자)라고 부르자고 제안하자 재고할 것을 요청했다. 영국의회는 알버트를 상원의 귀족(Peer)으로 삼는 것을 거절했다. 아마 영국의회에 깔려 있었던 반독일 감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버트가 상원에서 정치활동을 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멜버른 수상은 소수당 정부를 이끌고 있었다. 가뜩이나 약체였던 멜버른 내각은 빅토리아의 결혼으로 ‘이게 뭐냐? 알버트 좋아하네! 작센 코부르크가 도대체 어디 쳐박혀 있는 곳이냐? 그것 봐라!’라는 소리와 함께 정치적 위상이 더욱 약화되었다. 야당은 알버트를 영국의 귀족 작위를 주는 것을 반대했으며 연간 지원금도 과거의 국왕 배우자에게 주던 것보다 적게 책정했다. 즉, 과거에는 1년에 5만 파운드를 지급했으나 알버트에게는 3만 파운드를 지급키로 결정했던 것이다. 알버트는 ‘영국의 귀족 작위는 필요 없습니다. 저로 말씀드리자면 이미 작손공국의 왕자이며 공작에 상응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미 요크공작이나 켄트공작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작손공국에 있을 때보다 지위가 격하되는 것 같아서 섭섭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그게 무슨 죽고 사는 큰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버트는 결혼후 17년간 공식적으로 HRH Prince Albert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857년 아내인 빅토리아여왕에 의해 Prince Consort(군주의 배우자)라는 호칭을 수여받았다.
빅토리아여왕의 좋은 자문가였던 수상 멜버른 경
알버트는 가장이지만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할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가사는 가정교사인 레젠(Lehzen)남작부인의 권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버트는 빅토리아가 첫 아이를 임신하자 아이의 장래를 위해 자기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버트는 가정교사(실제로는 집사장보다 더 세력이 컸음)인 레젠남작부인을 내쫓기로 결심했다. 알버트는 레젠남작부인을 ‘못된 용’(House Dragon)이라고 부르면서 싫어하였다. 알버트는 첫 딸 빅토리아가 태어난후 1년이 지난 1841년 마침내 레젠남작부인을 해고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그를 영국에서 영원히 추방했다. 수상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막강했던 레젠남작부인은 영국에서 추방당한 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알버트는 결혼한후 아무런 사회적 직함도 없이 지냈다. 그러다가 빅토리아여왕이 임신하자 알버트에 대한 예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알버트가 첫 번째로 맡은 직함은 ‘노예추방협회’의 회장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미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나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아직도 노예제도가 횡행하고 있어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었다. 알버트는 노예폐지 제도를 지구상에서 영구히 추방하는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860년의 알버트공
그후 1841년, 결혼한지 이듬해의 6월 어느날, 알버트는 빅토리아여왕과 함께 마차를 타고 어디를 가고 있었다. 그때 웬 청년이 군중 틈에서 뛰어나와 알버트와 빅토리아에게 권총을 두발이나 쏘았다. 다행히 여왕과 알버트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그때 알버트는 임신한 여왕을 보호하며 근위병들을 지휘하여 범인을 체포토록 하는등 기민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하여 알버트에 대한 국민들의 인기가 높아졌고 의회에서도 치하를 받게 되었다. 저격범인 에드워드 옥스퍼드(Edward Oxford)는 정신이상으로 방면되었다. 두어달후 영국의회는 ‘1840년 섭정법’(Regency Act 1840)을 통과하여 빅토리아여왕의 사망시 다음 왕위계승자가 성년이 되지 않았을 경우 알버트가 섭정이 되도록 결정하였다. 알버트는 결혼생활 20년 동안에 단 두번 떨어져 지낸 일이 있으며 그 외에는 언제나 함께 지냈다. 첫번째는 1844년 초에 알버트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코부르크에 갔다가 온 것이었고 두 번째도 무슨 일 때문에 코부르크에 며칠 동안 갔다 온 것이었다. 알버트의 활동 영역은 점차 확대되었다. 의회에 참석하여 의견을 제시한 일도 있었다. 빅토리아가 아들 에드워드를 낳고 왕실의 가계가 단단해 지자 알버트의 지위도 더욱 확고해졌다. 알버트는 여왕의 정무를 자문하고 서류처리를 도와주며 여왕이 방문객들을 접견할 때에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고 어떤 때는 여왕을 대신하여 사절단을 맞이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런 알버트에 대하여 약간 좋은 뜻으로 ‘우리의 왕이야 왕!’이라고 말했다.
