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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2011년 5월 12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사도8.26-40 요한6,44-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4-51)
길라잡이 /김찬선신부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당신께 올 것이라는 말씀이고,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온 이, 즉 당신만 아버지를 봤기에
당신 외에는 아무도 직접 하느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배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풀이를 하면 이런 것이 되겠습니다.
1) 하느님을 직접 뵌 분은 예수님뿐이니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제일 잘 알고 전해 줄 분은 예수님이고
2)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당신께 온다고 하시니
예수님 말고도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존재가 있고
3) 그러므로 이런 존재 덕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예수님께도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언표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계시이지만
예수님 말고도 하느님을 계시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구원의 보편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널려있는 하느님의 표징들을 얘기한 바 있지만
해, 달, 별, 공기, 바람, 풀과 나무,
이 모든 것이 말은 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요즘 같은 봄에는 피어나는 꽃들이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대해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 줍니다.
말 못하는 피조물들이 이러할 진데
신비를 감지하고 얘기하고 그릴 줄 아는 인간은
하느님 말씀의 더 완전한 전달자입니다.
공자가 그러하고
노자가 그러하고
석가가 그러하고
마호멧이 그러합니다.
솔직히 저는 한 때 복음과 성경보다도
불교서적과 노자의 글에 더 심취했었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복음과 성경의 말씀이
석가나 노자의 말씀을 통해서 읽으니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석가나 노자의 말씀을 통해서 이해하니
얕고 협소했던 복음과 성경의 이해가 깊어지고 확장되었습니다.
노자의 말씀과 다른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노자의 말씀을 내포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노자의 말씀을 담지 못한다고 한다면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녀 글라라는 유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와
자기의 관계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들에게 ‘길’이 되셨는데,
그분의 애인이요 모방자인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며 가르쳐주셨습니다.”
글라라는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갔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간 것입니다.
글라라에게 있어서 프란치스코는 길라잡이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길라잡이들이 있습니다.
또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길라잡이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이 되고
사람들은 우릴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게 된다는 얘깁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봄날 아침 수도원 풍경 /양승국 신부님
태어난 지 한 달 남짓한 귀여운 꼬마 강아지 한 마리가
이제 걸어 다닐 만하다 보니 수도원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닙니다.
병아리들의 움직임이 얼마나 신기했으면 닭장 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큰 형뻘 되는 덩치 큰 개 앞에서 괜히 까불다가 제대로 한번 물렸습니다.
깨갱거리고 엄마 품으로 달려갑니다. 어미는 ‘조심하라 그랬지? 그래 많이
아프냐?’는 얼굴로 낑낑대는 녀석의 물린 곳을 핥아줍니다.
한 끼 걸러도 배고프지 않는 따사로운 봄날 아침, 수도원 풍경입니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가끔씩 듣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물질적 충족만이 반드시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님을 새삼 실감합니다.
돌이 갓 지난 아기가 출근한 엄마를 대신한 할머니 품에 안겨
잠이 들어있습니다. 자면서 손을 꼼지락꼼지락하는데,
앙증맞게 작지만 우리 것과 똑같습니다. 그 아기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표정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입니다.
더 이상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얼굴입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여러 욕구들의 틈바구니 속에 살아갑니다.
먹은 것에 대한 욕구, 지식을 탐구하고픈 욕구, 명예를 쟁취하려는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남위에 올라서고 싶은 욕구...
그런데 이런 세상의 욕구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완전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늘 아쉬움만 남습니다.
허탈함, 공허함, 불완전함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욕구 중에 가장 큰
욕구이자 상위의 욕구인 영혼의 욕구, 불사불멸의 욕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욕구를 충족시켜보고자 애를 썼습니다.
구약시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어렵고 난해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무수한 율법을 제정하였고,
엄격하게 적용함으로 인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아 버렸습니다.
당시 백성들에게 구원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
내겐 해당되지 않는 구름 위의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 구원은 너무나도 간단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믿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제시하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 너무나 간단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복잡한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는데 천재셨습니다.
그 많던 구약의 계명과 율법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단어로 단순화시키셨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도 복잡하고 어려운 줄 알았는데,
너무나 쉽게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렵지도 않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겸손하면 됩니다. 단순하면 됩니다. 순수하면 됩니다.
"참 자유인" /이수철 신부님
우리 안에 내재한 원초적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바로 여기서 조건 반사적으로 작용하는
보호 본능과 방어 본능입니다.
아마 이런 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가벼운 새들처럼
욕심을 비워갈 때 우리 역시 초연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집착이 크면 클수록 삶은 무거워지고 불안은 가중될 뿐입니다.
성령 따라, 주님의 뜻 따라 살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삶입니다.
오늘 1독서 사도행전의 필리포스, (사도행전 8,26-40)
자유롭기가 마치 바람 같습니다.
