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철학 에세이】
투표하는 날 떠올린 법구경 한 대목
― 도솔산 내원사 벽에 걸린 글귀가 졸졸 따라다녀
윤승원 수필가.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6.3 선거일, 투표하고 산에 올랐다.
상큼한 솔향이 세상의 번뇌를 씻어준다.
하산하면서 사찰 앞에 이르렀다.
매일 산행 코스에서 보게 되는 문구
이 길을 걷는 등산객들은 모두
외우다시피 자주 마주치는 문구
하지만 오늘은 다르게 보인다.
도솔산 내원사 벽에 걸린 현수막
▲ 사찰 벽에 걸린 현수막 - 법구경 한 대목(사진=필자 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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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가 좋다지만 원한을 가져오고 패한 자 괴로워서 오늘도 누워있네
이기고 지는 마음 영원히 녹아지면 다툼은 없어지고 저절로 편해지리
허공에 비친 저 달그림자 자취 없듯이 이 세상 어느 것을 영원하다 하리오
덧없는 고개에서 이 고요 찾아보니 태평가 장단 맞춰 너울너울 춤을 추네
만족을 아는 사람 땅 위에 누웠어도 편안하지만 분수를 모르는 자 천당에 있더라도 편하지 아니하네
만족을 못 느끼면 재산이 많더라도 가난함이요 분수를 지키는 자는 가난하더라도 부자 마음이라오
― 도솔산 내원사 벽에 걸린 ‘법구경’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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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 벽에 걸린 법구경 한 대목을 음미해 보는 필자(삽화=AI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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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존경하는 동양 철학자 지교헌 박사(1933~2024, 수필가.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님에게 이 문구를 보여 드린 적이 있다.
이런 답글을 주셨다.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 카페(2024.01.17.)에서다.
“이기고 지는 마음 영원히 녹아지면…”이란 글귀가 눈에 뜨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거나 항상 승부 욕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이기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기고 싶은 상대가 없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외면하는 수도 있습니다.
경쟁자가 있거나 없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함에도 말입니다.
윤 선생이 《도솔산에서 주워 담은 법구경》은 참으로 평범하면서도 참다운 진리이며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을 살피는 거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도솔산에 올라 법구경을 읽고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그 중에도 특히 국민의 눈에 잘 뜨이는 이른바 정치하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금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아직도 일천(?)한 탓인지 정치인답지 못한 정치인이 너무나 많이 발견됩니다.
여러 가지 특권만 누리면서 권력을 과시하고 물질을 탐하는 추태를 보이는 사례가 너무나 많은 듯합니다. ― 청계산에서 지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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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던 날, 산행하면서 법구경 한 대목이 유독 졸졸 따라다녔다. 특히 이 대목이 명문(名文) 시구(詩句)이다
“승리가 좋다지만 원한을 가져오고
패한 자 괴로워서 오늘도 누워있네”
오늘 밤 개표 방송을 보면서도 이 대목은 여전히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고 지교헌 박사님이 생존해 계시면 무어라 하실까?
“윤 선생, 너무 딱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 왜 안타깝게 바라보지 말라고 하실까? 박사님은 더는 덧붙여 해석하지 않으신다.
혼자 해석해 보라는 뜻으로 던진 화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법구경 한 구절 금과옥조로 여기지만 승부 욕에 집착하는 사람에겐 지나가는 바람이요,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는 뜻일까?”
제대로 된 해석인지 모르겠다. 구성진 스님의 염불 소리만 크게 들려온다. ■
2026. 6. 3.
윤승원, 산행 중 ‘법구경’ 한 줄 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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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윤승원 수필가의 「투표하는 날 떠올린 법구경 한 대목」은 단순한 산행 수필이 아닙니다.
정치와 선거, 승부와 욕망, 수행과 성찰, 그리고 삶의 태도를 한 편의 짧은 철학 에세이 속에 녹여낸 작품입니다.
특히 윤승원 수필가 특유의 '생활 속 철학 발견형 수필'의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 이 작품의 흥미로운 문학적 요소
1. 거창한 담론이 아닌 '산행 중 만난 철학'
윤 수필가 작품의 특징은 어려운 철학을 생활 속 장면으로 끌어내린다는 점입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거일 투표
도솔산 산행
사찰 담벼락 현수막
스님의 염불 소리
이처럼 누구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풍경 속에서 철학적 질문을 길어 올립니다.
독자는 처음에는 산행기를 읽다가 어느새
"승부란 무엇인가?"
"이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2. ‘법구경’과 ‘선거’를 연결한 절묘한 착상
대부분 사람은 선거를 보면 승패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선거를 보면서 승패가 아니라 법구경을 떠올립니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승리가 좋다지만 원한을 가져오고
패한 자 괴로워서 오늘도 누워있네
선거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승리입니다.
그런데 법구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승리는 새로운 원한을 만든다.”
그래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승리만이 좋은 것일까?”
이 질문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긴장감입니다.
3. 고(故) 지교헌 박사와의 대화 구조
이 작품에는 특별한 장치가 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스승과의 대화입니다.
실제로는 생전의 답글을 인용했지만, 독자는 마치 지금도 청계산 어딘가에서 지교헌 박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
“윤 선생, 너무 딱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이 한마디는 살아 있는 대화처럼 들립니다.
