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크리스마스 훨씬 전부터 출국해 프랑스에 홀로 머물고 있는 찬미 언니를 만나러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원래 계획은 함께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갈 때쯤엔 (추워지는 날씨만큼 언니가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이미 언니가 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돌고 난 뒤였다. 우리는 그쪽으로 다시 갈지 말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첫 5일은 파리에 머무르며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았는데 하필 그때 유럽을 덮쳤던 기록적인 한파로 셋째 날에는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숙소에 있는 라디에이터는 젖은 수건을 말리거나 다음 날 마실 배즙을 데워놓는 정도밖에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전기장판을 챙기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허공에 맴돌았다. 엄마가 오버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냥 실수로라도 챙겼으면 좋았을 걸. 정말이지 프랑스는 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워지고 있었다.
꽁꽁 싸매도 파고드는 파리의 추위. ⓒ chaelinjane
몽마르뜨 언덕 위에서 하루 맑고 죄다 흐렸던 파리의 하늘을 바라본다. ⓒ chaelinjane
그래서! 프랑스를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프랑스에서 가깝고 프랑스보다 따뜻한 나라'였다. 게스트하우스의 외국인 친구들과 여행 후보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았는데 한 친구가 이런 제안을 했다.
"이탈리아 남쪽은 어때?"
이탈리아, 그 말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 평생 이렇게나 계획에도 없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너무 멋진 일이라 정신이 아득해졌다.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점심을 먹으며 언니와 나는 사흘 뒤 이탈리아로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그곳에서 렌터카로 남부 지역을 돌아보기로 했다. 오를리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라 숙소도 그 근처 빌르눼브 르 루아(Villeneuve-le-Roi)에 있는 에어비엔비로 예약을 했다. 언니와 나는 헬렌과 그의 강아지, 고양이와 이틀 동안 센 강 바로 옆에 지내면서 평화로운 시간을 누렸다.
센느 강의 백조. 내가 던지는 바게뜨를 먹으러 행차하셨다. ⓒ chaelinjane
아침 햇살에 빛나는 구나. ⓒ chaelinjane
나를 계속 졸졸 미행하던 고양이. ⓒ chaelinjane
낚시하시던 아저씨와 반갑게 인사도 나눴다. ⓒ chaelinjane
프랑스, 안녕. 따뜻할 때 또 보자! ⓒ chaelinjane
1월 18일 수요일 새벽 다섯 시 반. 감사하게도 헬렌이 오를리 공항까지 데려다줘서 여유롭게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로컬들의 휴양지'라는 말답게 동양인은 언니와 나밖에 없었다. 이륙할 때만 하더라도 파리에는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물의 기다란 흔적이 그대로 창문에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다. 감기에 걸린 날부터 편도선이 부어있었는데 아침이다 보니 더욱 부풀어 있었다. 기내에서 간식이라도 챙겨줄 줄 알고 그냥 왔는데 얄짤 없었다. 비행기는 한 시간 반 정도 날아가더니 오전 9시 20분쯤 우리가 머물 레조디 칼라브리아(Reggio di Calabria)로 내려앉았다.
너무나 온화한 날씨. ⓒ chaelinjane
렌터카 가게가 문을 열 때까지 공항 안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시간이 되어서 밖으로 나왔는데, 프랑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한 햇살과 화창한 날씨가 눈 앞으로 펼쳐졌다. 이탈리아는 마치 프랑스가 아닌 자기가 우리의 원래 목적지였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였다.
우리가 간 곳에는 여러 렌터카 업체들이 모여 있었다. 금방 문을 열어서 그런지 자리가 비어있는 업체도 있었는데, 우리는 그중에 가장 일할 준비가 되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로 갔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직원이라 언니의 이태리어와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협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구글 번역기 총동원. 협상을 포기할 순 없어요. ⓒ chaelinjane
Good deal! 이 친구들에게 내 사진 엽서를 선물로 주었다. Grazie! ⓒ chaelinjane
우리는 결국 9인용 리무진 밖에 없다고 우기는 걸 끈질기게 되물어서 Piat 500을 쟁취했다. 13일을 빌리는 데에 400유로 정도 했다. 보험도 잘 들어놓고 이 나라의 하이패스 단말기도 함께 빌렸다. Piat 500은 기어를 왼쪽으로 두 번 툭툭 당기면 오토로 주행이 가능한 설정으로 변한다.