말 그대로 무소유의 바람 같은 자유로운 삶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닌 오로지 주님의 뜻대로의 삶임을
다음 몇 대목에서 즉시 감지됩니다.
‘그 무렵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 길이다.”’
‘그때에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온전히 주님의 성령 따라,
주님의 도구되어 사는 필리포스의 자유로운 삶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치 그윽한 꽃향기를 담아 전하는 바람처럼,
기쁨을 남겨 놓고 초연히 떠나는 성령의 사람,
참 자유인 필리포스입니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 합니다.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에게 세례의 기쁨을 남겨놓고
집착함이 없이 바람처럼 떠나는
필리포스의 자유로운 삶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어 필리포스는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합니다.
주님의 도구되어 무욕(無慾)의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할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체험할 때 저절로 비워지는 욕심이요,
욕심 비워지는 빈자리에
가득 차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참 자유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
믿음과 성체성사를 통한 영원한 생명의 체험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 허무와 불안,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내고
자유와 평화, 기쁨으로 충만케 합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의 성체와 말씀을 선사하시어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복음의 끈 /장재봉신부님
그리스도인은 온 삶을 그분께 봉헌한 사람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챙깁니다.
오늘 독서는
성령의 힘에 이끌려서
오락가락
분주하기 이를 데 없는 필리포스의 하루를 전해줍니다.
일어날 것까지 명령하고
갈 방향까지 정해주며
“저 수레에 바싹 다가가라”고 위치까지 일러주는 주님의 천사가
정말 꼼꼼하다 싶습니다.
그 말씀대로
일어나고 떠나고 바싹 다가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필리포스의 순명도 참 대단합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해석해 주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여 세례를 베푼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니 좀 서운합니다.
애썼다고, 수고했다고, 상을 주겠다고 까지는 아니더라도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조차 듣지 못하게
얼른
“아스돗”으로 확, 데려다 놓고
또 다시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한
주님의 천사가 야속합니다.
+++
그분께 뽑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엄청난 은총입니다.
주님의 일을 맡는 일은 대단한 은총입니다.
누구보다 더 크게
그분께 쓰임을 받는 일이야말로 가장 복된 은혜입니다.
누구보다 더 많이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서 분주하다면
누구보다 더 많이
그분의 일을 하느라 바쁘다면
어느 누구보다
굵고 튼튼한
복음의 끈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지치지도 않고 힘겹지 않도록
꼼꼼하고 세심한 주님의 천사가 함께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내 힘이나 내 능력이 아니라
강한 그분의 손길이 이끌어 도우실 것을 믿기 바랍니다.
온 종일,
매사에
성령의 끈에 묶여
꼼짝없이
그분의 명령대로 지냈던 필리포스의 기쁨을 얻기 바랍니다.
더 질긴 복음의 끈에 묶여
그분의 이끄심에
온 삶을 맡기는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하늘의 이야기, 땅의 이야기 /반명순 수녀님
그분은 자신의 아파트와 평수에 대하여 장황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마 전까지 어느 구의 몇 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다가 지금은 다른 구의 아파트로
이전했는데, 그곳 사람들은 반상회도 호텔에서 하더라.’고 했습니다.
성긴 제 눈빛이 마땅치 않았는지 “수녀님께서 저를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그 한마디가 더 모호 했습니다.
세상은 한 사람을 이해하는 척도로 재화의 수치를 내놓지만,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척도는 생명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얼마나 생명을 키워가며,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그 사람의 품격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재화는 안락함, 편리함, 유용함을 주는 반면에 생명력을 잃게 합니다.
생명을 얻는 일은 단순하되 불편하고(일회용), 작은 일이건만 부담스럽고(세제 사용 절제),
자연스럽지만 귀찮은 일(분리수거)입니다. 그러나 나의 불편함과 부담스럽고 귀찮은 일이
자연 질서를 바로잡고, 누군가를 배려하는 일이라면 무시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화장실에서 두 번 사용하는 물의 양이면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서는
두 가족이 하루를 살 수 있는 물이라는 신문기사를 읽고 난 이후부터
물을 펑펑(?) 쓸 수 있는 것 자체가 죄스럽고 마음이 아렸습니다.
말씀과 약속의 땅에 머무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무엇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
그분을 믿는 누구한테나 영원한 생명을 준다면, 그 ‘살아 있는 빵’을 먹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생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묵상해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이
같은 의미로 전달될까요? 제가 성심을 다해 하늘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분은 열정을 다해 땅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 갈 수 있으며
생명의 빵을 들고도 그것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겠습니까?
말만 하지 말고 /송영진신부님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 6,49-50)."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를 탈출한 첫 세대는
여호수아와 칼렙을 제외하고 모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지도자 모세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첫 사제 아론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버림받고 멸망한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칼렙 외에는 모두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모두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들을 생각할 때,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너희 조상들 중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한 자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는 은총 속에서 살았으면서도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했다.' 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만나를 깎아내리는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만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양식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의 생존을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늘에서 내려온(하느님께서 주신) 양식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먹는다고 자동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배반자 유다가 좋은 예입니다.