말년의 알버트공
<script type="text/xxjavascript">
빅토리아여왕의 부군 알버트공
[혁명무풍지대 영국]
1848년에 유럽에서는 혁명이 마치 무슨 유행처럼 온 지역에 퍼져 나갔다.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유럽 이곳저곳에서의 혁명으로 걱정이 많았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자녀들이 결혼해서 살고 있는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나 군주들이 쫓겨나는 일도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영국에서는 혁명에 대한 요구가 없었다. 물론 간헐적으로 몇십명이 모여 ‘자유를 달라!’느니 하면서 시위를 하기는 했지만 ‘여왕은 물러나고 아울러 여왕의 남편도 물러나라!’와 같은 시위는 일체 없었다. 아마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등 날씨가 항상 나쁘니까 밖에 나와서 시위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알버트는 자유진보적이고 계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노예제도 완전폐지 운동에 적극 나섰던 것은 좋은 보기였다. 런던에서 혁명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자 알버트는 자기의 개혁생각을 하나 둘씩 실천하기 시작했다. 우선 캠브릿지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자 교과를 대폭 개편하여 현대사와 현대과학에 대한 과정을 강화하였다. 1851년에 하이드파크에 새로 지은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열린 대전시회(Great Exhibition)는 알버트가 총책임을 맡은 것으로서 미술을 제품생산에 접목시킨 특별한 이벤트였다. 알버트는 1843년부터 영국미술가협회의 회장을 지냈으므로 그때의 경륜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하이드파크의 크리스탈팔레이스에서 열린 대전시회 오프닝. 1851년이면
조선에서 대원군이 바야흐로 아들을 임금으로 앉히고 세도를 잡기 시작한 해이다.
대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1851년 5월 1일 빅토리아여왕이 오픈했다. 사람들은 새로 지은 수정궁(Crystal Palace)과 온갖 새로운 산업제품을 보러 몰려들었다. 영국의 일각에서는 대전시회를 반대하는 기운이 높았었다. 유럽대륙, 특히 프랑스로부터 혁명과 진보사상이 대전시회를 계기로 물밀듯이 몰려들면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버트의 생각은 달랐다. 영국의 국위가 격상되고 세계의 산업을 선도하자면 이러한 대전시회는 반드시 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18만 파운드라는 이익금이 생겼다. 알버트는 이익금으로 켄싱턴 남부에 넓은 땅을 사서 학교와 문화시설을 건설했다. 그중의 하나는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이었다. 알버트가 새로 넓은 땅을 구매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지역을 ‘알버토폴리스’(Albertopolis)라며 빈정댔다.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미술관)
[9명의 자녀]
빅토리아여왕과 알버트는 20년 결혼생활에서 9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에서도 아무래도 첫째 딸을 가장 사랑했다. 첫째 딸은 살림밑천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첫 딸인 빅토리아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왕자와 결혼하여 프러시아로 떠났을 때 알버트는 '딸 자식은 기를 것이 못 돼!'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런 프리드리히는 독일제국의 황제 및 프러시아 국왕이 된지 99일 만에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창 때에 청상과부가 된 빅토리아에 대하여 어머니 빅토리아여왕은 물론이지만 아버지 알버트도 연민의 정을 쏟지 않을수 없었다. 알버트는 큰 아들인 에드워드에게도 각별한 애정을 주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다른 일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에 알버트는 아버지로서 종아리를 들고 에드워드를 훈도했다. 당시 사회에서는 자녀에게 사랑의 매를 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알버트는 물론 큰 딸과 큰 아들에게 많은 정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자녀들에게 소홀히 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자상한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돌보아 주었으며 때로는 친구 이상으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첫딸 비키(빅토리아)와 함께 즐거운 한때.
[말년]
알버트는 1860년에 며칠 동안 고향인 독일의 코부르크를 다녀온 일이 있다. 어느날 말 네필이 끄는 마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중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서 천둥과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번개가 치니까 말들이 놀라서 어쩔줄을 모르고 무조건 앞으로 달렸다. 마침 저 앞에는 기차길이 있었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다른 마차가 있었다. 알버트의 마차는 철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와 충돌하였다. 알버트는 마차에서 본능적으로 뛰쳐나와 다행히 목숨을 건질수 있었지만 여러 군데에 큰 상처를 입었다. 충돌 때문에 말 한필이 죽었다. 나중에 알버트는 큰 딸 빅토리아에게 ‘이제 죽을 날이 가까운 모양이야’라고 말했다. 이듬해인 1861년 알버트의 장모, 즉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인 켄트공작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빅토리아여왕과 켄트공작부인은 처음 상당기간은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둘도 없는 모녀사이가 되어 지냈다. 빅토리아여왕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식음을 전폐하지는 않았지만 반면에 일체의 공적 활동을 접어두고 오로지 애도의 심정으로 지냈다. 알버트는 비록 코부르크에서의 사고 때문에 몸이 아프고 더구나 지병인 위장장애가 있어서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심에 빠져 있는 빅토리아여왕을 대신하여 대부분의 공무를 수행하였다.
