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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명필 한시 감상 - 소동파의 적벽부
노경수 추천 0 조회 47 13.04.25 09:4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흔히들 세간에서 <소동파蘇東坡>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중국 송나라 시대의 시인은 본 이름이 <소식蘇軾1037~1101>입니다.

아버지 <소순 蘇洵>이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으로 이미 유명한 문인이었고, 동파의 동생 <소철 蘇轍> 또한 뛰어난 문인으로 이 세부자를 중국역사상 <삼소三蘇>라 일컬어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송나라 원풍(元豊, 송의 연호) 5년(1082) 가을 7월 16일의 달 밝은 밤에 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며 삼국의 영웅인 조조(曹操)와 주유(周瑜)의 풍류에 비겨 자신의 덧없는 인생을 생각하고, 결국은 저들이나 자신이 다 무한한 생명 앞에서는 모두 덧없는 존재라는 것과, 무한한 본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이 다 같은 것임을 깨닫고 시름을 잊는다는 내용을 술회한 명문입니다.


 적벽강은 한(漢)나라 말엽 손권과 조조(曹操)가 싸웠던 전쟁터<삼국지의 적벽대전의 전장>이었으며, 이 작품은 소식이 황주(黃州)로 유배 갔을 때 친구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지은 것인데. 전. 후 적벽부 2편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대만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이 작품에서 <임술지추>로 시작되는 첫 부분은 망실되어 명나라의 유명한 서예가 문징명이 보충으로 써 넣은 자료가 있어 말미에 게재했습니다. 

 

<전 적벽부 前 赤壁賦>

 

01[1].jpg

 

 

壬戌之秋 七月旣望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임술지추 칠월기망 소자여객 범주유어적벽지하. 청풍서래 수파불흥.

 
임술(壬戌) 가을 7월 기망(기望)에 소자(蘇子)가 손[客]과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 노닐새,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 오고 물결은 일지 않더라.
 
擧舟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거주촉객 송명월지시 가요조지장. 소언, 월출어동산지상 배회어두우지간.
 
 술을 들어 손에게 권하며 명월(明月)의 시를 외고 요조(窈窕)의 장(章)을 노래하더니, 이윽고 달이 동쪽 산 위에 솟아올라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 사이를 서성이더라.
 
白露橫江 水光接天
백로횡강 수광접천
 
흰 이슬은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이었더라. 

 

02.jpg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浩浩乎 如憑虛御風 而不知其所止
종일위지소여 능만경지망연. 호호호 여빙허어풍 이부지기소지.
 
한 잎의 갈대 같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니, 넓고도 넓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탄듯하여 그칠 데를 알 수 없고,
 
飄飄乎 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於是 飮酒樂甚 구舷而歌之
표표호 여유세독립 우화이등선 어시 음주락심 구현이가지
 
가붓가붓 나부껴 인간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치어 신선(神仙)으로 돼 오르는 것 같더라. 이에 술을 마시고 흥취가 도도해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니,

 

03.jpg

 

 

歌曰 桂棹兮蘭?  擊空明兮?流光  渺渺兮予懷 望美人兮天一方.
가왈 계도혜난장  격공명혜소류광  묘묘혜여회 망미인혜천일방
 
노래에 이르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木蘭) 삿대로 물에 비친 달을 쳐서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네. 아득한 내 생각이여, 아름다운 사람(美人)을 하늘가에 바라보도다.."
 
客有吹洞簫者 倚歌而和之 其聲嗚嗚然 如怨如慕 如泣如訴
객유취통소자 의가이화지 기성오오연 여원여모 여읍여소.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이 있어 노래를 따라 화답(和答)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도 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연 하는 듯, 

 

04.jpg

 

 

餘音?? 不絶如縷 舞幽壑之潛蛟 泣孤舟之?婦. 蘇者 ?然正襟 危坐而問客曰  何爲其然也?
여음요요 부절여루 무유학지잠교 읍고주지리부. 소자 초연정금  위좌이문객왈  하위기연야?
 
여음(餘音)이 가늘게 실같이 이어져 그윽한 골짜기의 물에 잠긴 교룡(蛟龍)을 춤추게하고 외로운 배를 의지해 살아가는 과부를 울릴레라. 소자(蘇子)가 근심스레 옷깃을 바루고 곧추앉아 손에게 묻기를 "어찌 그러한가?" 하니,

 客曰 : 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
 객왈 : 월명성희 오작남비 차비조맹덕지시호?
 