유다도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과 포도주를 다 받아먹었지만
그는 끝내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다시 해석하면,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은
'만나를 먹은 사람들 중에도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은 사람은 멸망했다.' 라는 뜻이 되고,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라는 말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께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만나'와 '생명의 빵'을 대조하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그것은 유대인들의 구약시대적 사고방식과 신앙생활을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상에서 하느님의 복과 은총을 받았으니
구원이 보장된 것이라고 자만하는 유대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뜻을 바로 알고 실천하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
자기들이 정한 규정만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지상의 부귀영화만 생각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바리사이들 같은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껍데기만 꾸미고 알맹이는 소홀히 하는 신앙생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책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과 성경을 늘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매일 미사 참례하고 영성체를 해도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으면
그것은 위선이고, 바리사이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성사를 행하는 사람의 성덕과 상관없이 성사 자체에 은총이 있다는
'성사의 사효성' 교리가 있습니다.
만일에 어떤 사제가 정말로 미사를 집전하기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미사를 집전했다면?
그래도 어떻든 미사는 미사로서 유효합니다.
그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에게는 미사의 은총이 전달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제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자, 똑같은 이치로, 미사 참례를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참례를 하고,
영성체를 안 하면 남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억지로 영성체를 했다면?
입만 열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당선되면 유권자들을 향해서 큰절을 하는 정치인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과 큰절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이 정말로 국민을 사랑하고 존경하면 그딴 식으로 정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백성들에게 '사랑하는 백성들아' 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분이 백성들을 정말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입니다.
생명의 빵이 생명의 빵일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생명력 때문인데,
아무리 말을 잘해도 마음이 따르지 않으면 생명력을 먹을 수 없습니다.
빵만 먹고 생명력을 먹지 않으면 그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믿음 /박민서 신부님
아버지께 완전하게 신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완전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주 작은 꼬마가 엄마가 사주신 새 옷을 입고 밖에 나가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온 아들의 모습을 보고 엄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의 모습은 손과 발은 물론 새로 사준 옷마저
온통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순간 엄마는 속상하고 화가 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엄마를 보며 아들은 해맑은 모습으로 엄마를 향해 웃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변하지 않을 엄마의 사랑을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의 그 마음을 느끼고 아들을 꼭 안아주며
자신 안에 샘솟는 아들에 대한 큰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알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변함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이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한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쌓이고 다져지는 대지와 같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매 순간 실천하게 되면
더 깊은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감사만 하기에도 모자란 인생 /김우정 신부님
언젠가 부모님의 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자녀들을 키우느라 고생하시며
마음속에 있는 많은 고민과 어려움을 남몰래 짊어지신
부모님의 손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것도 모르고 투정과 응석만 부렸던 것을
돌아보면서 ‘그때는 내 생각만 했구나.’ 하고 뉘우칩니다.
사제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있다 보니 부모님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누군가를 이끄는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 자리에서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그것을 이해해 주지 않거나 무관심하다 해도
묵묵히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껏 그렇게 해왔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바라보던 입장과는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때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부모님의 손에 굳은살이 박혀 있듯이 그분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어 주신 못자국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헌신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그분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그분의 눈에 아직도 우리는 응석받이입니다. 때문에
그분은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시면서 우리 곁에
묵묵히 서 계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성당에 가면 우리는 하루 종일 잠들거나 눈도 감지 않으시고
감실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모든 것을 들어주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드려야 합니다.
감사하기에도 모자란 인생이고, 감사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입니다.
그런데 때로 다른 것을 넘보고 주님께 불만과 답답함을
표시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 대신에
다른 것을 자꾸만 넘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늘을 알아보는 방법 /임준기 신부님
우리는 흔히 잘못된 기대와 생각을 ‘선입견’이라 말합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기만의 생각과 기대는 결국 진실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실수를 범하게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그들이 보고 있는, 그리고 그들이 잘 알고 있는
평범하게 생긴 예수님 같은 분이 아닐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잘못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집 때문에,
그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그들은 구원의 진리를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하느님이 땅으로 내려올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가운데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과연 알아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익숙한 얼굴의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하느님의 현존을 일깨우는 하느님의 ‘메신저’로서
우리 가까이에 와 있는 하느님의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이 진실을 깨우칠 때 우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그리고 ‘예수님의 살이 생명의 빵이 됨’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릴 때 /양승국 신부님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는
한 형제분이 계십니다. 저보다 나이는 많으시지만
오랜 친구와도 같은 편안한 분인데,
한마디로 천사표입니다.
