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바다/파스칼 키냐르
파스칼 키냐르와 만나면 '한 편의 소설이 아니라
천편의 소설과 맞먹는 한 편의 소설을 썼다'는 이미지화된 표현이 먼저 달려온다.
파스칼 키냐르는 쿠바 태생이며 음악가인 아버지와 언어학자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여러 언어와 다양한 악기를 익혔다
[트럼펫의 깃발]이라는 단편이다.
늙은 화가 부에는 병들었다 트럼펫을 샀다.
구리 못을 써서 금빛 술 장식이 달린 능직 비단 깃발 하나를 트럼펫 위쪽에 걸었다.
이 깃발은 팔, 젖가슴, 빛나는 살점이다. 뒤러는 죽기 전 노란 황야 위로 타다닥 떨어지는 소나기를,
다빈치는 바다를 바라보는 젊은 여인을, 카라바조는 메두사처럼 울부짖는 자기 머리를 철제 방패에 그려놓았다.
부에는 바람이 들어 올리는 깃발이 달린 빌헬름 하스의 트럼펫을 그렸다.
그는 기아를 생각한다. 어릴 적보다는 나이 들어서 기아를 겪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너무 굶주려 팔뚝을 뜯어먹는 남자를 보았다고 했다. 제 허기를 잊기 위해 제 고통을 잊었다
허기가 죽음보다 더 고약하기 때문이다. 허기는 요구하고 죽음은 소멸시킨다
부에는 사지를 떨다가 죽었다.
일어서려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곤 했다. 옛날 어린 아들이었던 전혀 다른 아이를 생각한다
얼마나 예뻤던가!
얼마나 기침을 했던가! 두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아이들 역시 자꾸 쓰러져 혹이 났다.
우리는 중세 시대에 생긴 갤러리 위쪽에 자리한 곳에 살았다. 수도원 성당이 있었고
죽은 왕들의 침묵에 이르렀다 큰 마로니에 나무 그늘 밑에서 돌아가고 있는 목마가 있다.
아이는 내 손을 잡고 노래가 있고 말들이 올라가고 내려간다.
음악이 높아지고 아이는 새하얗다.
아이의 머플러가 나풀거리면서 얼굴을 가린다.
p484
전체적인 맥락은 제목인 [사랑 바다]인 것처럼 사랑이 기둥이다.
죽음도 슬픔도 질투도 이별도 사랑이다. 트럼펫의 깃발도 근간은 사랑이다.
트럼펫은 마지막 행동을 분류함으로써 수많은 애정을 일깨운다.
기아를 연민하고 차라리 어른들이 굶어라 일갈한다
얼굴이 새하얗던 아이는 목마를 타고
머플러가 얼굴을 가린다.
깃발과 머플러 처음과 끝, 에세이 같고 시 같은
이 단편은 비교적 독자에게 친절하다.
파스칼 피냐르는 친절하기는커녕 매정한 작가다.
퍼즐 풀기 하듯이 따라가다 보면 [하룻낮의 행복]에서
그가 오직 생동감이라고 묘사한 산 위에서 돌들을 헤쳐가며 몰려오는
우뢰와도 같은 폭포소리---
그의 감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 한글 번역본이 아닌 친절하게
파스칼 키냐르가 나직이 말해주는 목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고
그의 신경세계의 미로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경험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책의 번역가는 백선희 번역이다.
주로 로맹가리를 번역했으며 다양한 번역으로
[파졸리니의 길]도 인상 깊었다.
[사랑 바다]에서 케오는 천연의 진주알들에게서는
번역가 백선희 작가의 재창조가 한몫 기여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백선희 번역가에게도 감사드린다.
<신연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