손님이 말하기를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조맹덕(曹孟德)의 시가 아닌가?

 

05.jpg

 

 

西望夏口 東望武昌 山川上繆 鬱乎蒼蒼.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
서망하구 동망무창 산천상무 울호창창. 차비맹덕지곤어주랑자호?
 
서쪽으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천(山川)이 서로 얽혀 빽빽하고 푸른데, 여기는 맹덕이 주랑(周郞)에게 곤욕(困辱)을 치른 데가 아니던가?

 

方其破荊州 下江陵 順流於東也 軸로千里 旌旗蔽空
방기파형주 하강릉 순류어동야 축로천리 정기폐공
 
바야흐로 형주(荊州)를 격파하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감에, 흐름을 따라 동으로 가니, 배는 천 리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어라.

 

06[2].jpg

 

 

?酒臨江  橫?賦詩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
시주임강  횡삭부시 고일세지웅야  이금안재재?
 
술을 걸러서 강가에 가서 창을 비끼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一世)의 영웅(英雄)일 진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況吾與子 漁樵於江渚之上 侶魚蝦而友?鹿
황오여자 어초어강저지상 여어하이우미록
 
하물며 나는 그대와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를 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함에랴. 

 

駕一葉之輕舟 擧匏樽而相屬  寄??於天地  渺滄海之一粟.
가일엽지경주 거포준이상촉  기부유어천지  묘창해지일속.
 
한 잎의 좁은 배를 타고서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고,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으지하니 아득히 넓은 바다의 한 알의 좁쌀알이구나.

 

07.jpg

 

 

哀吾生之須臾  羨長江之無窮 挾飛仙以?遊  抱明月而長終 知不可乎驟得 託遺響於悲風
애오생지수유  선장강지무궁 협비선이오유 포명월이장종 지부가호취득 탁유향어비풍
 
우리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장강(長江)의 끝없음을 부럽게 여기노라. 날으는 신선을 끼고 즐겁게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길이 마치는 것은 갑자기 얻지 못할 줄 알새, 끼치는 소리를 슬픈 바람에 부치노라.”

 

08.jpg

 

 

蘇者曰: 客亦知夫水與月乎?
소자왈: 객역지부수여월호?
 
소자 말하되 "손님꺼서도 대저 물과 달을 아는가 ?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서자여사, 이미상왕야. 영허자여피 이졸막소장야.
 
가는 것은 이와 같으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되 마침내 줄고 늚이 없으니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
개장자기변자이관지 즉
천지증불능이일순
 
무릇 변하는 것에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일 수 밖에 없으며,

 

09.jpg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羨乎?
자기불변자이관지 즉물여아개무진야 이우하선호?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요?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차부천지지간 물각유주

또, 대저 천지 사이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구비오지소유 수일호이막취 유강상지청풍 여산간지명월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한 터럭일지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10[1].jpg

 

而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이득지이위성 목우지이성색 취지무금 용지불갈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者之所共適
시조물자지무진장야 이오여자지소공적
 
이는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11.jpg

 

 

客喜而笑 洗盞更酌 肴核旣盡 杯盤狼藉 相與枕藉乎舟中 不知東方之旣白.
객희이소 세잔갱작 효핵기진 배반낭자 상여침자호주중 부지동방지기백
 
손이 기뻐하며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드니 안주가 다하고 잔과 쟁반이 어지럽더라. 배 안에서 서로 팔을 베고 누워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어라.

 

 

 

 

<맨앞 5행(전체는 66행)의 36자가 파손되어서

명나라 문징명선생이 보충해서 써넣었다고 합니다....>

5054.gif

 

 

 

 

<후적벽부 - 소동파>

 

是歲十月之望, 步自雪堂, 將歸于臨皐, 二客從予, 過黃泥之坂, 霜露旣降, 木葉盡脫. 人影在地, 仰見明月. 顧而樂之, 行歌相答, 已而歎曰, 有客無酒, 有酒無肴. 月白風淸, 如此良夜何. 客曰, 今者薄暮, 擧網得魚, 巨口細鱗, 狀如松江之?. 顧安所得酒乎. 歸而謀諸婦, 婦曰, 我有斗酒, 藏之久矣. 以待子不時之需.