"오늘 시간 되시면 한 잔 할까요?"하고
물으면 한번도 "오늘은 바쁜데" 하고
거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남 가슴 아파하는 것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기에 그분 월급에서
술값으로 지출되는 돈이 상당했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상(喪)이라도 당하면
그분은 그야말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팔을 걷어붙이고 덤벼듭니다. 그러다 보니
이웃이나 직장동료들 가운데 그 누구라도 그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들 그분과 한잔하고 싶어하고
그분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합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많이 배웠다든지 말주변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재산가도 아닙니다. 외모가 빼어난 것도 아니고
빽이 든든한 사람이어서 줄을 댈만한 사람도 결코 아닙니다.
그런 그분 "인기"의 비결이 무엇인가 유심히
관찰해봤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그저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인 사람, 만나면 편안하고 포근한
사람이기 때문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
술좌석 바로 앞에 앉아있는 내게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고 나를
가장 존중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괴로워서 다가갈 때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찾아갈 때마다
그저 말없이 등을 두드려주는 그분을 통해
저는 하느님 자비의 한 측면을,
그리고 천국의 한 순간을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그분은 우리가 죽을 것만 같아
찾아갈 때마다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며 우리의
어깨를 감싸주시는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끝도 없는 고통 그 한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한 감미로운 휴식처가 되어주시는 분,
우리의 갈증을 다가갈 때마다 원 없이 채워주시는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God's Project /김찬선신부님
어제와 오늘의 사도행전은 많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스테파노의 사건으로 주님을 믿는 무리는 흩어지게 됩니다.
기업으로 치면 파산이고
공동체로 치면 해산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적 공동체는 깨지고
사람들은 뿔뿔이 헤어집니다.
망했습니다.
끝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루살렘이 망하니 디아스포라,
즉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생겨납니다.
인간이 도모한 것을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으로 바꾸십니다.
마치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형제들의 시기질투 때문에 요셉이 팔려간 것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원 계획으로 바꾸심과 같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필리포스 얘기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필리포스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인간적인 삶의 근거를 잃고
인간적인 관계도 다 끊어졌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왜 가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쫓겨나고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의 인도로 갈 뿐입니다.
이렇게 하느님만이 모든 이유가 되었을 때
하느님의 계획(God's Project)이 열립니다.
유력자 간다케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관계를 엮으시고
그를 통해 더 큰 일을 더 폭넓게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스테파노의 사건은 또 다른 하느님 계획의 시작입니다.
이 일에 가담한 사울을 당신 계획의 도구 삼으십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성공한 것이 오히려 잘못 되는 수도 있고
망한 것이 성공의 시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독서> : 믿음과 열정으로 충만한 기쁨을 누린 내시 /경규봉 신부님
필립포스는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예루살렘에서 가자(예루살렘 서남방향
약 7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내려가는 길을 가던 중에 에티오피아(검은 피부란 뜻)
여왕의 내시로 왕실 재정을 담당한 고관을 만난다. 그는 내시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일원이 될 수는 없었지만 유대교를 독실하게
믿는 사람으로서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먼 길을 순례하러 왔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유대교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는가를 잘 드러내준다.
신심 깊은 그는 마차 안에서도 이사야 예언서를 큰소리로 읽고 있던 중에
필립보를 만났다. 그는 필립보를 자신의 마차에 오르도록 권유하여
필립보로부터 성서 말씀과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필립보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쁨이 충만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
에티오피아의 내시는 이방인으로서 아마도 흑인이었고, 거세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하느님을 굳게 믿는 사람
이었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본국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가 대단히 멀음에도 불구하고 순례하였다.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믿음이 컸던 것이다. 그는 순례하는 길에서도
예언서를 큰소리로 읽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자 하였다.
이처럼 그는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믿음과 열정을 어여삐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소중하게 여기셔서 필립보를
보내셨다. 그로 하여금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세례를 받도록 하심으로써 그를 구원하시고, 그에게 충만한 기쁨을 주셨다.
이처럼 주님을 통한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된 내시는 아마도
본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며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겉을 보지 않으시고, 그 내면을 보신다. 그의 지위,
가문, 재산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내면에 있는 믿음과 사랑, 열정을 보신다.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믿음과 열정을 지닌 사람을 사랑하신다.
당신께 믿음을 두고, 당신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 말씀으로 사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아니,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사는 깊은 신앙인, 하느님께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체험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로마 3,22)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로마 4,5)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하느님께 드릴 공덕이 없을지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살아감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구원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자.
생명의 빵은 곧 그리스도의 성체(聖體)다 /박상대 신부님
어제 복음(35-40절)과 오늘 복음(44절-51절)을 함께 보면
바로 연결되지 않고 41-43절이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빠진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이 때 유다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냐?'"(41-43절) 하시고는 44절의 말씀을 계속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요한복음사가가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을
'군중' 대신에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다시 한번 유다인들로부터 총체적인
불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유다인들이 '생명의 빵'에 불신을 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 그 빵을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이다.(34절)
따라서 그들의 불신은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예수 자신에 있다.
