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21 장
향유할 무한한 능력(3)
「아, 자비로운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은 바보들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자비로운 사람들의 어리석음보다 더 큰 고통을 주는 것이 세상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대는 자비도 불행을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졌다.
이슬람교도들은 자비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다.
기독교인들은 자비라는 명목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자비란 그대가 이슬람교도가 아닐 경우 이슬람교도로 개종하는 것이다.
오직 이슬람교도만이 심판의 날에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강제로 칼날 끝에 서게 되더라도 그것은 자비이다.
그리고 그대가 여전히 이슬람교도가 되지 않으려 한다면, 그대는 살해를 당하는 편이 낫다.
이슬람교도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그대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전세계에 끊임없이 퍼뜨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교회로 데려가야 한다.
과거에는 비非기독교인들에게 폭력, 살인, 방화가 저질러졌다.
오늘날에는 개종의 수단이 변했지만, 그 기본사상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과거에 그들은 성경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무기를 들었다.
이제 그들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 빵을 들고 다가온다.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은 그들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다.
그들이 비록 기독교인이 되더라도 종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평생 알아왔던 것이라고는 굶주림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빵은 분명히 대단한 구원일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매수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수록 덕을 쌓게 된다.
그들의 관심사는 타인에 대한 구원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구원과 미덕일 뿐이다.
자비는 너무나 많은 해악을 끼쳐왔다.
다가올 인간은 자비를 극복하고 일어나야 한다.
《새로운 인간new man은 어떤 대가나 보수가 아니라 오직 기쁨에 의해서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나누는 기쁨이다.
《빵이 있을 때,
굶주린 사람의 자존심을 상처주지 않으면서도 그와 함께 빵을 나누고,
불행한 사람과 함께 나누면서도 풍요로움을 유지할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미덕이다.》
「동정을 이겨내지 못하는 모든 연인들은 너무나도 비통하다!
악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신에게도 지옥이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악마의 입을 빌려서 말하고 있다.
그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이 죽었다면, 악마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 둘은 허구의 존재이고,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
신과 악마는 함께일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서 악마의 은유법을 사용하고 있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수많은 연애戀愛가 도달하는 결론이다.
모든 사랑은 지옥의 상태에서 끝이 난다.
결국 그는 타인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으며, 타인은 지옥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타인은 그 자신의 좋아함과 싫어함을 갖고 있다.
조화란 전혀 다른 차원이 원칙이기 때문에 연인들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대가 그대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데, 그 누구와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연인들이 해변이나 공원에서 잠시 만나는 것은 괜찮다.
두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고, 각자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아름답고 멋져 보인다.
그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대해 서로에게 달콤한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 하루 24시간 동안 거짓된 모습으로 살기가 어려워진다.
몸은 무거워지고, 가면은 계속 벗겨져서 24시간 동안 가면을 쓰고 있을 수가 없다.
별것도 아닌 것에 대해 달콤한 말을 반복해서 할 수 없다.
이제 지겨워진다.
조만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똑같은 영화를 계속 반복해서 보는 것처럼 사랑은 반복적이고 기계적으로 바뀐다.
어떤 것이라도 반복되면 그대는 로봇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지성과 명상과 사랑이 성장해서 그대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을 변형시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변형이 일어나면 매번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볼 때마다 예전과 다르고 새로워진다.
새로운 꽃들이 피어나고, 계절은 늘 바뀌게 된다.
늘 변하지 않으면 사랑마저도 지옥이 된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랑에 빠져도 그 자신의 지옥에 살게 된다.
마치 목욕탕처럼 사적인 지옥이 된다.
《불행하지 않고 지옥이 아닌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 새로워야 하고,
과거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늘 새로운 차원과 방식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
로봇은 생명이 없고 효율성만 갖고 있기 때문에 그대가 로봇처럼 살지 않을 것을 삶의 기본적인 태도로 삼아야 한다.
《세상은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세상은 그대가 로봇이 되기를 바란다.》
그대의 존재는 그대가 절대적으로 비기계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매일 아침 새로운 그대를 발견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바로 초인의 길이다.
그것이 바로 산야신의 길이다.
「그러니 동정에 대해 경계하라.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먹구름이 다가올 것이다.
진정으로 나는 날씨의 전조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말 역시 기억하라.
모든 위대한 사랑은 동정을 뛰어 넘는다.
그것은 사랑받는 것을 창조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랑은 창조적인 경험이고, 동정, 위로, 자비는 사랑보다 훨씬 낮은 것이다.
연인들은 서로를 창조한다.
그들의 창조에서 연인들은 서로 끊임없이 새롭고 생기 있는 것으로 존재한다.
「”나는 나 자신을 나의 사랑에게 바친다.
그리고 나 자신으로서 내 이웃에게도.”」
그 어떤 기만도 숨길 수 없기 때문에 그대의 사랑을 기만하지 말라.
상대방은 조만간 그대의 기만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하지 말라.
진정성 있고 성실하게 임하고, 열려있는 책이 되어라.
그 어떤 것도 숨기거나 꾸미지 말라.
그대 자신으로 남아라.
가장하고, 거짓말하고, 기만하고, 속이는 것에 따른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저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하라.
「그것이 모든 창조자들의 언어이다.
그러나 창조자들은 모두 험악하다.」
창조성으로서 사랑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고정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로서의 사랑뿐만 아니라 최대 속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창조적인 소용돌이이자 춤으로서의 사랑에서는 누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누가 사랑받는 사람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 춤은 점점 더 깊어져서 춤을 추는 사람은 사라지고, 오직 춤만 남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춤, 사랑이라는 창조적인 행위로 만들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랑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가르친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 바로 신神이자 종교이다. 끝.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1
오쇼 강의/박형진 옮김. 젠토피아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