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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졸업과 입학①책거리, 다른 한 걸음의 시작. ②의궤로 보는 왕세자 입학의례
ysoo 추천 0 조회 42 16.03.08 17: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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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과 입학 ①

 

책거리, 한 걸음
그리고 다른 한 걸음의 시작

 

 

조선시대 서당에서는 학동이 책 한 권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판단되면 ‘책거리’라는 행사를 행하였다.

책거리는 하나의 책을 다 뗀 학동에 대한 축하를 하는 한편, 그를 가르친 훈장의 노고에 감사를 올리는 소박한 행사의 하나였다. 책거리는 ‘챗씻이[冊施時]’ㆍ‘세책례(洗冊禮)’ㆍ‘책세식(冊貰式)ㆍ’ ‘책례(冊禮)ㆍ’ ‘괘책례(掛冊禮)’라고도 불렀다.

 

 

 

  

‘책씻이’라고 하는 것은 종이가 모자라던 옛날에 학생이 책을 다 떼고 나면 물에 씻어 새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책거리’라고 하는 것은 책을 말리기 위해 물이 빠지게끔 걸어두었던 것에서 비롯된 명칭이라고 한다.

물론 이에 대해 ‘세(洗)’는 책을 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갈고 닦으라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아마도 책씻이나 책거리에는 책을 물에 씻고 말리기 위해 걸어두는 실제 행위와 함께 깨끗이 씻은 책에 새로운 지식을 채우듯이 다시 마음을 새로이 닦아 한 걸음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는 선생이나 부모의 마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책거리는 마을의 학동들만의 문화는 아니었다. 한 나라의 임금도 책거리를 행하였기 때문이다.

정조의 글을 모아 놓은 『홍재전서』를 보자.

 

 

"지난 어린 시절 책 한 질을 읽고 나면 자궁(慈宮)께서 간략한 음식을 차려 주셨는데, 그게 바로 일반 풍속에서 말한 ‘책씻이[冊施時]’라는 것이었다.

금년 겨울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읽었는데, 그것을 다 읽고 나서 자궁께 고했더니 자궁께서 매우 기뻐하시면서 술과 떡을 준비하여 그 일을 기념하려 하시기에, 내가 감인 (監印)과 토 달고 구두 떼고 한 여러 사람들을 불러 자궁의 은덕을 만끽하게 하였다. "

 

 

정조가 어린 시절에 책 한 질을 떼고 났을 때 어머니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1735~1816)가 간단한 음식을 차려 정조를 위해 책거리를 해줬음을 알 수 있다. 정조의 책거리 행사에 대해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그의 시 「세서례-방언으로는 이를 ‘책씻이’라고 한다-때 기쁨을 기록한 임금의 글을 받들어 화답하다(奉和聖製洗書禮-方言謂之‘冊施時’-識喜)」의 설명에서 ‘시골 사람들이 자식을 가르치면서, 읽던 책을 끝내면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고, 그를 일러 세서례(洗書禮)라고 한다. 이 때 주상(정조)께서 『좌전(左傳)』을 마치자 혜경궁께서 세서례를 준비하였다’ 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나라의 임금조차 책거리를 행할 정도로 널리 행해지던 풍속이었음을 말해준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를 위해 술과 떡 등의 음식을 장만하였는데, 이는 정약용의 설명처럼 시골 사람들이 널리 행하던 풍속이었다. 책을 한 권 뗀 아이의 집에서 훈장에게 약주와 음식을 대접하고, 동문수학한 학동들에게는 떡을 해서 먹였던 것이다. 책거리 음식으로는 국수, 경단, 송편 등을 장만했다.