수필 문학에서는 이런 기법을 ‘회상적 대화’ 또는 ‘영혼의 대화’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독자는 스승의 부재를 느끼면서도 오히려 그의 정신은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 윤승원 수필가 특유의 작법
윤 수필가의 수필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사소한 일상에서 출발한다.
산행
연등
들꽃
나무 나이테
손자의 질문
모두 평범한 소재입니다.
둘째, 중간에서 철학적 질문이 등장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왜 안타깝게 바라보지 말라고 하셨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작품을 단순 감상문에서 철학 에세이로 끌어올립니다.
셋째, 결론을 독자에게 맡긴다.
선생님 글은 대개 정답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제대로 된 해석인지 모르겠다.’라고 끝냅니다.
좋은 수필은 가르치지 않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작품 역시 독자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드는 열린 결말을 택하고 있습니다.
◆ 법구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
사실 법구경은 선거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경쟁을 이야기합니다.
입시 경쟁
직장 경쟁
사업 경쟁
정치 경쟁
문학 경쟁
모두 같습니다.
법구경은 경쟁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승부에 집착하는 마음을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승자는 교만해지기 쉽고
패자는 원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결국 둘 다 마음의 평화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법구경은
“누가 이겼는가?”보다 “누가 마음을 잃지 않았는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 그렇다면 승자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법구경의 가르침대로라면
승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의 승리가 영원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작품 속 구절처럼
허공에 비친 저 달그림자 자취 없듯이
이 세상 어느 것을 영원하다 하리오
권력도
명예도
재산도
인기도
결국 지나갑니다.
따라서 진정한 승자는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 패자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패자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거도
인생도
한 번의 결과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패배를 원망으로 바꾸면 자신을 해치고
배움으로 바꾸면 자신을 성장시킵니다.
법구경은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패배 때문에 증오를 품는 마음을 경계합니다.
◆ 지교헌 박사님은 왜 “딱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윤 선생, 세상은 원래 욕망과 경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오.”
“모든 사람이 법구경대로 살기를 기대하면 실망이 커질 뿐이오.”
“남을 바꾸려 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피시오.”
즉,
정치인을 걱정하기 전에
정당을 걱정하기 전에
세상을 걱정하기 전에
먼저 자기 마음속 승부욕부터 살펴보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수행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 이 작품의 백미
이 글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정치 비판도, 선거 해설도 아닙니다.
마지막 장면입니다.
‘구성진 스님의 염불 소리만 크게 들려온다.’
앞에서는 선거와 승패를 이야기했지만 끝은 고요함으로 돌아옵니다.
세상은 시끄럽게 승패를 다투고 있지만,
산사는 여전히 염불 소리를 내고,
도솔산은 변함없이 솔향기를 풍기고,
법구경은 묵묵히 같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결국 정치 수필이 아니라 '마음의 승패를 묻는 철학 수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승원 수필가가 평소 삶의 좌우명처럼 간직하고 계신 ‘안분지족(安分知足)’, ‘지족상락(知足常樂)’의 정신이 바로 이 법구경 구절과 맞닿아 있습니다.
승자에게는 겸허함을, 패자에게는 평정심을,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만족을 아는 지혜를 권하는 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덧붙이는 말
이번 「투표하는 날 떠올린 법구경 한 대목」을 읽으며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윤 선생님께서 선거라는 현실의 한복판에서 정치적 주장이나 승패 논리를 펼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셨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선거 결과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선생님은 도솔산 내원사 벽에 걸린 법구경 한 구절을 붙들고
“승리란 무엇인가”, “패배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이기고 싶어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시사 칼럼이 아니라 ‘철학 에세이’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고(故) 지교헌 박사님의 존재가 작품에 깊이를 더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이지만, 글 속에서는 마치 지금도 청계산에서 편지를 보내오는 듯합니다.
생전의 한마디가 세월을 건너와 제자의 사색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모습은 매우 아름다운 문학적 장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윤 선생님의 글쓰기 특징 가운데 하나를 다시 발견했습니다.
선생님은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작가라는 점입니다.
도솔산의 솔 향기,
사찰의 현수막,
스님의 염불 소리,
이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모두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비추는 거울로 등장합니다.
특히 마지막의 염불 소리는 마치 이런 뜻처럼 들립니다.
“세상은 늘 이기고 지는 일로 시끄럽지만,
산은 말이 없고,
바람은 편 가르지 않으며,
진리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독자는 선거 결과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을 얻습니다.
누가 이겼는가보다, 누가 더 많은 표를 얻었는가보다, “나는 승부 앞에서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아마 이것이 선생님께서 도솔산에서 주워 담아 독자에게 건네주신 가장 귀한 선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의 밑바탕에는 윤 선생님께서 평소 실천하고 계신 안분지족(安分知足)과 지족상락(知足常樂)의 삶의 철학이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법구경의 문장도, 지교헌 박사님의 가르침도, 결국은 같은 곳을 가리킵니다.
“이기는 삶보다 평안한 삶이 더 어렵고 더 귀하다.”
이번 작품은 그 평범하지만 깊은 진리를 도솔산 솔 향기처럼 은은하게 전해주는 품격 있는 ‘철학 에세이’였습니다. ♣
(雲峰, 윤승원 수필 전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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