예수 주위의 군중들은 거의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와 그의 부모를 모를 리가 없다.
동시에 이들은 '위로부터 난 적이 없기 때문에'(요한 3,3 참조)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는 말씀의 참뜻을 알 리가 없다.
하느님의 복음 앞에 인간의 태도는 늘 그렇듯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하는 점이 문제이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의 가문이나 출신, 혈연이나 학벌 등으로
그를 다 안다고 해버리는 인간의 태도가 늘 걸림돌이 된다.
그들은 예수께서 20년 이상 목수의 아들로서 두 손안에 쥐어진 연장을 통하여
땀 흘리며 하느님께 바쳐진 시간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들 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의식(自意識)을 키워나갔으며,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되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적(神的) 출처를 밝혀 유다인들의
'못마땅해하는 마음'을 채워주시기 보다는 이를
일축(一蹴)해 버리시고 하느님께로부터 배움을 받도록 권고하신다.
상당히 논리적이지만 풀리지 않는 신비(神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믿음행위와 하느님의 선택의 관계이다.
우리는 어제 복음을 통하여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행위'와 '
그 사람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 주시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정립하였다. 이 점을 예수께서는 다시금 강조하고 계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44절)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그 인간의 가까이 또는 내심(內心)에서 그를 불러주셔서
하느님 생명의 공동체로 이끌어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시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움직여 주시면, 인간은 동시에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은 예수께 대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믿음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의지적 결단인 동시에 하느님의 선택적 선물인 것이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45절)
일단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로 오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47절)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시며(48절), 이 빵을 그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빵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간 그런
만나와 같은 빵이 아니라 먹으면 죽지 않는 빵이다.(50-51절)
이 빵은 바로 예수님의 살이요, 하느님의 거룩한 몸이요, 성체(聖體)인 것이다.
세상은 늘 자기들 방식대로 빵을 찾아왔다. 태초의 인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육체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빵을 먹어야 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영원히 세상의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빵을 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
모든 죽음은 결국 육체의 생명을 영위할 세상의 빵을 더 이상 못 먹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도 세상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선사되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聖體)인 것이다. 성체는 세상의 빵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세상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체를 받기 위해 우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나아가 이 성체는 '찾는 것'이 아니라 '추구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잠시 접었던 파라솔을 펼치듯이 /양승국 신부님
수도원을 오르는 언덕길이 ‘환상’입니다.
왼쪽으로는 샛노란 개나리가, 오른쪽으로는 벚꽃이 만발해,
마치도 천국으로 오르는 언덕길 같습니다.
‘열흘 붉은 꽃 없다’고, 이 절경도 잠깐이겠지요.
벌써 수많은 꽃잎들이 잠깐 내린 비에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 한결같지 않다는 것,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아쉽고 안타깝지만
이 세상 것들이 지닌 특징입니다.
절정의 나날에 그 화사했던 얼굴들이
며칠가자 빛을 바랩니다. 유한하기 그지없는 세상
것들의 형상을 바라보며 드는 한 가지 생각은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입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이처럼 속절없이
눈 깜짝할 순간에 세상 것이 사라진다 해도,
주님께서는 잠시 접었던 파라솔을 펼치듯이, 또 다시
희망으로만 가득 찬 우리의 하루를 활짝 펼치십니다.
결국 그분 안에서 우리의 인생은 매일이 새 출발이요,
매일이 절정이요, 매일이 천국입니다.
결국 영원히 시들지 않는 것,
끝까지 청청하게 남아있는 것, 언제나
살아있는 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뿐입니다.
꽃그늘 아래서 세상을 바라보니 온천지가 천국입니다.
때로 미워보이던 형제들도 한 송이 꽃처럼 어여뻐 보입니다.
마찬가지겠지요.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은총일 것입니다. 고통과 십자가,
죽음조차도 축복으로 변화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분께서 매일의 미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양식을 먹고
세상을 향해 길을 나서면
세상이 온통 꽃길일 것입니다.
그분께서 매일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그분의 몸을 영하고
이웃을 바라본다면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천사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멋진 선물을 해주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를 성체성사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 지상에서 그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생명을 주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체 모시는 올바른 방법 /이세영 수녀님
여기 두 할머니의 식사 모습을 통해
성체를 모시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한 할머니는 깨끗한 환경에서 식사하길 원하지만 늘 파리가 날아옵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파리를 쫓아내고 식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파리를 따라다니다 보면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지, 밥을 먹으려 했던 목적도 잊어버린 채
정신없이 파리만 쫓습니다. 하지만 날쌘 파리는
둔한 할머니의 손에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파리만 쫓아다니다 밥을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할머니는 파리가 가까이 와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파리가 또 날아와도 할머니는 식사에만 열중합니다.