여왕 즉위 골든 주빌리(통치 50주년)의 빅토리아여왕
[방탕한 아들]
1861년 여름,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아들 에드워드가 군복무를 하고 있는 아일랜드 소재의 쿠라 캠(Curragh Cam) 섬을 방문하였다. 이때의 환영 파티에서 에드워드는 마침 공연차 파티에 참석한 아일랜드 출신의 여배우 넬리 클리프든(Nellie Clifden)을 만났다. 두 사람은 단번에 사랑인지 뭔지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게 되었다. 황태자와 여배우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알버트는 에드워드에게 넬리인지 뭔지하는 여배우와의 관계를 청산하라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아버지 알버트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알버트는 어쩔수 없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여 에드워드를 캠브릿지대학교로 보내 공부를 계속하도록 했다. 이 일로 인하여 알버트는 속이 매우 상했고 아울러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럴 즈음에 알버트의 사촌인 포르투갈의 페드로5세 국왕이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알버트와는 가깝게 지내던 사촌이었으므로 알버트의 슬픔은 컸다. 그럴 때에 외국 신문에 영국의 왕세자인 에드워드가 아직도 아일랜드의 여배우인 넬리 클리프든과 보통 이상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기사가 났다.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다음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의 스캔들 때문에 영국 왕실이 망신을 당하게 되어 충격을 받았다. 그해 12월, 알버트는 장질부사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미 폐의 기능까지 망가져 있었다. 알버트는 그로부터 며칠 후, 며칠 후... 1861년 12월 14일 윈저성에서 요단 강을 건너갔다.
에드워드는 마침내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와 결혼하였다.
[빅토리아의 상심]
여왕의 상심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빅토리아여왕은 남편 알버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었다. 처음에는 알버트에 대하여 미지근하게 생각했던 국민들도 알버트를 크게 동정하고 존경을 보냈다. 그로부터 빅토리아여왕은 알버트를 애도하기 위해 평생을 검은 상복만 입고 지냈다. 윈저성과 버킹엄궁전, 그리고 알버트가 와이트섬(Isle of Wight)에 마련한 오스본 하우스(Osborne House)의 알버트가 사용하던 방은 평소처럼 그대로 보존토록 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방이었지만 매일 아침마다 세면용 더운 물을 가져다 놓도록 했으며 하얀 침대 시트를 새로 갈도록 했다. 빅토리아여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렇게 했으나 참으로 대단하기는 대단한 순애보였다. 알버트의 사후, 빅토리아여왕은 일체의 공식 행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거의 은둔생활로 들어갔다.
알버트의 시신은 임시로 윈저성의 성조지채플에 안치하였다가 1년후에 프로그모어(Frogmore)의 장엄한 영묘로 이전하였다. 알버트의 석관은 훗날 빅토리아여왕이 합장될수 있도록 규모를 크게 만들었다. 이 석관은 화강암 한 덩어리로 만든 것으로 영국에서 가장 큰 석관이라고 한다. 알버트는 자기의 사후에 자기를 기념하는 건축물이나 기념상을 일체 세우지 않도록 당부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영국의 전역뿐만 아니라 영연방의 여러 곳에 알버트를 기념하는 건축물과 기념상이 세워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오늘날 세계적 연주회장인 로열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 RAH)이다. RAH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코자 한다.
알버트와 빅토리아가 사후 안치되어 있는 프로그모어의 왕실 영묘
[알버트 추모의 열기]
아프리카의 알버트호수(Lake Albert), 캐나다 사스카치완 주의 프린스 알버트 시, 왕립예술가협회가 수여하는 알버트 메달 등은 모두 알버트를 기려서 붙인 명칭이다. 영국 육군 중에서 4개 연대가 알버트의 이름을 따서 부대명을 붙였다. 프린스 알버트 직속 제11경기병 연대, 프린스 알버트 경보병 연대, 프린스 알버트 근위기병 연대, 프린스 콘소트 소총여단 이다. 빅토리아여왕과 알버트는 햄프셔어(Hampshire)의 알더쇼트(Aldershot)이란 곳을 개발하여 수비대 마을로 만들었다. 알버트는 이곳에 ‘프린스 콘소트 도서관’을 건립했다. 이 도서관은 아직도 마을 주민들이 애용하고 있다. 콘소트는 군주의 배우자를 말한다. 알버트는 독일로부터 영국에 최초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도입했다고 한다.
