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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크로드를 지나간 것은 비단(silk)뿐이다?
불교문화를 말하면서 그 교통의 주된 현장인 실크로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실크로드라는 명칭은, 불교사의 입장 혹은 동아시아 문화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실크로드보다는 사실 ‘붓다로드(buddha-road)’ 혹은 ‘다르마로드(dharma-road)’라는 명칭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문화교류사의 현장으로서 실크로드는, 그것을 통해서 불교가 서역으로 북상하고, 다시 서역에서 동아시아로 동전(東傳)해 온 길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문화적 종합체이다. 이 문화적 종합체는 성공적으로 전파되었을 경우 그 사회를 전반적으로 변모시키게 된다. 기원 전후에 시작되어 11세기경에 일단 마무리되는 불교의 중국 전파는, 그래서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 전체의 변혁을 낳은 일종의 문화혁명이기도 했다. 동아시아 사회는 불교를 수용하면서 왕성한 생명력으로 변화를 거듭했고, 그 변화는 다시 불교의 변형을 촉진시켰다.
2. 동아시아에서 서양과 같은 인쇄혁명이 안 일어난 이유는?
흔히 인쇄문화의 혁명으로 서양의 근대문화를 촉발시킨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활용한 ‘42행 성서’의 인쇄를 주목한다. 하지만 그것은 서양 위주의 시각일 뿐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초래한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가 그보다 천여 년 전에 동아시아 불교인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는 사실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그저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 우리의 것이었다는 사실만을 자랑하면서, 그것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되새기지 않는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 부분 역시 존재한다. 목판을 활용한 인쇄사업이 그렇게 융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속활자를 서양보다 무려 200년 가까이 앞서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왜 서양처럼 인쇄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 (중략) … 결국 동아시아 세계는 서구의 인쇄혁명과 같은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조건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아시아에 그러한 문화적 변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인쇄문화 자체가 실은 불교가 동아시아 세계를 만남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이다.
3. 위경(僞經)은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
위경(僞經)은 말 그대로 가짜 경전이라는 뜻이다. 의경(疑經)은 그 진위 여부가 의심되는 경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진짜 말씀이 아닌 것 혹은 진짜 말씀이 아닌 것으로 의심되는 위경이나 의경은 버려야만 하는 것일까? 이것이 이번 장을 시작하는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실은 1,500년 가까이 논의되어 온 케케묵은 질문이기도 하다. … (중략) …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실 중의 하나는 위경이나 의경이 크게 두 가지 관점에 의해서 구별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는 한문 불전의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것 곧 원본 없이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에서 창작된 것을 일컫는다. 또 하나는 그 경전에 포함되어 있는 가르침의 내용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점에 의해서 구별되는 경우이다. 전자는 중국에서 창작되었다는 점 때문에, 후자는 그 가르침의 내용이 불교적이지 않다는 점 때문에 거짓 경전 혹은 진위가 의심스러운 경전으로 분류된다. … (중략) … 여전히 논란이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동아시아 불교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대승기신론』은 일찍부터 경록의 작성자들에 의해서 중국인의 위찬(僞撰)으로 의심받았던 논서이고, 아직도 인도에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중국에서 만들어졌는지를 두고 논쟁이 진행 중인 경우이다. 또 우리가 한국불교의 사표로 추앙하는 원효의 유명한 주석서인 『금강삼매경론』의 원전인 『금강삼매경』만 하더라도 삼계교에서 자신들의 사상과 신행방식을 정당화하고 전파시키기 위해 제작한 위경이다. 이 두 경우는 진위 여부를 떠나서 그 탁월한 사상성 때문에 ‘진짜’ ‘가짜’라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아시아 불교인들에게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그 점이야말로 이 경과 논서가 인도에서 만든 것이든 중국에서 만든 것이든 가장 동아시아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 (중략) … 필자의 흥미를 끄는 것은 전혀 다른 데 있다. 위경과 위론의 자취가 사라지는 것과 선종이 등장하여 세를 확장해 가는 시기가 서로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중국불교인의 저작임을 확실히 하면서 ‘경(經)’이라는 이름을 취한 독특한 저술 하나를 만나게 된다.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이른바 『육조단경』이 그것이다. 이것은 ‘조사(祖師)’의 어록이 ‘경’과 동일시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선종이라는 매우 중국적이고 독특한 견해를 가진 종파가 등장하면서 대장경에도 전혀 새로운 분류가 하나 추가되는데, ‘어록(語錄)’이 그것이다. 흔히 법어(法語)라고도 많이 불리는 이것은 실상 부처와 동격 혹은 부처를 초월하는 선종 조사의 이미지에 의지해서 채록되고 대장경에 포함되었다.