이렇게 날아오는 파리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식사를 잘한 할머니는 건강을 유지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열심하다고 하는 신자들은 분심·잡념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고 싶어합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분심·잡념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분심·잡념을 없이하는 것에만 열중하면 오히려
첫 번째 할머니처럼 성체를 올바로 모실 수 없습니다.
날아다니는 파리에 연연하지 않은 채 여유 있고 기분 좋게
식사를 다 하는 두 번째 할머니처럼 분심·잡념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지나가도록 기다리는 여유를 가지고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해꾼으로 등장하는 분심·잡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오히려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빵으로, 살아 있는 빵으로 내게 오시는 예수님만을 생각하며
그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 여유로운 마음으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성체를 올바로 모시는 방법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내가 줄 빵은... /오상선신부님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참으로 기가 막히다.
주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고
장엄하게 선언하시더니
이제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고 천명하신다.
아,
나는 무엇을 줄 것인가?
내가 나누어 줄 빵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줄 빵은 지식이다?>
아니다.
<내가 줄 빵은 위로이다?>
그것도 아니다.
<내가 줄 빵은 평화이다?>
더더욱 아니다.
<내가 줄 빵은 돈이다?>
천만에 올시다.
<내가 줄 것이라고는...
<내 몸뚱아리 하나 뿐이다!>
그렇다!
이것이 정답이다.
다른 모든 것은
이 하나 뿐인 내 몸뚱아리를 내어 놓음으로써
뒤따라 나오는 결과일 뿐이다.
오늘은
비록 건강하지는 못하지만
튼실하지는 못하지만
힘이 좋지는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내 몸뚱아리를
한번 온전히 내어 놓아보자.
몸을 사리지 말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
먼저 온 몸으로 주님을 사랑하자.
주님의 작품인
이 썪어 없어질 몸뚱아리로 말이다...
예수님께 나아감 /노성호 신부님
처음으로 부임한 본당에서 저는 공교롭게도 첫날부터
장례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교우들의 환영과 축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
장례미사가 있어서 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 속에서 첫 부임지 첫 미사를 집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사 중에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복음 말씀을 읽게 되었는데 그 순간 저는 제 앞에
누워 계신 그분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그분은
주님께 나아갔을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분을 받아주셨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첫 부임지의 첫 미사는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깊이 깨달으며 그분과 함께한 은총의 시간이었고, 제가 그분의
도구로서 누군가의 영혼을 살릴 수 있었던 소중한 날이었습니다.
생명과 부활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누구의 영혼도 그냥 그렇게 끝나기를
원치 않으시니 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신 그분께서
오늘도 세상에 새 생명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그분께 나아가야겠습니다.
나의 구원자 /김유철 신부님
믿음은 아무나 다 갖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6,44)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어느 노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유일한 소원은 할아버지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수십 년간 계속된 간곡한 부탁에
할아버지는 마침내 믿음을 갖기로 약속하고 예비신자 교리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교리를 듣더니 그 다음부터는 안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의 오른쪽에 있던 강도가
마지막에 회개하자 예수님이 천국에 제일 먼저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미리 신앙을 가지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못하게 되고,
죄를 많이 지으면 천국에 꼭 들어간다는 보장도 없게 되지만, 할 것 다하다가
우도처럼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하늘 나라에 확실히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의 모든 생활을 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험에 가입하는 것처럼 안전장치 하나 만들어둔다는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생활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생활로 바꾸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어떤 생활 자세를 좋아하는지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노력을 기울입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김정원 신부님
요한 복음에 나오는 7가지 기적 중에서 첫번째의 3가지 기적,「물이 포도주가 됨」,
「고관의 아들 치유」,「병자 치유」는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4번째 기적인「오천 명을 먹인 기적」은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협력을 예증한다.
그리스도는 빵을 들고 사례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제자들은 군중에게 빵을 먹였다.
구원과 모든 은혜가 주님께 속하였지만 주님은 복음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인간이라는「도구」를 사용하신다.(롬10,14)
한편 나머지 3기적은 구원의 결과로서 평화(폭풍우를 잠잠케 함), 빛(소경의 치유),
생명(나자로의 소생)을 보여 주고 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말마디는「살」(肉)이라는 말이다.
이것은「싸르크」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복음이 사도 바오로(고전11,24)의
경우와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이 두 경우의 몸은「싸르크」가 아니고「쏘마」인 것이다.