사랑하는 나의 찬미언니! 그리고 우리의 붕붕카, 피아트 500. ⓒ chaelinjane
아름다워,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나라야. ⓒ chaelinjane
숙소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고속 도로로 들어섰다. 당장은 음악을 연결할 수가 없어서 라디오를 틀어놓았는데 하필이면 어느 순간 내가 좋아하는 콜드플레이의 음악이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볼륨을 높이고 언니는 속력을 더 냈다. 눈 앞의 나지막한 산에는 그려놓은 것 같은 집들이 박혀 있었고, 하늘에는 구름이 솜털처럼 공중에 부착되어 있었다. 추위로 벌벌 떨던 프랑스도 그토록 아름다웠는데, 햇살을 잔뜩 품은 남쪽 나라의 풍경은 이 세상을 초월해 존재하는 신들의 커다란 정원 같았다.
절벽 아래의 지중해 바다. ⓒ chaelinjane
Reggio di Calabria, Reggio Calabria, Italy ⓒ chaelinjane
내비게이션을 켜 놓아도 일방통행 도로에 익숙하지 못한 데다가 워낙 현지인들의 운전이 거칠어서 겨우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번 숙소는 상업적인 느낌이 훨씬 강한 공간이었다. 검은 뿔테 안경과 북실 거리는 턱수염을 가진 호스트는 대리석 바닥과 높은 천장이 있는 방을 우리에게 내어주었다. 가격이 저렴한 편이라 시설이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천장에는 천사가 우리를 내려다보는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3층이라 창문을 여니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환상적인 날씨를 밖에 둘 수만은 없었다. 짐을 얼른 정리해놓고 우리를 멋진 곳으로 데려다 줄 귀여운 피아트의 품으로 폴짝 들어갔다. 지금 필요한 행동은 '해안도로를 마음껏 달리는 것'이었다. 어디로 향하든 좋았다.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는 눈 앞의 지중해를 감췄다 보여주기를 반복했다. 풍경에 넋을 잃고 달리다 보니 표지판에 '실라(Scilla)'라는 글씨가 나타났다.
조용한 마을 Scilla. ⓒ chaelinjane
좁은 도로에서는 작은 자동차가 훨씬 편리하다. ⓒ chaelinjane
Scilla, Reggio Calabria, Italy ⓒ chaelinjane
이국적인 풍경을 하고서 '신라'와 묘하게 발음이 비슷한 동네였다. 바위 언덕 꼭대기에 있는 루포 성(Castle Ruffo) 아래로 작고 예쁜 집들이 조밀 조밀하게 늘어서있었다. 마을이 생각보다 많이 작았는데, 1783년과 1908년에 일어났던 지진으로 이 지역의 피해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현재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겨울 바닷가엔 산책하는 사람 하나 없이 한적했다. 관광객들 대신 주민들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침도 안 먹고 이탈리아로 넘어온 탓에 배가 고팠지만 셰프들의 휴가 기간이라 문을 연 레스토랑을 찾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가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며칠째 편도선이 부어 있어서 목이 아팠지만 너무 행복해서 고함을 냅다 지르고 말았다.
문을 연 레스토랑을 찾고 찾다가 결국 레조디 칼라브리아로 다시 돌아왔다. 때마침 초록색 네온사인이 불빛을 밝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궐 같은 크기에, 바닥에는 양탄자와 레드 카펫, 벽에는 유화 그림들이 위엄을 더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알고 보니 이 주변에서는 가장 비싼 곳이었다. (엔트리와 플랫, 커피 한 잔까지 해서 1인당 21.5유로였다.)
