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이중섭과 르네상스 다방의 화가들’ 전시장 한쪽에 재현해 놓은 1950년대 ‘루네쌍스’ 다방의 모습. |
‘거리의 항구요, 실업자·모리배의 오아시스라는 다방. 오늘도 다방에는 흘러나오는 멜로듸에 도취하야 담배 연기로 안개 끼인 방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오십원짜리 한잔의 커피를 앞에 노코 벽만 바라보는 실업 군상의 일당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진한 커피 연기에 마취되어 혈색이 없는 실업자의 안식처가 과연 다방 이외에는 없든가.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통탄할 현실이 아닐 수 없다.’
1947년 11월 23일 동아일보에 실린 ‘커피와 재즈 - 다방은 안식처’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 시내에만 다방이 100여곳에 이른다고 보도돼 있다. 1927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우리나라 사람이 최초로 개업한 ‘카카듀다방’이 문을 연 이후 서울 명동 일대에 개발바람이 불기 전인 1960년대까지 명동·소공동 일대는 다방문화의 전성기였다. 다방마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시간을 죽이던 ‘죽돌이’ ‘죽순이’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화가, 문인, 연극인, 감독, 배우 등 예술가들이 많았다. 예술가들에게 다방은 단순하게 차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었다. 안식처이자 만남의 장소이자 정보를 교환하고 작품을 구상하던 활동의 거점이었다. 잡지·신문 기자들도 마땅한 통신수단이 없어 그들을 만나려면 다방으로 와야 했다. 6·25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전시공간이 없던 시절엔 화랑 역할까지 했다. 특히 부산 피란 시절엔 다방이 주요 전시장이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관장 이주헌)에서 1952년 12월 부산 광복동 ‘루네쌍스’ 다방에서 동인전을 했던 화가들을 불러 모아 ‘이중섭과 르네상스 다방의 화가들’이라는 전시(11월 21일까지)를 열고 있다. ‘기조전’이라는 동인으로 모였던 이중섭, 한묵, 박고석, 이봉상, 손응성, 정규 등 여섯 작가가 그들이다. 물감 살 돈도 없이 담배 연기 자욱한 다방에 작품을 걸어야 했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다. 서울미술관에서는 전시 공간 한쪽에 당시의 ‘루네쌍스’ 다방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빛바랜 포스터, LP레코드용 턴테이블, 까만 다이얼 전화기 등이 마치 시계를 60년 전으로 돌려놓은 듯하다. 그 시절 다방에선 어떤 일이 있었을까.
카카듀다방을 아십니까
최초의 근대식 다방의 기능을 했던 곳은 1902년 서울 중구 정동의 손탁호텔 내 다방이었다. 그후 호텔다방 또는 요리점을 겸한 다방이 생기기 시작했다. 독립된 다방으로 1923년 명동의 ‘이견(후다미)’과 충무로의 ‘금강산’이 문을 열었지만 일본인 소유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다방은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카카듀다방’으로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이경손이 주인이었다. 벽에 탈을 걸어 놓고 턱시도를 입은 이경손이 직접 차를 나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화가, 문인, 기자들이 모여들어 일본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경영실적은 좋지 않아 몇 개월 못 가 운영난으로 폐업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종로 2가 YMCA 부근에 ‘멕시코’(1929년)와 소공동에 ‘낙랑파라’(1930년)가 문을 열면서 명동 일대에 본격적인 다방 시대를 열어젖혔다. 다방이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으로 발전했던 것은 주인이 대부분 예술인이었던 이유도 있다. 극작가 유치진의 ‘프라타느’(소공동), 배우 복혜숙의 ‘뷔나스’(인사동), 음악평론가 김관의 ‘에리사’ 등이 명동 일대에 들어섰고, 시인 이상의 ‘제비’(종로 1가)도 문을 열었다. 1933년 7월에 개업한 이상의 제비다방은 부인(금홍)이 운영을 맡았는데 경영난에 허덕였다. 결국 2년 정도 운영하다 1935년 문을 닫고 다시 ‘쓰루’(일본어로 학이라는 뜻)를 인수했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이어 종로 광교 부근에 개업하려던 ‘69’ 다방은 이름이 외설적이라면서 사람들이 진정을 하는 바람에 허가가 취소됐다. 결국 다방 경영은 줄줄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지난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 있는 ‘이상의 집’에 ‘제비다방’이 다시 문을 열었다.
광복 이후엔 ‘봉선화’를 시작으로 명동 파출소 뒷골목의 ‘에덴’과 ‘남강’ ‘미네르바’ ‘오아시스’ ‘라뿌륨’ 등이 줄줄이 들어섰다. 여류문학가 손소희·전숙희·유부영씨가 공동으로 운영하던 ‘마돈나’도 유명했다. 소설가 이호철(1932~)은 ‘문단골 사람들’(1997)에 ‘마돈나’의 풍경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좁다란 다방 한구석에서는 동리와 다방의 주인마담 손소희가 나란히 앉아 사랑이자 문학을 속삭이고, 또 한쪽 정지용과 모란의 시인 김영랑이 얼멍덜멍 앉아 있는 그 한켠에서는 이용악이 술에 취한 채 웅얼웅얼 자신의 시를 읊조린다.”