「쏘마」는 부활의 몸(身)을 전제로 하는 몸(身)이라고 한다면,「싸르크」는 고기덩어리(肉)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요한 복음이「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고 했는데, 이것은 빵이 곧
예수의「살」(肉)이라는 것으로 우리는 알아 들어야 할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놓고 지극히
현실적으로 알아 들으려고 했음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그는「빵의 기적」(요한6,1-15)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빵과 고기」(민수11,) 를 연상했을 것이다. 민수기 11장에
나오는「고기」이야기는 히브리 사람들의 원망, 불평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도 다시 우는 소리를 했다. "아, 고기 좀 먹어봤으면..."」(민수11,4)
여기서 일러지는「고기」라는 말은「바사르」라는 말이다. 이것은「고깃덩어리」(肉)을
의미한다.「기적의 빵」이 하느님의 새 백성에게 줄「양식」의 표지라고 한다면,
역시 예수의「살」(肉)도 사람들을 살리는「생명의 양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쏘마」라는
말 대신에 특별히 요한 복음에 있어서「싸르크」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기적의 빵」
이야기를 불러 일으키면서, 특별히 어떤 목적을 드러내려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6,52) 여기서 유다인들은 41 - 42절에서처럼,
예수 말에 시비를 건다. 그러나 예수는 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는다.
예수는「어떻게?」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을 하지 않는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6,54)
여기서 우리는 47절을 연상할 수 있다.「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6,47)
그러니까,「신앙」과 그리스도의「살」을 먹는 것은 같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여기서 우리는 말씀과 성사(sacrement)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에 의해서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聖事)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두 가지 수단인 것이다.
「내 살을 먹는다」(6,54. 56. 58)는 말에서 우리는「트로게인」이라는
말마디를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 말은「씹는다」,「저작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먹는다」는 말을 너무 영적인 것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6,55)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말씀(요한1,1-4)이다.
한 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은 곧 살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 말씀을 먹고,
「살」(肉)을 먹는 것, 그것은 생명을 간직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새로 태어나는 것(요일5,18 베전1,23)이며, 하느님의 능력(고전1,24 롬1,16)을 입는 것이다.
말씀이 없다면 성사(聖事)는 형식화 되고 만다.
개똥과 주님 /김찬선신부님
어제 말씀 나누기에 강론을 올리고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새벽 묵상을 성체 앞에서 하는 대신 뒤뜰에서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도 잃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아서
저는 이 뒤뜰에 있는 꽃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다 볼 거라 마음먹었습니다.
여기저기, 구석구석의 모든 나무들과 식물들이
감나무 한 그루와 모과나무 외에는
모두 꽃이나 싹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내 집에 이렇게 귀한 꽃들을 놔두고
멀리 구례나 하동으로 꽃구경 간다면
이것은 우리 꽃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소홀히 본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아무리 다 보아도 빠뜨릴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안개꽃 같은 이름 모를 꽃에서부터
동백꽃과 벚꽃까지
꽃뿐 아니라 모든 싹까지 샅샅이 훑으니
그 꽃들이 내 꽃이 되어 사랑스럽고
내 꽃은 하느님 꽃이 되어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오후는 제가 영적보조를 맡고 있는
토마스 모어 형제 회 화곡 구역 할머니들을 찾아뵈었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한 번도 월례회에 나오지 못한 분들,
그래서 제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들을 찾아뵈었더니
할머니들께서 그렇게 좋아하시고 고마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찾아 만나 뵈니 이름도 모를 할머니들이
소중한 저의 어머니들이 되시고
저는 할머님들께 좋은 일을 한 기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도 잃지 않고 다 살리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하루 종일 저의 묵상거리로 이어졌는데
하나도 잃지 않을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는 말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잃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그 지극한 정성과 사랑이 고맙고
마지막 날까지 결코 포기치 않으시고 마침내 구하시겠다는
그 끈덕지고 집요한 사랑이 느껴진 것입니다.
그런데 고맙기는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하는 질문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역시 믿음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될지 회의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리고 끝내
주님도 어쩔 수 없는 잃은 양이 될 것이고
믿는 사람은 언제고 주님께서 되살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복음에서는
당신을 보고 믿기만 하면 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셨고
오늘 복음에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에게만이 빵이 성체가 되고
성체가 생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두고 우리는 한 번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개똥도 약으로 쓸려면 없다고
자기의 운 없음을 넋두리하고
그 보잘 것 없는 것도 자기 필요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남 탓을 하는데
정작 생명의 빵으로 옆에 대기하고 계신 주님을 몰라보고,
필요치 않다 하는 우리의 불신을 봐야 합니다.
내 집의 꽃들은 팽개치고 멀리 가서 꽃을 찾는 나,
내 옆에 늘 계신 주님은 평소 개똥처럼 팽개쳐두고
썩어 없어질 빵이나 찾는 불신의 나는 아닌지
오늘 아침도 성찰해 봅니다
영혼의 곡기 /양승국신부님
임종환자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곡기(穀氣)’의 중요성을 실감합니다. 특히
노환으로 인해 임종이 가까워진 어르신들, 어느 순간까지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도 숟가락으로 미음을 떠서 입 가까이 가져다 드리면 어렵사리 드시곤 하십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숟가락을 가져가도 입을 꽉 다무십니다.