로열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 RAH)
빅토리아여왕의 부군 알버트공을 기리는 공연장
로열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 RAH)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열 알버트 홀(RAH)은 빅토리아여왕의 부군인 알버트공을 기념하여 세운 연주회장이다. RAH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시티의 나이츠브릿지(Knightsbridge)에 있다. RAH는 1941년 이래 매년 여름 프롬스(Proms)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프롬스는 프품나드 콘서트(Promenade Concert)의 약자로서 매년 여름 8주간에 걸쳐 클래식 음악 연주회와 기타 공연으로 구성된다. 영어의 프롬네이더(Promenader) 또는 프롬머스(Prommers)라는 단어는 매년 프롬스 콘서트에 웬만해서는 빠지지 않고 단골로 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프롬스는 일찍이 1895년부터 시작된 런던의 대행사였다. 처음에는 퀸스 홀(Queens Hall)에서 열리다가 1941년부터 RAH로 옮겨서 열리게 되었다. 이후로 RAH는 Proms의 대명사가 되었다. 프롬스에서는 매년 약 70회의 연주회가 열린다. 프롬스의 마지막 날에는 영국 전역에 걸쳐 수많은 연주회장에서 동시에 여러 연주회가 열린다. 2009년 시즌에는 토털 100회의 연주회가 열려서 기록을 세웠다. 그만큼 해마다 인기상승이다. 세계의 음악평론가들은 프롬스를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가장 민주적인 음악 축제’라고 입을 모은다. 누가 영국을 고전음악의 불모지라고 그랬는가? 프롬스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실제로 프롬스는 고전음악뿐만 아니라 팝음악으로도 유명하다. 세계적인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도 프롬스를 통해 정상에 올랐던 것을 보면 잘 알수 있는 일이다. 세계적인 크림(Cream)이 1968년 고별연주회를 가진 곳도 RAH였다. 크림의 연주회 실황은 1969년 1월 BBC에서 전국에 방송되었는데 BBC 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로열 알버트 홀에서의 프롬스(PROMS)연주회
[알버트 서거 10주년 기념]
RAH는 1871년 문을 열었다. 알버트공의 서거 10주년을 기념해서였다. 빅토리아여왕이 직접 오프닝에 참석했다. RAH에서는 1년에 350회 이상의 연주회가 열린다. 1년중에 거의 매일 연주회가 열리는 셈이다. RAH에서는 주로 클래식음악 연주회가 열리지만 이외에도 발레, 오페라, 록, 팝 연주회도 열리며 무대에서는 테니스 경기도 거행된다. 또 어떤 경우에는 화려한 파티도 열린다. 돔형의 RAH는 이른바 알버토폴리스(Albertopolis)라고 부르는 문화예술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알버토폴리스는 1851년 런던의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대전시회(Great Exhibition)의 수익금으로 조성된 신도시를 말한다.
런던 대전시회를 위해 하이드파크에 세운 수정궁.
전시회의 수익금으로 알버르토폴리스를 세웠다.
RAH는 영국 왕립공병대의 프란시스 포우크(Francis Powke) 대위와 헨리 스콧(Henry Scott) 소장이 공동으로 설계했다. RAH는 고대 야외극장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당시 유럽 제1의 건축가인 독일의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의 건축양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트프리트 젬퍼는 런던에 초청되어 사우드 켄싱턴 박물관(South Kensington Museum)을 건축했다. 고트프리트 젬퍼는 독일 드레스덴 오페라극장 등의 걸작을 남긴 건축가였다. 철구조물인 돔은 만체스터에서 제작되어 대형 마차로 런던으로 운반되었다. 건물에 철구조물의 돔을 올릴 때 혹시나 벽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 자원해서 공사장 안에 남아 있겠다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했다. RAH는 당초에 1870년 크리스마스 데이에 준공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사가 조금 지연되어 해를 넘겨 1871년 오픈되었다. 빅토리아여왕은 세상 떠난 부군인 알버트를 기념하는 건물이므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건설현장을 자주 방문하였다. 빅토리아여왕은 RAH의 모습을 보고 ‘영국 헌법과 같이 생겼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단단하고 완벽하며 모든 면모를 고려했다는 뜻이다.
