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 스님의 금강경 강설
22.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 정토를 장엄함)
정토는 이름이 정토일 뿐 마음이 청정하면 그것이 바로 진짜 정토
적멸은 단공이 아니라 단지 경계를 따르지 않을 뿐 항상 여여
모든 일은 자체에 문제 있는 것 아니라 내 인과가 문제의 본질
더 좋고 나쁜 것이 없으니 좋은 만큼 나쁘고 나쁜 만큼 더 좋다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스스로 지은 인과의 업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어떤 고통과 괴로움도 충분히 반감시킬 수 있다.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스스로 지은 인과의 업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어떤 고통과 괴로움도 충분히 반감시킬 수 있다. [법보신문DB]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 장엄불토부(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불야 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 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 하지만 ‘장엄한다’ 라고 하면 이미 장엄함이 아니고 그 이름을 장엄이라고 합니다.”
수보리는 이어, “상을 여읜 보살의 불토(佛土)로 볼 때, 장엄불토(莊嚴佛土)가 곧 장엄이 아니요 그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불토가 곧 정토(淨土)이니 마음이 청정하면 정토이고, 마음이 청정하면 자연히 일만행(一萬行)이 구족할 것입니다. 이것이 장엄입니다.” “또한 마음이 청정하면 세계가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치 못하면 세계가 청정치 못하오니, 불토의 장엄을 어찌 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다른 데서 구하오리이까?”
“불토를 장엄함은 마음밖에 있지 아니 하온 즉, 마음이 청정하면 식심(識心)과 망념이 쉬게 되고, 제업(諸業)이 공하여 청정한 마음이 또한 공할 지니, 불토는 어느 마음에서 삼을 것이며 장엄은 어느 마음에서 구할 것입니까?” 이러한 이유로 불토를 장엄함이 곧 장엄이 아니요, 비록 상을 여읜 보살장엄(菩薩莊嚴)이라 할지라도 한마디 한마디 말하는 가운데, 그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라는 뜻으로 세존께 말씀드린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 중, 보고 싶은 것이 더 많을까?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더 많을까? 귀로 듣는 것 중에 듣고 싶은 것이 더 많을까? 듣고 싶지 않은 것이 더 많을까? 냄새, 맛, 촉감, 기억 가운데 역시 더 좋은 것이 많을까? 더 싫은 것이 많을까?
원리적으로만 따진다면, 좋고 싫은 것은 서로 상대적이기 때문에 좋은 만큼 싫어지고, 싫은 만큼 좋아지므로, 어느 것이 더 많거나 크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니, 결국 좋고 싫은 것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봐야 한다.
아름다운 것, 더 아름다운 것, 더더욱 아름다운 것을 볼라치면, 추한 것, 더 추한 것, 더더욱 추한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더 좋은 소리, 더 좋은 향기, 더 좋은 맛, 더 좋은 촉감, 더 좋은 기억에 의해, 더 싫은 소리, 더 싫은 향기, 더 싫은 맛, 더 싫은 감촉, 더 나쁜 기억 등이 더불어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돈과 명예, 권력과 인물, 건강과 수명 등에 있어서, 더 좋은 조건과 환경을 가진 사람이나, 또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으로 느끼는 좋고 싫은 감정의 인과는 다를 수가 없다.
따라서 살아가는 조건과 환경은 연기와 인과에 따라 시절인연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 육근과 육진(六塵-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기억)에 의한 감정의 윤회는 사람마다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좋고 싫은 감정의 인과가 반복 윤회를 거듭하는 이 자체로서 피곤함과 괴로움을 가져온다고 하시고 이를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설해 주시니, 좋고 싫은 감정을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만이 인과 윤회고(輪廻苦)를 벗어나는 길이라고 설파하심이다. 그리하여 육근으로 감지되는 대상에 대해 감정을 쏟지 말고, 좋다 싫다는 분별된 마음이 머무르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심이다.
그렇게 해야 감정이 일어나는 생(生)과 좋은 감정이 사라지는 사(死)와 멸(滅)을 벗어날 수 있으니, 그러한 집착된 마음을 벗어난 다음에 오는 평온하고 평안한 상태에서, 저절로 움직여지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자재행(自由自在行)이라고 강조하심이다.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이러한 고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렇게 청정한 마음을 지녀야 할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 냄새, 맛, 닿음, 생각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도 말아야 하느니, 마땅히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세존께서 수보리의 말에 수긍하시고 이어, “응당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은 이와 같은 청정심을 내야 할지니, 금, 은, 유리 등 칠보의 색장엄(色莊嚴)에 마음을 머무르지 말지며, 하늘 풍류(風流)와 육종진동(六種震動) 등 일체의 성장엄(聲莊嚴)에 마음이 머물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리고 “도향(塗香), 말향(末香), 소향(燒香) 등 일체의 향장엄(香莊嚴)에 마음이 머물지 말아야 하며 천인(天人)의 헌공(獻供) 등 일체의 미장엄(味莊嚴)에 마음이 머물지 말아야 한다. 또, 하늘 옷과 금침(衾枕), 좌복(座服) 등 일체 촉장엄(觸莊嚴)에 마음이 머물지 말아야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불가사의의 크고 작은 모든 법 등 일체의 법장엄(法莊嚴)에 마음이 머물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리하여 “응당 그 마음을 청정히 하여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살아나게 할 것이다” 하시었다. 또한 “이와 같이 상이 있는 모든 장엄과 상을 떠난 장엄 등, 있고 없고, 안이나 밖이나, 유무내외(有無內外)에 마음이 철저히 머물지 아니하여, 눈이 일체색(一切色)을 대할 때 색경계(色境界)에 머물지 아니하며,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이 일체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의 모든 경계를 대할 때, 위의 다섯 경계에 머물지 아니하면, 이는 일체 처소와 일체 경계에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되느니라” 하시었다.