‘명동백작’ 이봉구
일제 강점기부터 서울역 앞 2층에 있던 명곡다방이 명동 한복판으로 진출해 ‘돌체다방’을 열고 LP레코드판을 틀어대면서 예술가들을 불러모은 것도 이때쯤이다. ‘돌체다방’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기자 출신으로 소설가이자 명동 다방문화의 산증인이었던 이봉구씨(1916~1983)다. 명동의 터줏대감 같은 이봉구를 두고 사람들은 ‘명동백작’이라 불렀다.
이봉구는 화가, 문인, 음악가 할 것 없이 몰려다녔던 그 시절의 꿈과 낭만을 ‘명동백작’이라는 책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봉구는 책에서 ‘모두가 가난하고 그렇다고 타오르는 정열을 혼자 집안에서 삭이기엔 모두는 너무 젊었다. 흘러나오는 음악 속에 닥치는 대로 문학, 미술, 음악 등을 토해내곤 했다’라고 적고 있다.
기록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추억을 생생하게 증언해 줄 사람은 이제 몇 명 남아있지 않다. 그중 이중섭·김환기·유영국 등과 신사실파로 활동한 동인 중 유일한 생존화가인 백영수 화백(1922~) 역시 명동 일대 다방을 무대로 20·30대를 보냈다. 백 화백에게 다방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11월 6일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화실을 찾았다. 백 화백은 아직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다방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줄줄이 풀어내는데 끝이 없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이야기에 아흔 살 노화백의 건강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아침밥 먹고 8시30분쯤 되면 다방으로 나갔어. 나가면 아는 사람들이 전부 앉아 있는 거야. 난 동방싸롱에 자주 갔는데 한군데 있질 않고 다른 사람 만나려면 돌체도 가고 소공동에 있는 푸라워(플라워)도 가고 그랬어. 그땐 길이 좁아 지나는 사람들끼리 부딪치고 그랬는데 난 그게 좋았어. 포장이 안돼서 비만 오면 땅이 질척거려. 오후가 되면 구둣굽에 묻은 흙이 하얗게 마르잖아. 그래서 구두닦이들이 엄청 많았어.”
당시 커피값이 얼마였냐고 묻자 백 화백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서 우동값하고 비슷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백 화백은 “커피잔이 크고 커피맛도 좋았다”면서 그땐 밥을 먹으면 반드시 다방 커피를 마셔야 하는 줄 알았단다.
문인들의 아지트 ‘푸라워’다방
백 화백이 기억하는 다방 ‘푸라워’의 풍경이다. “푸라워는 주로 문인들이 있었어. 서정주가 있었는데 항상 문간에 앉아 있었지. 푸라워 다방엔 벽화가 있었어. 거기 가면 틀림없이 조지훈이 벽에 기대 있는 거야. 안경이 흘러내리니까 늘 턱을 치켜들고 벽화처럼 앉아 있어서 ‘푸라워 벽화’라고 불렀어. 박목월은 늘 부엌 쪽에 있었고 구상도 자주 왔어. 유치환도 경주에서 올라오면 들렀고. 지방 문인들이 서울에 오면 푸라워로 오니까 신문기자들도 자주 와서 원고 청탁도 하고 원고료도 주고 했지. 원고료 받는 날은 우르르 몰려나가 막걸리 마시는 날이었어.”
밥은 누구든 돈 있는 사람이 내는 것이 당연했다고 한다. 문인들은 신문·잡지 연재로 먹고살았지만 화가들은 그림을 사주는 사람도 없었고 돈 벌 구멍이 없었다. 백 화백은 잡지 표지며 신문 삽화 일이 많아 주로 밥값을 내는 쪽에 속했단다. 밥값이 부담스럽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혼자 먹으면 모양이 없잖아. 항상 두세 사람이 같이 먹었지. 그땐 지금과는 달리 인심이 후했어. 돈 없으면 그냥 끼어서 먹는 거야. 종로서점을 하던 장하구 사장이 밥을 잘 샀어. 그땐 서점이 잘돼서 돈을 쓸어담는다고 했어. 짜장면이나 김치찌개 같은 걸 주로 먹었는데 장 사장 같은 물주가 오면 비싼 곰탕도 먹고 막걸리도 시키고 그랬어. 빈대떡이면 최고의 안주였지.”
이중섭과의 추억
다방의 예술가 중에서도 화가는 소수였고 특히 가난했다. 동양화가들은 병풍그림 때문에 잘 벌었지만 서양화는 그림값도 쌌고 그나마 사는 사람도 없었다. 가난하다보니 주로 사대문 밖에 살았고 다방을 출입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고 한다.
다방순례를 하던 몇 안 되는 화가 중에 이중섭도 있었다. 이중섭과 얽힌 일화들도 많다.