주문을 받고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주머니. ⓒ chaelinjane
22년된 고풍스러운 레스토랑. ⓒ chaelinjane
우리 밖에 없는 곳에서 대용량 고퀄리티 파스타를 맛 보았다. ⓒ chaelinjane
손님 없다고 불도 꺼놓은 다이닝룸. 조금 무서웠지만 오히려 분위기 있기도. ⓒ chaelinjane
휑한 이곳엔 말 없는 셰프와 사시 눈을 한 상냥한 아주머니가 있었고 이날 손님은 어쩌면 예상한 대로 우리 밖에 없었다. 무척 넓었지만 우리가 식사하는 곳, 주방, 그리고 입구 쪽의 불만 켜 놓았다. 극강의 파리 강추위를 경험했던 우리는 외투를 벗고 다녀도 괜찮았지만, 히터가 고장나버린 레스토랑에 앉아 있으니 곧 싸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22년 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그 추위에 한몫을 더했다. 언니랑 나는 묘한 눈빛을 주고 받았다. 굉장한 무게의 침묵을 함께 삼키자니 소화가 안될 것 같아 내 휴대폰으로 작게 음악을 틀고서 식사를 즐겼다. 음식은 상상 이상으로 양도 많고 맛있었다! 말 없는 셰프 아저씨는 우리가 갈 때까지 무서운 표정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숙소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는 같은 곳을 다섯 번이나 돌아서 주차에 성공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낄낄거리는 것 말고는 이 모든 상황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방에 들어가 근처의 정보를 찾아봤는데, 조금만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고스트 빌리지'가 있단다. 1960년대부터 금지된 구역으로, 현재 팔십 세 할머니가 혼자 그곳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의 어느 고속도로가 너무너무 후져서 유럽에서 고속도로로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글도 찾아냈다. 이런데도 건설하는 데에 55년이 걸려서 총리가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고! 여러 기사들을 읽는 내내 우리는 또다시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남부 이탈리아, 이렇게까지 매력이 흘러 넘치는 도시일 줄이야.
밤 9시. 이렇게 밤을 마무리 하기에는 무척이나 아쉬웠고, 아까 그런 레스토랑의 분위기라면 술을 마시러 갔다가 심장이 얼어붙을 판이었다. 옆에서 지도를 살펴보던 언니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야간 드라이브 갈까? 이탈리아의 가장 남쪽으로."
역시, 탐험도 취향이 맞는 사람이랑 해야 좋다니까! 우리는 숙소로부터 36km 정도 떨어져 있는 이탈리아의 최남단인 산 로렌쪼(San Lorenzo)의 마리나로 향했다. 레조디 칼라브리아를 벗어나니 가로등이 없는 길이 절반이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조심스레 항구에 도착했다. 파도가 치는 소리는 들렸지만 그곳에는 저멀리 있는 가로등 하나 말고는 불빛이 아예 없어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마피아의 습격을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현듯 차문을 열고 나가 헤드라이트를 꺼달라고 했다. 언니가 미쳤다고 했지만 내가 보지 못하는 풍경을 나의 카메라가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Marina di San Lorenzo, Reggio Calabria, Italy ⓒ chaelinjane
Marina di San Lorenzo, Reggio Calabria, Italy ⓒ chaelinjane
아,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별들이 차츰 눈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그 순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나는 늘 도시에 살았기 때문에 그토록 수많은 별들을 눈동자에 담아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인식할 수 없는 빛까지 끌어다 모은 카메라 덕분에 이곳의 환상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아주 진한 어둠이 두려우면서도 이 밤이 가져다 주는 선물 같은 순간에 온 마음이 설레었다. 파도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Marina di San Lorenzo, Reggio Calabria, Italy ⓒ chaelinjane
어쩌면 근처에 마피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진을 찍던 곳 옆에는 아주 낡은 자동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이곳에는 폐기물과 불순 물질의 하역을 금지한다는 표지판이 있었다. 언니도 밖으로 나왔다. 오로지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바깥 온도는 8도에서 10도 사이, 단단히 챙겨 입고 왔으니 밤바람에도 기분 좋게 나와 있을 수 있었다. 비밀스러운 감상을 이어가다가 더 오래 있다가는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할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잠의 요정이 산 로렌쪼 마리나의 별 가루를 두 눈 위에다 살포시 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