 

  이 해(임술년) 10월 보름에 설당(雪堂)으로부터 걸어 나와서 임고정(臨皐亭)으로 돌아가려 할 때에 두 손(客)이 나를 따라왔다. 황토 언덕을 지나니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고 나뭇잎이 다 떨어졌으므로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 땅에 있기에 우러러 밝은 달을 보았다. 돌아보고 즐거워하여 길을 걸으며 노래부르면서 서로 화답하였는데, 이윽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손(客)이 있으면 술이 없고 술이 있으면 안주가 없구나. 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한데, 이처럼 좋은 밤에 어찌 한단 말인가?” 하자, 손(客)이 말하기를 “오늘 저녁 무렵에 그물을 들어 고기를 잡았는데,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늘어 모양이 송강(松江)의 송어와 같습니다. 다만 어느 곳에서 술을 구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돌아와서 부인에게 상의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내가 한 말 술을 두어 보관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대의 불시(不時)의 쓰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於是携酒與魚, 復遊於赤壁之下, 江流有聲, 斷岸千尺. 山高月小, 水落石出, 曾日月之幾何, 而江山不可復識矣. 予乃攝衣而上, 履?巖披蒙茸, 踞虎豹, 登?龍, 攀棲?之危巢, 俯馮夷之幽宮, 蓋二客之不能從焉. 劃然長嘯, 草木震動, 山鳴谷應, 風起水涌, 予亦?然而悲, 肅然而恐, 凜乎其不可留也. 反而登舟, 放乎中流, 聽其所止而休焉, 時夜將半, 四顧寂寥, 適有孤鶴, 橫江東來, 翅如車輪, 玄裳縞衣, ?然長鳴, 掠予舟而西也.

 

 

  이에 술과 고기를 가지고 다시 적벽강(赤壁江) 아래에서 노니, 흐르는 강물 소리가 들려오고 끊긴 강 언덕은 천 길이나 되는구나. 산이 높고 달이 작으며 수위가 떨어져 돌이 드러나니,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강산을 다시 기억할 수가 없구나.

 

 

  나는 마침내 옷자락을 걷어잡고 올라가서 높은 바위를 밟고 우거진 풀 속을 헤치고, 호랑이 모양의 바위에 걸터앉고 규룡 모양의 나무에 올라가고, 송골매가 살고 있는 높은 둥지에 올라가 수신(馮夷)의 그윽한 집을 굽어보니, 두 손(客)은 따라오지 못하는구나. 째질 듯한 소리로 길게 휘파람을 부니, 초목이 진동하고 산이 울림에 골짜기가 메아리치며 바람이 일고 물이 솟는 듯 하였다. 내 또한 초연(?然)히 슬퍼지고 숙연(肅然)히 두려워져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돌아와 배에 올라 중류(中流)에 이르러 배가 멈추는 대로 내버려두고 쉬었다. 한밤중이 되려 할 때에 사방을 돌아보아도 조용하기만 하였는데, 마침 외로운 학 한 마리가 강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오니, 나래가 수레바퀴만 하며, 검은 치마에 흰옷을 입고는 길게 울면서 내 배를 스쳐 서쪽으로 갔다.

 


  須臾客去, 予亦就睡, 夢一道士羽衣翩?, 過臨皐之下, 揖予而言曰, 赤壁之遊樂乎. 問其姓名, ?而不答. 嗚呼噫?, 我知之矣. 疇昔之夜, 飛鳴而過我者, 非子也耶. 道士顧笑, 予亦驚悟, 開戶視之, 不見其處.

 

  조금 후에 손(客)이 떠나가고 나 또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한 도사가 깃으로 만든 옷을 펄럭이면서 임고정(臨皐亭) 아래를 지나다가 나에게 읍하고 말하기를 “적벽강(赤壁江)의 뱃놀이가 즐거웠는가?” 하여, 그의 이름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아! 슬프다. 내 그대를 알겠노라. 어제 밤에 울면서 내 배를 스쳐 지나간 것이 그대가 아닌가?” 하니, 도사는 돌아보고 웃는다. 나 또한 놀래어 잠을 깨어 창문을 열고 보니,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소동파의 인물 탐구- 위키백과>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식
蘇軾
소식
출생 1037년
四川眉山?
사망 1101년
직업 시인,학자,화가,서예가,정치인

소식(蘇軾, 1037년~1101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였고 중국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었다. 그는 또 북송사대가로 손꼽히는 유명 서예가이기도 했고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 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목차

[편집] 생애

송나라 때 저명한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이었고, 그 아우도 소철(蘇轍)로 유명한 문인이다. 이 세 부자를 사람들은 삼소(三蘇)라고 불렀는데, 모두 당송팔대가로 손꼽혔다.

