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전(終戰)
AD552년 황제는 사람 다 죽이고 땅도 황폐해진 뒤에야 고트족과의 전쟁을 끝낼 생각을 했다. 사령관은 52살의 ‘벨리사리우스’가 아니라 70이 넘은 ‘나르세스’였다. 여전히 활력적인 그는 상황을 판단하고 준비를 갖춘 뒤
북부로 진격했다. 한 방에 끝내는 옛날의 會戰방식을 택했다. 그는 신참 야만족인 “랑고바르디 族” 을 훈련시켜 전쟁에 참가시켜 효과를 보았으나 그건 실수였다. 그들이 다음 이탈리아 반도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 랑고바르디족은 북 유럽계의 게르만족 일파로 롬바르드/Lombards라고도 불린다. 東고트 멸망 후 無主空山의 북 이탈리아에서 왕국을 세우고 200년을 넘게 존속했다. AD774년 지금의 프랑스인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 마뉴 大帝”에게 정복되었다. 현재의 밀라노/Milano를 州都로 하는 롬바르디아州가 이 이름에서 나왔다.
로마 문화와 게르만 문화의 융합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긴 턱수염”을 말하는 영어의 Long Beard가 이
부족의 특징으로 원어는 랑고바르드/Langobard 다.)
지휘관인 ‘나르세스’는 전에 언급하였듯이 환관 출신에다 직업군인도 아니지만 상당히 유능한 전술가였다. 양쪽이 본격적으로 맞붙어 치열하게 싸운 결과 적의 王인 ‘토틸라’가 전사했고 고트족 전사자는 6천명이나 되었다. ‘나르세스’는 승리하게 해주어 고맙다는 기도를 올렸다. 상대인 고트족도 일단은 기독교인 “아리우스”이지만 그들에게는 神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異端이었으니까.
“랑고바르디 족”은 고용료를 받고 고향으로 올라갔으며 가는 길에 신나게 약탈했다. ‘나르세스’는 南下해서
엉망진창이 된 로마 城으로 들어갔다. 한국전쟁의 막판 高地戰처럼 로마 성은 536년부터 552년까지 17년간
교대로 6차례나 점령군이 바뀌면서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세계 문명의 빛나는 별이었던 이 성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일단 후기 로마 통치자들이 버린 것이 1차적인 원인이고 西로마 통치자들이 또한 이를 버렸으며 西로마 멸망 후 철저히 버려졌기 때문이다. 17년간의 전쟁으로 15만에서 20만명이나 되던 고트족도 많이 시들었다.
그래도 다시 정비해서 새 왕을 선출하고 軍을 재편성했다. 고트족이 완전히 재기하는 것을 우려해서 6개월 후 역사적으로 유명한 베스비오 山 근처 평원에서 맞 붙었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새 왕도 전사하고 병사들은
항복한 뒤 자신들의 고향인 알프스 너머로 돌아갔다. AD553년 징글징글한 고트족은 일단 여기서 불이 꺼졌다. 이 전쟁은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마무리 한 것이 아니라 엉뚱한 전문가(?)가 끝냈다. 황제의 속을 참으로 모르겠다. 아마도 名將에 대한 견제와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 이탈리아의 죽음
고트족과의 피 터지는 18년간의 전쟁은 ‘벨리사리우스’의 비서 겸 친구인 역사가 ‘프로코피우스’가 상세히 저술한 『전쟁사/戰爭史』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을 이런 식으로 오래 끌며 진을 빼다 보니 찬란한 로마의 본체인 이탈리아 半島는 완전히 파괴되어 인구는 격감하고 토지는 황폐해졌고 부흥을 이끌 지도층도 소멸했다.(※ 옛날 카르타고를 다 태워버리고 소금까지 뿌려 가면서 멸망시킨 ‘스키피오’가 타오르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것은 나름대로 평정한 半島를 “대리통치”한 ‘나르세스’가 관료의 본색을 드러내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다. 그는 황제가 전쟁 때 쓴 돈을 아까워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정말 심하게 세금을 거둬들였다. 이런 인간은 오래 산다. 15년동안 그의 압제에 주민들이 시달렸다. 또 얘기하지만 도대체 누가 ‘유스티니아누스’ 를 大帝라고 했던가? 이런 결과는 이탈리아와 로마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는 짓이다. 야만족이
아니라 동포인 東로마 제국이 그 짓을 한 것이다. 그 증거로 요즘 역사학자들이 발굴하는 大農場=빌라를 보면 西로마가 멸망할 때도 존재했으나 그 이후 東로마의 압제 때 멸실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 벨리사리우스의 죽음
半島에서 ‘나르세스’가 휘날리며 권세를 누리던 때 ‘벨리사리우스’는 모처럼 발칸지방에서 승전하고 돌아왔다. 그때가 AD559년으로 마지막 전투 지휘였다. 다시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그가 큰 실수를 하게 된다. 황제가 노령이라 죽었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고 황제를 비판한 것이다. 속이 좁아터진 황제는 대로했다. 역모죄로
얽혔다. 전제군주의 특징 그대로 간신들의 조작이었다.