4.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어떤 종교든지 구원론이 있다. 아니 구원론이 있기 때문에 종교라고 불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구원의 장치는 그 종교의 성장 과정에서 부닥친 다양한 환경에 따라 다르게 설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불교는 자력에 의한 해탈을 본연으로 삼았기 때문에, 타력에 의한 구원의 신앙은 기본적으로는 불교 전통에서 한 걸음 비켜 서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 역시 타력(他力)에 의한 구원의 신앙전통이 일찍부터 있었다. 특히 동아시아 불교 전통이 그러한데,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에 대한 왕생(往生) 신앙이 대표적이다. … (중략) … 동아시아 불교의 신앙문제를 언급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것이 아미타불 신앙이다. 오늘날 한국의 불교신자들은 무의식 중에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한다. 이와 같은 신앙태도는 일본이나 중국, 티베트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오죽하면 남전불교에서 북전불교를 비판할 때 나오는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신앙에 대한 반박일 정도이다. 역으로 그만큼 아미타불 신앙은 동아시아 불교의 신앙형태를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는 북전불교의 한 갈래이고,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이 발견되는 곳 역시 북전불교의 전파지역에 한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북전불교의 전파지역에만 아미타불 신앙이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전파되고 흥성했던 지역의 정치적 지형도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인도에서 출발하여 실크로드를 거쳐서 중국으로 유입된 북전불교가 동아시아 불교의 주류를 형성했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인도에서 북전불교가 출발한 지역의 정치적 지형도가 이후 동아시아 불교의 성격을 상당 부분 결정하게 된다. 이 북전불교가 출발한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간다라 지방이다. 흔히 간다라 미술로 더 잘 알려진 지역으로, 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지방을 중심으로 한 곳이다. … (중략) … 다시 말하면 북전불교가 성장했던 지역이나 동아시아로 유입되는 경로에 해당하는 지역이 모두 치열한 전쟁터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간다라와 카슈미르 지방만 하더라도 인도 토착인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이민족들이 경합했던 지역이었고, 그것은 이란 지역이나 중앙아시아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원 전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실크로드를 통한 통상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이권을 향한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실크로드의 이권을 둘러싼 전쟁의 와중에 이 지역은 다양한 문화가 뒤섞이면서 새롭게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어낸 문화의 용광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지역 민중들의 삶의 풍요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 (중략) … 아미타불은 ‘무량광불’이라는 이름 외에도 광명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19개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릴 만큼, 광명을 그 상징으로 하는 부처님이다. 불상의 머리나 몸 뒤에 광명을 나타내는 광륜(光輪, 혹은 光背로도 불린다)은 대승불교의 흥기 시대에 이미 제작되고 있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주신(主神)인 아후라 마즈다의 영향이라고 한다. 곧 조로아스터교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불교와 만났을 때, 광명사상과 그 광명이 떨어지는 서방의 개념이 합해지고 다시 불교신앙과 결합되어, 서방정토의 아미타불 곧 무량광불이라는 사상과 신앙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5. 스님들이 구족계를 어기면서까지 노동을 하는 이유는?