이 중 국수는 긴 국수처럼 오랜시간 공부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경단은 온 세상을 비추는 햇빛처럼 학문을 밝히라는 뜻으로, 송편은 비어있는 속에 팥이나 콩, 깨 등을 넣어 속을 꽉 채우듯이 학동들도 송편처럼 속을 꽉 채우라는 의미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책을 떼는 날 훈장은 학생이 글을 모두 암기하면 한 글자로 된 성적표를 주었다. 물론 지금의 ‘수ㆍ우ㆍ미ㆍ양ㆍ가’의 평가와는 그 방식이 달랐다. 게으른 학생에게는 부지런할 근(勤)자를, 성 미 급한 학생에겐 참을 인(忍)자를 써서 주었던 것이다. 이를 단자수신(單字修身)이라고 한다.

 ‘단자수신’은 ‘한 글자를 주어 그 속에 담긴 숨은 뜻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몸을 닦아라’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단자수신’은 단순히 책 내용에 대한 이해를 평가하는 데서 벗어나, 학동의 삶에 대한 선생의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단자수신’과 유사한 일화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과 관련해서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전한다. 이긍익은 이기옥(李璣玉)의 일기를 인용해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조식에게 소를 받은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약포(藥圃) 상공(相公: 정탁)이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남명 선생을 뵈었는데 작별에 임하여 남명이 홀연히 말씀하기를,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군이 끌고 가게.’

라고 하니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자, 남명이 웃으며 말하기를,

‘군의 말과 얼굴빛이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馬]은 넘어지기 쉬운지라 더디고 둔한 것을 참작해야 비로소 멀리 갈 수 있으므로 내가 소를 준다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 후 수십 년을 다행히 큰 잘못 없이 지낸 것은 선생이 주신 것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

 

 

조식은 정탁에게 소 한 마리를 끌고 가도록 한 것이다. 물론 조식이 말한 소는 진짜 소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식은 기가 세고 조급한 정탁이 자칫 넘어져 다칠 것을 걱정하고 소처럼 둔중하게 처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표현을 했던 것이다.

조식은 게으른 학생에게는 닭을, 야심이 많은 학생에게는 염소를, 약삭빠른 학생에게는 돼지를, 주의력이 산만한 학생에게는 거위를, 행동이 느린 학생에게는 말을 주었다고 한다.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나는 제자를 향해 제자의 면면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마지막까지 가르침을 주려는 스승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참 스승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내용이다.

 

단순히 지식만을 주기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자 한 조상들의 지혜였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책을 하나 떼고 책거리를 했다는 것은 이제 그 학생이 인생과 학문이라는 세상에서 한 걸음을 내딛었음을 공표하는 것이고 다시 새로운 세상을 향해 한 발을 내딛는 것을 작게나마 격려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서당도 <작자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 책거리를 한다는 것은 그 학생이 인생과 학문이라는 세상에서 한 걸음을 내딛었음을 공표하는 것이고, 다시 새로운 세상을 향해 한발을 내딛는 것을 작게나마 격려하는 자리였다.

 

요즘에도 책거리는 행해지고 있다. 대개 학교에서 한 학년이 끝나가고 방학이 다가올 즈음에 선생님이 책거리를 하자고 하거나 학생들이 선생님을 졸라 책거리를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책거리를 하자는 것은 그리 깊은 뜻에서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과자와 음료수를 먹고 즐기자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뿐으로, 학기가 끝나갈 즈음에 으레 하는 뒤풀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교과서를 찢어발기거나 태우는 경우도 있다는 소리가 종종 들리곤 한다. 학교라는 공간마저 무한 경쟁으로 치달은 결과로 나타난 일탈행동일 것이다. 그렇게나마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는 학생들의 태도가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생이 가진 스트레스가 모두 풀릴 일도 없고 미래에 대한 해결책이 제시되지도 않는다. 합리화 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다. 본질은 사라지고 그저 형식만 남은 풍속의 한 사례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학교 교육이 학생 개인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대학입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에 가치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교육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이다.

