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준비를 하려고 교회력 본문을 살펴보다가 전 무척 당황했습니다. 구약은 세 개의 본문이 주어져 있었는데, 세 본문 모두 결혼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창세기는 오늘 함께 읽은 것처럼, 아브라함이 종을 자기 고향에 보내 이삭의 아내를 찾아와 결혼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구약 본문은 시편 45편이었습니다. 모든 시편에는 소제목이 달려있는데, 45편의 소제목은 ‘왕의 결혼식 노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본문은 아가서입니다. 아가는 히브리어(쉬르 하쉬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이며,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결혼을 경험하지 못한 저로서는 이 본문들을 가지고 설교를 전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혹감에 한동안 이리저리 헤매고, 방황했습니다. 로마서와 마태복음 말씀으로 준비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씀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당황하고 긴장하니, 몸도 마음도 생각도 경직되고, 더 넓게 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결혼이라는 난제 앞에서, 그리고 가르치는 학생들의 내신대비를 해야 하는 부담감과 분주함 속에서, 설교준비를 은총이 아닌 일로 바라보니, 조급함과 불안함에 뭔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제 자신에게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몇 달간의 설교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저로서는 불안함과 조급함에 몰려 어제 아침까지도 저 자신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는 중에도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이 구절은 엄청난 생각들로 폭주하는 제게 울림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반복해서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과, 평안이 느껴지는데, 그 순간에 감사함으로 온전히 머물지 못하고, 머리로 깨달음이나 통찰을 얻으려 엄청나게 애쓰고 있는 제가 순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리고 나니, 그동안 설교준비를 하는 과정 속에서 배웠던 많은 것들과, 맛보았던 깨달음의 기쁨이 떠올랐습니다. 비록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했을지라도, 그 과정은 분명 제게 유의미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할 때가 우리에게 너무 많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시선이 머물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한계나 부족함에 몰두해서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읽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에 머물러 있지 말고, 하나님께 온 주의를 기울여 말씀을 경청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8-30)”
이 말씀을 하시기 전,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를 먼저 표현하십니다. 하나님나라를 아는 일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아들만이 아버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상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결국에는 일치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는,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저 없이, 온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친밀한 관계를 맺어 서로를 알고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고 초대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단순하며, 순진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도록 인도하십니다. 사울이 바울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그의 지식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적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친밀함과 사랑 안에서 알아가도록 끊임없이 은총을 구하고, 마음을 열어 주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특정하여 초대하십니다. 이 짐은 다양하게 풀이되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현재 상황과 연결 지어 그 짐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짐이자 멍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함께 읽은 로마서 본문과도 연결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7:19-20,24)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목숨과도 같이 여겼습니다. 율법을 통해 의로워지길 바랐지만, 율법으로는 죄로 인해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자기 한계를 더 분명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지만,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하게 되는 인간 실존은 유대인들에게 분명 감당할 수 없는 그림자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십계명을 더 완벽하게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엄청나게 많은 율법 조항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법조문들을 지킬 학식과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그럴 수 없는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그들에게 전가하고, 투사했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본질은 잊어버리고, 율법의 형식과 틀에 얽매여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가는 경험이 없어지자, 그들은 알맹이 없는 껍질만 붙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워지기 위해 율법으로 자신을 억누를 필요가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마음에 쉼을 얻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삶의 태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첫 번째 삶의 태도는 온유입니다. 온유함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해 베푸는 친절과 너그러움입니다.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자책하던 것을 멈추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온유함과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한, 온유함과 부드러움은 어떤 영성적 규율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온유하게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며 쾌락과 고통,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사랑합니다. 온유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을 때, 우리는 그분의 뜻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두 번째 태도는 겸손함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능력에 만족할 수 없을 때, 절망합니다. 절망은 자존심이 극대화된 것이며, 자기 사랑의 극치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존재 의미는 우리의 능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건강과 마음의 평화, 사회적 성공과 명성 같이 우리가 생각하기에 모든 좋은 것을 믿음이 가져다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겸손은 믿음의 대가로 다른 것들을 고집하거나, 사람들의 칭찬이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삶의 태도입니다. 겸손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믿음의 순수한 상태를 바라는 것입니다. 겸손은 투명한 거울처럼 하나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고, 신앙을 깊어지게 하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수련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도록 우리 안에 끊임 없이 올라오는 욕망과 생각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또 향심기도 얘기야?’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내 생각에 몰두하다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놓치며 살고 있는지요. 또 하나님과 본래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얼마나 불안하고, 불완전하게 살고 있는지요. 향심기도는 본래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임을 알게 하고,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하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이 은총의 통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고, 존재하게 됩니다. 이 은총을 누리도록 초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더 세밀히, 더 주의깊게 귀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