당송8대가의 하나인 구양수 문하에서 배웠으며, 22세에 과거에 급제 일찌감치 문재를 알렸다. 당시 북송(北宋)은 왕안석 등이 주창한 신법을 둘러싸고 당쟁이 확산될 시기였는데, 소동파는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이를 구법당이라 하며, 구법당의 영수는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이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했다. 말년에 신법당이 득세하면서 해남도까지 귀양을 갔으며, 신법당을 지지했던 철종이 죽고 복권되었으나, 귀양길에서 돌아오는 도중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번 결혼하여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항저우, 밀주, 서주, 호주 등에서 벼슬을 지냈다.

[편집] 작품

시문집으로는 동파칠집(東坡七集)이 있고, 수필집으로는

  • 答謝民師論文帖
  • 祭黃幾道文
  • 전적벽부(前赤壁賦)
  • 黃州寒食詩帖
  • 題西林壁
  • ?湖上初晴後雨

그림으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 행목괴석도(枯木怪石圖)
  • 죽석도(竹石圖)

[편집] 사상

소동파의 회화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대나무를 그릴 때는 먼저 네 마음 속에 대나무가 있어야 한다.' 이는 각 개인마다 지닌 대나무를 먼저 들여다봐야한다는 뜻으로 소동파가 생각하는 회화론의 특징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소동파는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현실참여주의자로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매우 투철했다. 게다가 그는 워낙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백성에 대한 연민의 정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인간적 애정과 관심도 유난히 깊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에서 비롯된 현실도피적 사고방식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물질세계의 허무성과 무가치성을 간파하고 물질세계 바깥에서 노닐려는 초월적 인생관도 지니고 있었으며, 그 결과로 자연을 매우 사랑했고 나아가 그 자신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처럼 세속적인 가치에 대하여 초연할 수 있었기에 그는 온갖 정치적 핍박 속에서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기는커녕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 생활과 지방관 생활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삶에 임할 수 있었다.

[편집] 영향

[편집]

소동파의 시는 송(宋)나라 때부터 중국은 물론 고려나 요(遼)나라 같은 이웃 나라에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만큼 독자의 수요에 부응하여 그의 시집 역시 송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줄곧 간행되어 왔으며, 이 가운데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아주 많다.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그러기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세상의 학자들이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필요한 문체를 익히느라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소동파 시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매년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마다 금년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여긴다”라고 했고,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오로지 만당(晩唐) 시만 익혔고 고려 중엽에는 오로지 소동파 시만 배웠다”라고 했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과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이 소동파(본명 軾)와 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소동파에 대한 우리 문인들의 추앙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렇듯 우리의 선조들은 소동파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편집] 음식

여가가 날 때마다 소동파는 틈틈이 돼지고기를 쪄서 먹곤 했다고 전해진다. 요리를 하던 중에 오랜 친구가 그를 방문해서 바둑을 두곤 했다. 소동파는 바둑에 열중해서 타는 냄새가 나도록 고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내 놓은 것이 바로 동파육(東坡肉)이라고 하여 거지닭(叫花鷄)과 함께 항저우의 유명한 음식이 되었다.

[편집] 족보

오늘날까지 동양에서 이어지는 족보의 원형은 소순(蘇洵; 부)·소식(蘇軾)·소철(蘇轍; 제)이 정리한 보첩에서 비롯하였다.

Crystal Clear app linneighborhood.png 본 문서에는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CC-BY-SA 3.0으로 배포한 책 소개글중 "소동파 시선" 의 소개글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은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혹은 CC-SA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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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04.25 10:48

    첫댓글 미록 나의것이 아니면 터럭하나라도 가질바가 아니나 강위의 맑은바람과 산간의 밝은달은 가져도 금할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없는 명월이라 ...맑은바람에 값이 어디있고 밝은달 감상하는데 주인이 따로 어디 있는가?
    자연도 진리도 주인이 없다. 즐기는 자의 것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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