2년씩이나 끌다가 장군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택연금 처벌이 내려졌다. 그래도 황제는 40년씩이나 어마어마한 전공을 세운 명장을 감옥에 집어넣기가 민망 했을까? 6개월 뒤 새 판결은 무죄로 번복되었다. 여러 자료에도 그가 모함을 받았다가 신원이 회복되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억울했는지 8개월 뒤 AD565년 3월13일 비잔티움 사상 최고의 武將이 죽었다. 65살이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애당초 17년의 고트족과의 전쟁도 ‘벨리 사리우스’가 해달라는 대로 해줬으면 빨리 끝났을 것이다. 반도의 상황을 질질 끌게 만들고 또 名將이 부담스러우면 후딱 쳐내든지 했으면 될 걸
名君이네 大帝네 하는 사람이 어찌 그렇게 통치했는지 알 수가 없다. 뭐 내 방이 뜨끈하면 되었지 건넌방이
냉골이든지 말든지 알 바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어찌 보면 대단히 음흉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을까?
* 동로마제국의 영토(유스티니아누스 시대) : 로마 최 전성기 때에 비해 많이 줄어든 모양새다. 영국과 갈리아(프랑스=프랑크),
에스파냐의 대부분, 라인 강쪽의 영토는 다 잃었다. 북아프리카(모리타니아, 알제리)쪽은 없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고 난 후
분홍색의 옹졸한 동로마 영토만 남았다. 이탈리아 본토(半島)도 잃었다. 동로마는 종교라는 측면에 치우쳐서(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西로마를 버리듯이 하면서 스스로 문화, 군사, 경제 모든 측면에서 다른 문명으로 들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첫댓글 한고조 유방과 한신, 유스티니아누스와 벨리사리우스, 선조와 이순신 장군....토사구팽은 진리이지. 이 글도 곧 막을 내리게 되겠네. 새벽에 일어나 춘천감자의 글을 읽는 즐거움이 사라지면 무슨 재미로 새벽 시간을 보낼 꺼나.
ㅎㅎ 고마워. 삼척감자 말마따나 월요일(한국시간) 마지막 평이 올라가네. 뭐 남의 글을 읽고 감상이라고 해야 하나 줄여 보는 재미로 쓴 글이 그래도 상식과 역사를 배우는데 도움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족한 것이고 로마라는 존재는 어려서 부터 숱하게 들었지만 그냥 지나가는 얘기로만 치다가 제대로(정사는 아니지만 더 재미있게 쓴 시오노 나나미가 더 대단) 읽고 배웠으니 더 바랄 게 없다네. 로마인 이야기글을 만들기 전에 "열국지-원 책은 5권 -줄인 것은 150쪽 정도"를 성동 카페에 올린 적이 있었는데 삼척감자가 흥미가 있으면 따로 보내주던지 이 카페에 다시 올리든지 할 수는 있다네...
다시 확인해 보니까 열국지를 올린 기록이 없네. 프린트 해서 몇 몇 친구에게만 주었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