로열 콘소트 로우드(Royal Consort Road)에서 바라본 로열 알버트 홀.
1871년이면 우리나라에서 신미양요가 일어난 해이다. 로열 콘소트는
국왕의 배우자, 즉 빅토리아여왕의 부군 알버트공을 말한다.
오프닝은 1871년 3월 29일에 있었다. 왕세자인 에드워드(Prince of Wales)가 환영의 연설을 했다. 이어 빅토리아여왕이 오프닝을 선언할 차례였지만 여왕은 너무 감격하여 말을 잇지 못할 형편이어서 왕세자가 ‘이제 여왕폐하께서 RAH의 오프닝을 선언하시었습니다!’라고 대신 말하였다. 그런 연후에 콘서트가 진행되었다. RAH의 음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당장 지적되었다. 음의 에코가 심하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할지 몰랐다. 그보다도 여왕은 RAH가 오픈하자마자 음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고인에게 민망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보수공사를 내키지 않아했다. 천정에 에코 흡수장치를 설치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1백년이 지난 1969년이었다. 천정에 설치한 에코 흡수장치는 ‘버섯’ 또는 ‘비행접시’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1871년 5월 29일의 그랜드 오프닝. 마치 국군의 날 시가행진을 보는 것 같았다.
[예술과 과학의 승리]
건물의 외관에는 대형 모자이크 프리즈(Frieze)가 있다. 프리즈는 천정과 벽면 사이의 공간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그림이나 조각으로 채운다. 모자이크 프리즈의 주제는 ‘예술과 과학의 승리’(The Triumph of Arts and Sciences)이다. 이는 알버트공이 생전에 주장하던 모토였다. 모자이크 프리즈는 16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1) 1851년의 대전시회에 출품한 국가들 (2) 음악 (3) 조각 (4) 회화 (5) 예술가들과 후원자들 (6) 석공들 (7) 목공과 벽돌공들 (8) 건축 (9) 예술과 과학의 초창기 (10) 농업 (11) 식물표본 및 토지조사 (12) 천문학과 항해술 (13) 철학자들, 현자들, 학생들 (14) 공학 (15) 기계의 힘 (16) 도예와 유리공예이다. 프리즈의 상단에는 테라코타로 만든 글씨가 적혀 있다.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성경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내용인즉 “이 건물은 모든 국가의 산업, 과학, 예술을 진보키 위해 건설되었다. 이는 여왕의 부군인 알버트 공의 의지를 완성키 위한 것이다. 부지는 1851년 대전시회의 수입으로 조성되었다. 초석은 1867년 5월 20일에 빅토리아여왕폐하가 놓았으며 1871년 3월 29일 개관되었다. 주는 위대하시며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권세의 주시도다. 이 세상 만물이 모두 주의 것이요 모든 지혜와 역사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로다”이다.
로열 알버트 홀의 프리즈 그림. '예술과 과학의 승리'
개관기념 콘서트는 아서 설리반(Arthur Sullivan)의 칸타타 On Shore and Sea(땅에서 바다에서)이었다. 1871년 5월 1일 공연되었다. 일본 씨름인 수모경기가 영국에서 최초로 거행된 곳도 RAH의 무대에서였다. 1969년에는 존 로드(John Lord)가 작곡한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그룹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를 말콤 아놀드(Malcolm Arnold)의 지휘로 딥 퍼플(Deep Purple)과 로열 필이 함께 공연했다.
공사다망하신 중에도 빅토리아여왕이 친히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낸 로열 알버트 홀
개관기념 연주회. 아서 설리반의 칸타타가 연주되었다. 영국을 죽어라고 사랑하는
캐나다의 토론토에도 마치 골프공처럼 생긴 로이 톰슨 홀이 있다.
로열 알버트 홀을 조그맣게 본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스므한 살 때 동갑 내기인 사촌오빠 '앨버트' 왕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두번째 만남에서 그녀는 '앨버트'를 이렇게 칭찬했다. '앨버트'는 정말 사람을 빨려들게 하는군 !'
|
첫댓글 아~~~가슴이 먹먹해지는 내용입니다.
알버트공이 이렇게나 멋있는분인줄 몰랐습니다~
빅토리아 여왕도 존경스럽구요~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추천에 한표 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