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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하늘 원문보기 글쓴이: 우가희
재미있는 시평
신광철
내 몸에 짐승들이
권대웅
늑골에 숨어살던 승냥이
목젖에 붙어있던 뻐꾸기
뼛속에 구멍을 파던 딱따구리
꾸불꾸불한 내장에 웅크리고 있던 하이에나
어느 날 온몸 구석구석에 살고 있던 짐승들이
일제히 나와서 울부짖을 때가 있다
우우우 깊은 산
우우우 울고 있는 저 깊은 산
그 마음산에 누가 절 한 채 지어주었으면
살아 꿈틀대는 듯한 시
한 사람의 몸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몸무게는 다 해야 100킬로그램을 넘지 않습니다. 그 작은 체구에 담긴 욕망의 크기는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산도 들어있고, 산을 몇 개나 품은 산맥도 들어있습니다. 때론 유장한 강도 들어있고 강과 같이 흘러가는 세월도 들어있습니다. 사람의 속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그러한 인간 내면의 세계를 잘 그려낸 시가 한 편 있습니다.
우선 언어가 살아 꿈틀거립니다. 단어가 식물성인지 알았더니 동물성이었음을 알려주는 글입니다. 좋은 시를 만나면 왜 내가 쓴 듯이 좋아하는 걸까요. 육체가 가진 근육이 느껴지는 시에서 살을 비집고 날아오르는 새가 떠오릅니다. 참 시가 좋습니다. 그 육체의 욕망과 탐식으로 살아가는 육체에 성전을 지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악, 하고 죽어도 좋으리라. 아마 그 순간이 각성, 깨달음의 순간이리라 싶습니다. 살아있는 짐승, 인간을 만나서 각성이 그리워지는 오늘, 행복합니다.
사람의 내면에 여러 가지 동물의 욕망이 다 들어있습니다. 발상이 아주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늑골에 숨어살던 승냥이
목젖에 붙어있던 뻐꾸기
뼛속에 구멍을 파던 딱따구리
꾸불꾸불한 내장에 웅크리고 있던 하이에나
이러한 동물들이 작은 몸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상상력이 얼마나 기발하고 독특합니까. 욕망이란 것들을 동물로 환치해서 몸속에 넣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들고 일어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생명 있는 것들이 날아오르고, 포효하면서 들고 일어나 감당하기 어려운 욕망에 사로잡힐 때가 있지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하늘 아래 땅을 조각내서 자기 것이라고 등기까지 합니다. 새가 먼저 주인이었고, 들고양이가 먼저 자리 잡은 땅이었고, 한 때는 공룡들의 놀이터였는데 그것이 내 땅이라며 소리치고 있는 것이 사람이지요. 바람이 스쳐가며 웃을 것입니다. 구름이 지나가며 비를 뿌립니다. 소유를 주장하는 땅에도 바람이 불고 구름이 지나가다 비를 뿌립니다. 너희는 유한하리라. 이렇게 외치며 지나가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오늘도 소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가 가진 무게나 면적은 실로 보잘 것 없는데 욕망의 크기는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어느 날 온몸 구석구석에 살고 있던 짐승들이
일제히 나와서 울부짖을 때가 있다
그렇습니다. 몸 구석구석 숨어 있던 짐승들이 뛰쳐나와 울부짖을 때가 있습니다. 절제되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참 힘들지요. 난감하거든요. 욕망의 높이만큼 힘들어지지만 그 높이가 너무 가팔라서 힘들어지는 게지요.
저는 권대웅이라는 시인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고는 눈에 띄었습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시였습니다. 자료를 뒤져보니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제법 알려진 노래가사를 쓴 주인이기도 했습니다. <가시나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이 있었습니다. 헌데 저는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김광석이 부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은 한참을 배우려 노래를 반복해서 듣곤 했었거든요. 그럼에도, 권대웅이라는 시인은 처음 만났습니다. 허긴 제가 아는 시인이라야 몇 되지 않지요. 문학모임이나 행사에 나간 적이 거의 없으니 더욱 그러합니다.
제가 쓰는 시는 제가 미쳐서 하는 일이니 남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가 별 의미가 없거든요. 정말 이 시를 만나고 나서 흐뭇한 마음이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하는 것이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욕심이었지요. 욕심의 크기만큼이 불만이었고, 불만의 크기만큼이 아픔이었습니다. 인생이 고행인 것은 원초적인 것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생래적인 부분은 아주 드물었고 끝없는 욕망의 애드벌룬 때문이었습니다. 출세, 성공, 돈과 명예 그리고 소유에 대한 욕망의 크기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큰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람에게서 소유에 대한 욕망을 줄일 수 있다면 아주 품위 있게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창고를 가지고 있는 동물은 아주 드물지요. 거기에다 냉장고를 가진 동물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김치 냉장고를 더 마련하더군요. 옷을 입은 동물도 없는데 그것을 관리해주는 세탁기까지 마련하고 삽니다. 너무 막 나가는 경향이 있지요. 어찌되었든 소유에 대한 집착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
이 집착을 줄이면 타협을 할 필요도 없고 구걸을 해야 할 일도 없습니다. 소신껏 살 수가 있습니다. 쉴 곳과 먹을 것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음악을 들으며 쉴 수가 있습니다. 음식을 나누며 웃음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면 몸에서 우는 소리가 나는 게지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비교하기 때문이지요. 욕망의 실현이 문제가 아니라 다시 비교하려는 욕망의 재생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게지요. 더’라는 말이 앞에 수식어로 붙어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옷, 더 높은 자리, 더 좋은 대학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사실 별거 아닌 걸 가지고 우리는 확대 해석하고 있는 셈이지요. 한 마디로 우습지요. 비교우위에서 사람들은 웃고 울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절대적인 부족이 아니라 남보다 앞서야 된다는 의식이 자본주의에서는 앞질러 가버린 형세지요.