“충무로 돌체다방 옆에 콜롬방제과점이 있었어. 비싸고 오래 앉아 있으면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화가들이 좋아하는 곳이었어. 어느 날은 이중섭이 와서 내 앞에 앉는데 머리에 온통 하얀 붕대를 감고 있는 거야. 어디 다쳤냐고 물어보니까 중섭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러는 거야. ‘이놈의 머리가 너무 뻣뻣해서 아무리 빗어도 자꾸 뻗치잖아. 그래서 머리를 눕히려고 붕대를 감았다’고 하는 거야.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지. 다음날 중섭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붕대를 풀고 나타났는데 머리가 차분히 누워 있었어.”
6·25전쟁이 터진 후 부산 피란 시절엔 명동의 다방문화도 그대로 부산으로 옮겨갔다. 백 화백을 비롯해서 이중섭·김환기·장욱진 등 화가들이 주로 가던 곳은 ‘밀다원’과 ‘금강다방’이었다고 한다. 한방에서 여러 명이 겹쳐 자야 할 정도로 잠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눈만 뜨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가는 곳은 뻔했다. 밀다원과 금강다방은 피란 시절 주요 전시공간이 됐다. 백 화백도 1951년 2월 밀다원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백 화백이 지금까지 가슴 아프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있다. “어느 날 아침 8시30분쯤 밀다원 다방에 나가 앉아있는데 이중섭이 다방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내 앞에 앉아 화이트 물감을 쓱 내미는 거야. 화가한테 화이트 물감은 제일 중요하거든. 물감을 보니 조금 쓰다가 가져왔나봐. 그걸 왜 나한테 내미는지 말 안 해도 알잖아. 어젯밤에 밥을 굶은 거지. 주머니에 있던 돈을 털어서 줬어. 다방 문 아래쪽이 뚫려 있었는데 문 밖에 고무신을 신은 아주머니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거야. 아마도 중섭이 아내였던 것 같아.”
이중섭이 다방에 쭈그리고 앉아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는 요즘 수천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백 화백도 이중섭이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부산 피란 시절 금강다방에서 시간을 보낼 때였어. 다방 테이블이 울퉁불퉁해서 우연히 거기다 대고 연필로 그림을 그리니까 우둘투둘 재미있는 거야. 그래서 중섭이 맨날 그림을 그리고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곤 했는데 어떻게 요즘에 은지화가 많이 남아있는지 모르겠어. 맨날 그리고 앉아있으니까 문인들이 담배 은박지를 중섭이한테 주고 그랬는데 그걸 사람들이 보관했던 건지 알 수 없지.”
눈만 뜨면 다방으로 모여 해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재료를 구하기가 힘드니까 맨날 앉아서 재료 이야기만 했지. 돌이켜보면 예술인들이 발붙일 곳이 없었어. 변변히 사용할 재료도 없고, 발표할 무대도 없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활화산처럼 터져나오는 생각을 입으로 발산했던 거지. 다방은 분출구였어.”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전쟁이 끝나고 산산이 흩어졌던 예술인들이 하나둘 명동의 다방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명동은 전쟁 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돈나·콜롬방·돌체·휘가로 등 사람들로 흥청이던 건물은 온데간데없이 터만 남았다. 사라진 것은 건물뿐이 아니었다. 김기림·김병욱·김연실·정현웅 등이 명동 거리뿐만 아니라 남한에서 자취를 감췄다. 돌아온 명동의 중심이 된 곳은 ‘모나리자다방’이었다. 백 화백과 이중섭·김환기·변종하·박고석 등 화가들을 비롯한 예술인들이 다시 모여들면서 모나리자는 시장바닥처럼 활기에 찼다. 1953년 모나리자에서 전쟁 이후 첫 전시가 열렸다. 바로 백 화백의 개인전이었다. 수화 김환기는 전시 방명록에 이렇게 써놓았다.
‘현대문화의 요소는 속도도 하나인 것 같다. 화가 又白(백영수 화백의 호)형은 제작에 있어서나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나 이 속도가 있다. 서울에 도라와서 제일 첫째로 미전을 가진 우백형을 나는 존경한다.’
백화점 전시장을 비롯해서 경복궁의 국립미술관 등 전시공간이 복구되면서 다방은 화랑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1947년 서울 지역에 100여곳이던 다방은 1960년 1000개를 넘어섰다. 그러나 1960년대를 끝으로 문화예술인들이 열정을 토해내던 명동의 다방 풍경은 빠르게 변해갔다. 명동 개발과 함께 땅값이 오르면서 다방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고 다방의 의자들도 낯선 사람들로 채워져 갔다. 문인·화가·배우 할 것 없이 몰려다니며 한 시대를 건넜던 그들은 대부분 전설이 됐다. 막걸리 한 사발에 행복해하고 마담의 사랑을 얻기 위해 멱살잡이를 하던 이들도 이젠 추억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 추억의 한 장을 서울미술관(02-395-0100)에 가면 만날 수 있다. 미술관 뒤편으로 이어져 있는 석파정을 물들인 가을이 지나가는 시간을 안타깝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