출가자 곧 승려가 노동을 한다는 생각은 적어도 인도불교 초기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부처님은 승려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생활규칙으로 사의(四依)를 요구하셨다. 출가 승려는 그 생활에 있어서 ‘네 가지 규칙’[四依]을 지켜야 했는데 분소의(糞掃衣), 수하주(樹下住), 걸식(乞食), 진기약(陳棄藥)이 그것이다. … (중략) … 특히 걸식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걸식이든 아니면 재가자가 호의로 음식을 제공한 경우이든, 어느 경우라고 하더라도 재가자의 호의가 없다면 음식을 얻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더욱이 음식의 경우는 아주 특별해서, 제단에 받쳐진 음식이나 버려진 음식 혹은 나무열매 같은 것을 스스로 채취해서 먹는 것 역시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적어도 식생활만은 철저하게 재가자의 호의에 의존하도록 강제되었다. 시주 받은 음식은 반드시 그날 오후가 되기 전에 먹어야 했고, 다음날을 위해서 음식을 저장하는 것 역시 허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전적으로 승가의 경제가 재가자 곧 사회의 호의에 의해서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규정이며, 따라서 승가공동체가 유지·존속하기 위해서는 사회로부터의 우호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 (중략) … 그러나 이와 같은 생활 규정은 불교가 동아시아에 이르렀을 때 극단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생산노동을 존중하는 승가공동체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백장 스님의 “하루 일하지 않는 자는 하루 먹지도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일갈은 동아시아 불교에서 승려들의 노동에 대한 의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같은 의식의 전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속고승전』 권12의 「석담칭전(釋曇稱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 (중략) … 동아시아 불교에서 승려 개인의 관점에서 구족계를 포기하고 노동을 선택한 예는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승려 개개인이 아니라 승가공동체의 노동의식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는 대체로 7세기를 전후한 1백 년 간에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승려의 노동을 공동체의 차원에서 인정해 간 동아시아 불교집단이 둘 있다. 하나는 삼계교(三階敎)이고 하나는 초기의 선종(禪宗) 집단인 동산법문(東山法門) 계통이다. 하지만 승려에 대한 관점에서도, 노동에 대한 관점에서도, 양자의 의식은 확연히 다른 바가 있었다.
6. 망자가 뱃삯을 입에 물고 저승에 가는 이유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혀 아래에 작은 은화를 넣고 장례를 치렀는데, 저승으로 가기 위해서 스틱스 강을 건널 때 뱃사공인 카론에게 뱃삯으로 지불하라는 의미였다. 이것은 에로스와 프쉬케의 사랑 이야기에 등장하는 카론의 은화에서 유래한 풍습이다. 그런데 비슷한 관념이 우리에게도 역시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장례풍습에도 역시 죽은 사람의 입에 동전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저승으로 가는 노잣돈이라고 부른다. 두 관념 사이에 그 의미가 완전히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리의 이 같은 관념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지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서 그 유래를 알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언제부터 그런 풍습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그렇다. … (중략) … 불교에는 이 카론의 은화와 관련해서 두 군데에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강승회(康僧會, ?~280)가 번역한 『육도집경(六度集經)』의 제68화이고, 또 하나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대장엄론경』의 제15화이다.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내용상으로 그렇고 『육도집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다듬고 정리한 것이 『대장엄론경』의 이야기이다 … (중략) … 프쉬케가 에로스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저승까지 다녀오는 등 여러 가지 고난을 겪는 이야기와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신화가 우리에게서도 역시 발견되는데, 바리 공주 이야기 곧 오구 대왕 신화가 그것이다. 그리스에서부터 한국까지, 장례풍습이나 신화의 전승까지, 고대 세계 서로간의 활발한 문화적 교섭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그리고 그 가교 역할을 떠맡은 것이 불교였다. 불교가 서역을 거쳐 동아시아 세계에 도착하는 동안 그들이 만났던 다양한 풍습과 사고방식 역시 낙타 위에 실어 날랐던 것이다. 카론의 은화가 우리나라에 이르러 저승 가는 노잣돈이 될 때까지
7. 요임금, 순임금만 훌륭한 군왕이었을까?