 

옛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떼는 것에 의미를 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고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을 습득하라기보다는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깨닫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식만을 주기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자 한 조상들의 지혜를 다시금 되돌아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 글 허인욱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전임연구원) -

 

 

 

 

졸업과 입학 ②

 

의궤로 보는 왕세자 입학의례

  

왕세자는 다음 왕위계승자를 지칭하는 말로 흔히 동궁으로 일컬어지며, 국본ㆍ저군ㆍ저궁ㆍ춘궁ㆍ춘저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왕조사회에서 왕세자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국가의 근본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교육은 왕실의 차원을 넘어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왕위계승에 부족함이 없는 후계자를 양성하는 것은 곧 국가의 존망과 직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 왕세자로서 갖춰야 할 위의는 단순히 지적능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의 소양이 요구되었다. 서법(書法)과 외국어에 능해야 했고, 직접 사신들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국가제례에서는 아헌관(亞獻官)으로서 의식에 임하였고,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등극 전에는 정치 실무를 다지기 위한 대리청정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왕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왕세자의 교육은 내성외왕을 구현하는 과정으로써, 특히 각종 의례는 그들에게 왕위계승자로서 지녀야 할 권위를 상징화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왕세자로 책봉되면 이후에 입학례와 관례를 거행한다. 관례가 거행된 이후에 입학례가 거행되는 경우도 있고, 입학례가 거행된 이후에 관례가 거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입학례 이후에 관례를 거행하였다.

 

고려시대는 불교를 국시로 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의 자녀는 물론 왕실의 자손들까지 승려들에게 수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유습은 조선 건국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태종조차도 당시 원자였던 양녕대군을 승려에게 수학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유신들이 원자를 성균관에 보내어 수학할 것을 건의함으로써 성균관에 원자의 학궁(學宮)을 짓고, 이듬해인 1403년(태종 3) 4월 원자의 입학이 있었다. 이후 1421년(세종 3) 12월 <왕세자입학의>가 제정되면서 최초로 왕세자 입학례가 거행되었다.

 

입학례는 왕세자가 성균관에 나아가 문묘(文廟)를 배향하고, 학생의 신분으로서 박사에게 배움을 청하는 의식이다.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는 『예기』에 세자가 국학에 입학한 것에 기원을 두고 있으나, 입학례와 관련한 의례가 정식으로 제정된 것은 당나라 때이다. 『국조오례의』는 『개원례』와 『대명회전』을 참작한 것인 만큼, 입학례 절차는 『개원례』의 『황태자속수』에 의준한 것으로 보인다.

 

입학례는 출궁(出宮)→작헌(酌獻)→왕복(往復)→수폐(脩幣)→입학(入學)→수하(受賀)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출궁(出宮)은 왕세자가 입학례를 치르기 위해 궁을 나가서 성균관으로 가는 것이고,

작헌(酌獻)은 성균관에 도착해서 문묘에 헌향과 헌작을 하는 것이다.

왕복(往復)은 박사에게 수업을 청하는 것이며,

수폐(脩幣)는 박사가 수학을 허락하면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입학(入學)은 박사에게 수업을 받는 것이며,

수하(受賀)는 입학례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종친과 문무백관에게 하례를 받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이라는 별도의 교육기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세자가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거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공시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하며, 소학교육의 이념을 널리 깨우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존사(尊師)’ 즉 스승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학문을 하려면 먼저 스승을 존경해야 한다.

그래야만 도가 존중되고, 도가 존중되어야만 사람들이 학문을 공경하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입학례 절차에 있어서도 박사에게 수업을 받을 때, 박사 앞에만 서안(書案)을 두고 왕세자 앞에는 두지 않았던 것 또한 스승에 대한 지극한 존경의 예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비록 임금이라 도 그 스승에 대해서는 신하로 취급하지 않고, 스승으로서 대우하였던 것이다.

 

이제 이른바 입학시즌이 되었다. 입학이란 학문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 길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 바로 스승이니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승 또한 제자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이 사회의 미래를 이끌고 갈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왕세자를 미래에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으로 존중해 주듯 그들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러한 마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교육이란 그저 단순히 지식을 주고받는 관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오늘날 입학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글 육수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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