좋고 싫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지는 것은 공업의 소치다. 공업이란 많은 이들이 함께 받는 업을 말한다. 업은 좋은 것을 구하는 만큼 똑같이 싫고 나쁜 과보가 저절로 생기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업이 좋은 사람 즉, 욕심이 없어서 좋고 싫은 고락의 감정이 그만큼 작은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 설사 그런 일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마음의 동요 없이 항상 중도적인 여여한 마음을 지니므로, 걱정 근심 고통과 괴로움이 없거나 작다.
반대로 업이 큰 사람 즉, 욕심이 많은 사람은, 좋고 싫은 고락의 감정이 그만큼 많이 느끼게 되는 고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자주 많이 다가온다. 또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걱정 근심 고통과 괴로움을 크게 느끼게 된다. 따라서 부처님과 부처님 법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와 인과, 공과 중도를 여실히 잘 알아서 굳건한 믿음의 신심이 꽉 들어찬 이들은, 육근에 의해, 육진경계에 끄달리지 않는다. 그러니 연기와 인과는 내가 만들어서 내가 받게 되는 것이고, 공과 중도는 사물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으로써, 아무리 사물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거울속의 그림에 불과할 뿐이고, 공과 중도의 마음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이기는 하지만, 거울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니, 거울과 같은 마음을 중도와 공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부처님과 불법에 대한 신심을 굳건히만 가지게 된다면, 좋지 않은 업은 멀리 사라지고 다가오지 않을 것이고, 중도와 공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저절로 가질 것은 가지고, 해야할 일은 열심히 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받아들이고, 막을 것은 철저히 막아지는, 지범개차(持犯開遮)가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연기와 인과에 대한 신심과 공과 중도에 대한 믿음으로써,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이러한 고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렇게 청정한 마음을 지녀야 할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 냄새, 맛, 닿음, 생각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도 말아야 하느니, 마땅히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소위 청정한 마음이라 함은 찬 재(灰)와 같이 적연(寂然)함을 이름이고, 토목과 같이 고연(固然)함을 이름 함이다. 정신이 혼미하여 넘어질 것 같은 혼도(昏倒)와 같이 죽음에 임하는 것을 이름 함이 아니며, 색성향미촉법의 육진육경에 머물지 않을 뿐이다. 이 육진경계에 머물지 않는다고 해서 그 마음의 본심조차 끊어지고 사라지는 단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본 마음은 사연(死然)한 적멸(寂滅)의 단공(斷空)이 아니고, 고연(固然)한 토목이나 화석(化石)이 아니다. 단지 모든 경계를 따르지 않을 뿐, 영영불매(靈靈不昧)한 본 마음은 항상 여여 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마땅히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고 하심이다. 이는 곧 육진경계에 걸리어 그 마음을 상실치 말고, 육진경계에서 육진경계에 끌리지 아니한 가운데 그 본 마음을 살리라 하심이다. 유하면 거울이 만 가지 물상을 비칠 때 거울 속에 비록 만 가지 물상의 그림자들이 움직일지라도 거울의 밝음만은 만 가지 물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음이다. 그 밝음을 잃지 않고 항상 여여 할지니, 이 마음이 항상 이와 같다.
예전에 TV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kbs “무엇이든 물어보살” 오락프로그램을 잠깐 보는 순간 깜짝 놀랄 멘트를 들었다. 보살로 분장한 서장훈이라는 전직 농구선수가 미스터트롯에 나온 이도진이라는 가수의 고민에 대해 “인생에는 좋고 싫은 고락의 총량이 있다”고 하면서 “지금의 시련은 좋았던 시절이 있었던 만큼의 과보이고 또 다시 좋은 시절이 올 것” 이라는 맥락의 조언을 해주는 장면이었다. 불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반인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데 대해서 적잖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나, 인과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 스스로 지은 인과의 업보라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고통과 괴로움도 충분히 반감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좋고 싫은 고락의 인과가 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는다면, 청정자성으로 들어가서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어떤 인연을 만나더라도 늘 마음이 자재하고 평안할 수 있음이니, 순간순간 찰나에 라도 본질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본질은 의외로 간단하다. 더 좋거나 더 싫고 나쁜 것은 없다. 좋은 만큼 싫고 나쁘고, 싫고 나쁜 만큼 좋은 것이다.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인과법칙(因果法則)이다. 다만 좋고 나쁜 시절인연의 시차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윤회고(輪廻苦)를 벗어나려면, 좋고 싫은 고락을 분별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어렵다. 업습(業習)이 깊어서이다. 그래서 인과와 연기, 공과 중도를 여실히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분별심을 여의어야 한다. 그 뿐이다.
[1658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