메이커, 명품이라는 상품명이 바깥에 붙는 우스운 일이 벌이지고 있지요. 언뜻 잘못 보면‘나는 어느 회사제품의 사람’이라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피에르 가르뎅’이라는 명이 붙은 옷을 입고 있으면 피에르 가르뎅이라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의 유니폼이거나, 그 회사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저만의 생각인가 보지요. 다들 동의할 기색이 없어 보이니 말입니다. 이러한 욕망을 부채질하는 사회구조, 자본주의 구조 때문에 사람들은 휴일도 반납하고 명품을 선택하지요. 신발이나 옷, 그리고 집과 자동차가 효용성으로서의 구입이 아니라 <‘더’라는 욕망의 명품>을 찾아서 구입합니다. 그런 현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가슴에는 허망한 바람이 불고 그 바람 앞에서 울부짖게 됩니다. 어떻게 우느냐고요. 한 번 들어보실 랍니까, 권대웅 시인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시지요.
어느 날 온몸 구석구석에 살고 있던 짐승들이
일제히 나와서 울부짖을 때가 있다
우우 깊은 산
우우우 울고 있는 저 깊은 산
이렇게 운다는군요. 사람의 육체가 어느 순간 산으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동물들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육체였으니 산으로의 전환도 자연스러울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늑골에 숨어살던 승냥이 / 목젖에 붙어있던 뻐꾸기 / 뼛속에 구멍을 파던 딱따구리 / 꾸불꾸불한 내장에 웅크리고 있던 하이에나> 등이 모두 산 속에서 살아 산을 흔들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사람의 육체로 들어왔다가 다시 복귀한 것입니다. 시는 무한한 상상력의 소산이지요. 그래서 시인의 영혼은 자유로운 만큼 세속적이지는 못합니다. 꿈꾸는 영혼인 만큼 현실감각은 떨어집니다. 이는 몰라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산 속에서 울고 있는 짐승들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욕망의 하향이나 없애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은 깨달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깨닫게 되면 욕망의 부질없음을 알게 된다는 게지요. 시인은 울부짖는 짐승들의 소리를 잠재우고 싶어집니다. 욕망을 짐승들로 표현함으로써 거두어들인 효과는 큽니다. 우선 역동적인 힘을 느끼게 되지요. 그래서 꿈틀대는 듯한 시가 되었지요. 하지만 시인에게는 다릅니다. 내 몸에 살고 있는 짐승들을 다 데리고 살기엔 벅찹니다. 욕망을 잠재울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는 대단원의 막을 향하여 방향을 전환합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을 평화로운 안전지대를 만들어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마음산에 누가 절 한 채 지어주었으면
마음산에 절 한 채 지어 짐승들의 소리를 죽이고 고요히 안정을 가지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시가 참 힘이 있습니다. 헌데 <그 마음산에 누가 절 한 채 지어주었으면> 하는 마지막 연의 대전환에서는 향기롭기까지 합니다.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절이라는 의미가 주는 힘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시인은 참 적절한 곳에 절은 한 채 지은 셈이지요. 아쉬움은 시인 자신이 절을 지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누가 절 한 채 지어 주었으면> 하고 은인을 기다리고 있음에 있습니다. 시인은 조금은 소심한가 봅니다.