동아시아 사회에서 이상적 군주 혹은 군왕은 누구일까? 동아시아인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 조금이라도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있거나 중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봤던 이들이라면 대개는 요순(堯舜)이나 주 문왕의 치세를 손꼽지 않을까. 요순은 전설 속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인물들이고, 주 문왕의 치세는 공자가 그리도 바라 마지않았던 주공(周公)의 정치가 실현되었던 시대이다. 특히 유교적 소양을 기본으로 삼았던 관료를 비롯한 중국의 식자층에게는 공자가 꿈꾸어 마지않았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요순이나 주 문왕이 이상적 군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 특히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종종 신하들이 왕에게 간할 때, 이들 유교적 이상군주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언뜻 옛날에는 몽땅 다 그랬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 조선시대에만 국한되는 상황일 가능성이 더 크다. 조선은 성리학을 기조로 하는 사대부[士]들의 사회였던 반면에 고려는 불교를 국시로 하는 거사(居士)들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같은 현상이 중국사회에서도 벌어진다. 시대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유교의 덕목 특히 집안[家]을 지탱하는 효(孝)가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식되었던 근대 이전의 중국사회에서는, 유교적 이상 군주가 숭앙되었던 한편으로 불교적 이상 군주 역시 자주 전범(典範)으로 제시되곤 했던 것이다 … (중략) … 이처럼 아쇼카 왕은 불교도로서의 치적과 그 통치방식에 나타난 불교적 사유 때문에, 예부터 불교도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인식되어 왔다. 아쇼카 왕이 ‘법(法)의 아쇼카(Dharmāśoka)’라고 불리거나 혹은 아쇼카라는 이름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인식되었던 이면에는 이 같은 아쇼카의 이상적 통치방식과 행적이 존재했다. 이 때문에 이미 인도에서 『아육왕전』 같은 불전들이 형성되었으며, 여러 불교 전승들에 아쇼카 왕과 관련된 전승들이 삽입될 정도였다. 이처럼 불교도의 이상적 통치자로서의 아쇼카 왕의 행적은 불교가 동아시아 사회에 전파되었을 때 다시 한 번 빛을 발하게 된다. 아쇼카 왕의 전기와 행적을 전하는 불전(『아육왕전』)이 처음 번역된 것은 서진시대(西晉, 306)이며, 양 무제 시절(512)에 『아육왕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또 불교가 중국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심심찮게 아육왕에 관련된 전설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같은 아육왕 관련 불전의 번역과 아육왕 전설의 유포와 확산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대개 두 가지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
8. 절에서는 기도만 해야 한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사원을 부르는 다양한 명칭들을 소개하였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사찰의 다양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이 다양한 명칭을 가진 불교사원들이 중국에 세워졌을 때 사원의 기본적인 기능 외에 가장 먼저 수행해야 했던 기능은 역경장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초기의 전법승들은 대부분 중국 사람들에게 불법(佛法)을 전한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불전을 가지고 왔고, 중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불전을 한문으로 번역해야 했다. 이러한 일들이 중국의 불교사원에서는 147년경부터 송나라 말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원나라 지원연간(至元, 1271~1294)에 만들어진 불전목록집인 『지원록(至元錄)』에는 약 6천 권에 가까운 불전들이 목록화되어 있으니, 망실된 것은 차치하고라도 얼마나 많은 불전의 번역작업이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범어로 된 방대한 분량의 경론들을 번역하다 보니 자연스레 역경장이 사찰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또한 번역된 경론의 보관 장소로서의 기능 곧 도서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단순히 불전만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었다. 불전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인도는 물론 중국의 사상과 사회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 역시 필요했기 때문에, 사원에서는 불전만이 아니라 그 밖의 전적까지 수집 소장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찰이 종합정보센터로서 기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 인도와 서역에서 전래된 의례를 중심으로 한 예술 및 풍습과 중국의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풍습이 접촉하고 재생산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과거 동아시아 불교에서 사찰이란 불교도의 신앙공간이면서 교육의 중심이었고, 번역센터이면서 도서관이었으며, 한편으로 외국과 문화예술을 교류하거나 그것을 재생산하여 공연이 이루어지는 공연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더욱이 근세 이전에 중국과 한국이 수용한 대부분의 문물이 불교의 전파경로를 따라 수용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찰은 외부에서 유입된 첨단의 지식과 문물들을 1차적으로 수용하는 문화센터이기도 했다. 따라서 불교가 흥성하던 시기의 동아시아 사회에서 사찰은 사상과 문화, 정보의 중심지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었고, 지식인을 포함하여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불교에 대한 관심과 반응 역시 대단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불교가 흥성하던 시절의 동아시아 불교사원은 ‘첨단의’ ‘종합화된’ ‘지식문화정보센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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