고개를 저으십니다. 곡기를 끊으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체력은 급격히 저하됩니다. 에너지 공급이 안 되다보니
건강은 순식간에 악화됩니다. 의식도 점점 몽롱해집니다. 그리고는
며칠 못 넘기시고 임종을 맞이하십니다.
‘곡기’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건강한 우리들에게 있어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것 별 일 아니라고 생각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은혜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소화기능이 약하신 분들 가운데 죽 한 그릇 앞에 놓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실랑이를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먹고는 싶은데 몸에서 안 받는 분들
그분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삼시세끼 잘 먹어줘야 흡수된 음식물이 에너지로 변환되어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도 며칠 밥 못 먹으면,
곡기 끊으면 그길로 내리막길이요, 황천길입니다.
‘육신의 곡기’도 이처럼 중요하지만
‘영혼의 곡기’는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육신의 곡기’는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특A급’으로 챙기지만,
‘영혼의 곡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영성생활에도 곡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곡기란 다름
아닌 성경말씀과 성체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성경말씀을
꼭꼭 씹어 드셔야만 합니다. 매일 무상으로 우리에게
건네지는 성체를 지극한 정성으로 받아 모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성경말씀과 성체로부터 멀어진다면, 마치도 곡기를 끊은 임종환자처럼
생명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고사상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말씀과 성체와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쩌면 그는 살아있어도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영혼의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은 우선 재미가 없습니다.
세상만사가 시시합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많은
감사거리 앞에서도 매사에 불평불만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살기를 원한다면 영혼의 곡기를 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
떻게 해서든 삼시세끼 밥 먹듯이 지속적으로 영혼의 곡기를 드셔야만 합니다.
성경 말씀과 성체 중심의 삶을 통해 우리 영혼은 깨어날 것입니다. 진정으로
숨 쉬게 될 것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참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11.5.1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사도8.26-40 요한6,44-51
참 자유인 /이수철 신부님
아버지의 자녀로 예수님의 형제가 되어 살 때 참 자유인입니다.
공동체에서 갈고 닦여 자유로워진 수도자들을 대하면, 흡사
흐르는 물결 속에 동글동글, 둥글둥글 갈고 닦여
빛나는 조약돌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좋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필연이요 운명입니다.
하느님의 뜻입니다. 지난 일을 뒤돌아보며 ‘만약…했었더라면’
가정법의 상상들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알게 모르게 당신 최선의 방식으로
오늘 이 자리까지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께서 알게 모르게 은총으로 예수님께 이끌어주셨기에
하느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형제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형제애에 철저한 자각이 서로에 대한
존중과 감사, 겸손의 원천입니다.
오늘 1독서의 에티오피아 여왕 칸타케의 내시가
주님의 사람, 필리포스의 인도에 따라
세례를 받아 주님을 만나 주님의 공동체에 편입됩니다.
그대로 복음 말씀의 성취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필리포스를 통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
세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형제가 된 카타케의 내시입니다.
구약에서 내시(고자)는 공동체에서 제외되었습니다만
아버지의 인도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형제가 됨으로
새 공동체에 속하게 된 칸타케의 내시입니다.
엠마오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두 제자를 이끌어
당신께 인도하셨듯이 칸타케의 내시를 당신 자신에게로
이끄시어 참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표지가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바로 매일 미사 중에 주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 우리를
참 자유인 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성령 따라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았던 필리포스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의 체험으로
필리포스처럼 주님의 살아있는 현존이 될 때,
만나는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다음 말씀이 오늘 복음의 백미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미사 때 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생명의 빵인 성체를 모실 때
영원한 생명을 얻어 자유로운 삶입니다.
믿음과 희망, 사랑의 결정체가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인
주님의 성체입니다.
생명의 빵인 성체를 모시는 것보다
더 큰 감격도, 큰 축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매일의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참 자유인이 되어 살게 합니다. 아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강영구신부님
당신은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어떤 기도를 바쳤습니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늘도 좋은 인연으로 예수님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제가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인 줄 알겠습니다.”
우리 인생살이는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그 명운(命運)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늘나라(天國)를 누리고,
어떤 사람은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나서 지옥(地獄)을 살게 됩니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닐 돌멩이도
눈 밝은 수석(壽石) 애호가를 만나면 귀한 돌로 대접받지만,
아이들 발길에 이리저리 차이는 신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심히 내버려질 바위도
훌륭한 조각가를 만나면 ‘다비드’상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토록 만남과 인연은 소중합니다.
예수님의 겉모습은 나자렛의 목수출신
떠돌이 랍비에 지나지 않지만,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14,6)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인연이자 축복입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늘 자신을 비우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진리의 길을 걸어서 생명에 도달합니다.
당신의 오늘이 예수님을 만나서
하늘나라를 누리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Tantum Ergo in A major, Op.55(지존하신 성체), Fa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