주제를 향하여 빨려드는 언어들
권대웅 시인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87년 「시운동」으로 등단했으며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었습니다. 지은 책으로 시집 <당나귀의 꿈>과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 때>, 장편동화 <마리 이야기>와 수필집으로 <하루>, <천국에서의 하루>, <당신이 별입니다> 등이 있다고 합니다. 시인이라기보다는 문학전반을 아우르는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권대웅 시인의 이력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 시로 권대웅 시인을 처음 대하게 된 것을 앞에서 고백했듯이 시인의 인생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소주 한 잔이라도 같이 했으면 훨씬 이 글을 이어가기가 쉬울 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시인을 알아보기 위한 정보로 시만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시인은 시에 몰두하지요. 열정과 시간을 투자해서 멋진 시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밤을 설치기도 하고 끼니를 잊기도 합니다. 소심한 사람들이지요. 글에 인생을 거는 것은 성을 쌓거나 정복전쟁을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소심하고 부질없는 것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에 열과 성을 다합니다. 몰입하기 때문에 시에 시인의 정신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푸른 하늘에 뿌려다오
구름을 닮은 날개와
추억을 닮은 눈동자
어울려 저녁별 살찌우는 양식이 되어다오
지상의 발걸음은 하찮은 것이었으니
육신은 껍데기뿐이었으니
거리를 배회하던 등불과 안개
오랜 늑골 깊이 쌓인 슬픔도 꺼내가 다오
내 심장의 씨앗과
내 뇌수의 고통 또한 파헤쳐 찬찬히 뿌리고 싶으니
세월의 머리카락과 붉은 잎 섞여 타오르는 들판
날아오르는 것들은 다 새가 아니라고
오, 날아오르는 것들은 다 환희가 아니라고
어두운 이 지상의 창문과 지붕 위
너의 눈을 빌어
너의 날개를 빌어
수천 갈래 흩어지는 숨구멍
공기 속을 흐르는 공중에 묻어 다오
<권대웅의 ‘내 몸을 새들에게’전문>
권대웅 시인의 시어는 강합니다. 강렬하게 주제를 향하여 접근하고 있습니다. 집착력이 강하거나 욕심이 보이는 성격일 것이라는 단정을 해 봅니다. 물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에 대한 강한 욕심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는 사람을 닮았습니다. 응집력이 있는 그리고 강한 단어의 선택과 단어들의 조합을 보면 권대웅 시인의 가슴 속는 그 무엇인가가 강하게 끓어오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선 이 시도 먼저 시와 같이 타력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마음 산에 누가 절 한 채 지어주었으면>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오랜 늑골 깊이 쌓인 슬픔도 꺼내가 다오> <공기 속을 흐르는 공중에 묻어 다오> 라면서 또 다시 다른 누군가의 힘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좀 전에 이야기한 강한 단어와 단어들의 조합에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어떤 바람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의지하는 습성이 보이고 있습니다. 상반되는 두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게지요.
<지상의 발걸음은 하찮은 것이었으니 / 육신은 껍데기뿐이었으니>라면서 이 세상에 대한 강한 부정을 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관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육체를 갖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인지 모르거든요. 꿈으로 이루어 놓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요. 육체가 개입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빚어진 것들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행동이 뒷받침되어지지 않으면 모든 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육체가 있고, 행위가 있어야 마음의 모습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뜨거운 키스를 할 수 있는 것도 육체를 통해서입니다. 누구에게 고마움을 표할 수 있는 것도 입술과 혀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성전을 쌓고, 세상을 느낄 수 있는 감촉과 향기도 육체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육체는 인생이란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첫 걸음인 셈이지요. 육체는 이 세상을 걸어가는 의미의 첫발자국이라고 우기는 사람이지요.
헌데 권대웅 시인은 저와는 반대에 서 있습니다. 삶의 관점에서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셈이지요. 저는 어느 별에선가 착한 일을 한 선물로 지구여행티켓을 한 장씩 가지고 엄마의 몸을 빌려 태어났기 때문에 인생은 축제여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이거든요. 권대웅 시인은 축제가 아니라 <하찮은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권대웅 시인의 시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 이야기는 접어야겠지요.
때로 슬픔이 밀려오면
바람 소리려니 하고 창문을 닫고
알 수 없는 쓸쓸함에 명치끝이 아파오면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그러려니 생각하며
<권대웅의 ‘민박’ 부분>
아주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권대웅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저절로 슬퍼졌다가 외로워졌다가 하게 하는 노래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슬픔이 왜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는 권대웅 시인의 시집을 읽고 어느 독자가 인터넷에 올린 글 중의 한 부분입니다. 시인의 생각은 바로 독자에게 전염이 되지요. 능력 있는 시인일수록 감염도가 높아지지요. 좋은 시인은 시로 독자를 시에 감염시켜 같이 웃고 울게 하는 것입니다.
권대웅 시인은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독자의 글처럼 슬퍼졌다가 외로워졌다가 하는 한 마디로 전체적인 기조가 슬픔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삶이 아파서 그런 것인지 시인의 글처럼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처하지 못하고 떠도는 행려의 기질이 발원한 곳을 보면 시인의 아픔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슬픔을 어찌할 수 없는 태생이라고 우기면 저는 할 말이 갑자기 없어지겠지요.
제가 욕심을 조금 더 부려서 기왕이면 세상에 대한 행복도 감염시켰으면 하는데 그것은 나중에, 아주 천천히 느껴지는 감동에서만 가능한가 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슬픔이 왜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일까>라는 독자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보면 쓸쓸해 보입니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색을 건너온 사람은 삶에 대해 무언가 허전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진단해봅니다. 삶이 원래 쓸쓸한 것이라 그런지도 모르지요. 삶이 축제라고 우기는 저 같은 사람도 쓸쓸함에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걸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더라도 시인의 웃음이 계면쩍고 어색해 보이는 것은 저만의 생각이라면 다행입니다.
권대웅 시인의 시를 우연히 만나 반가웠습니다. 저마다 가슴으로 빚은 시가 저마다 빛깔을 가지고 있지만 권대웅 시인의 시는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