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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순수검도 원문보기 글쓴이: ★아톰★
[추억] 코마네치와 덕호... |
중학시절 내 영웅은 두 명이었다. 그 중 한 명은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깜찍한 자태를 뽐냈던 루마니아의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동구권의 철의 장막이 무너진 후 미국에 온 훨씬 나이들고 살도 오른 최근의 코마네치를 TV에서 본적이 있지만 나는 그녀를 76년 당시의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싶다. 처음 느꼈던 감정은 연민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군사정권 하에서 오래도록 배웠던 공산주의에 대한 교육이 그런 감정을 부추겼던 것이 틀림없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배출해 낸 걸출한 체조영웅들. 그러고 보니 넬리 킴도 그 당시 소련 올림픽대표 체조선수였다. 고문당하거나 맞아 죽지 않기 위해 저만큼 되기까지 죽을 힘을 다해 연습했겠지...라는 생각을 했으니 내가 너무 단순한 놈이었는지도 모른다. 옛날 서커스단에서 아크로바트를 하는 소녀들에 대해 서커스단장이 일부러 식초를 먹여 뼈를 부드럽게 한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처럼 완장을 찬 공산 간부들이 체조선수들에게 강제로 빙초산을 먹이는 장면까지 머리속에 구체적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평균대 위에서, 또는 뜀틀 출발선에서 천사같은 미소를 띄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애처롭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그래서 당시 체조 종목 금메달을 모조리 휩쓴 코마네치의 선전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고 그 후 골수 팬이 되고 말았다. 나의 또 한명의 영웅도 코마네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덕호는 수업시간이면 교실 맨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곤 했다. 그는 어디선가 되게 얻어맞은 적이 있는 듯 콧등 한가운데가 움푹 내려 앉아 있었고 턱 밑에는 칼자국같은 작은 상처들을 몇 개 씩이나 달고 있었다. 가끔 그 웅크린 자세로 앞을 올려다 볼 때면 그 눈빛에서 만만치 않음 뿐 아니라 몹씨도 반항적인 냄새를 감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바짝 메말라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 같은 마른 목소리. 친구들은 그를 '칼잡이 송덕호'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별명은 그의 외모와는 달리 지극히 섬세한 감수성이나 착한 심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렇다고 '구미 쌍칼', '방배동 쌕쌕이' 식의 양아치적 별명 또한 아니었다. 물론 그가 칼잡이임에는 틀림없었다. 덕호는 학교와 검도부의 영웅으로 소년체전과 각종 검도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어 오곤 했기 때문이다. 죽도를 삐죽히 끼워넣은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오전수업이 끝나면 검도부 도장으로 쓰이던 강당을 향해 어슬렁 어슬렁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은 학교 주변을 배회하던 양아치들이나 동네 깡패들을 무척이나 닮아 있었고 싸움을 걸어오는 옆반 짱을 한주먹에 날려버릴 만큼 그쪽 방면으로도 전도양양했지만 그는 검도 외에는 관심도 없는 듯 했고 또 친구들에게 전혀 거들먹거리지도 않는, 교실에서도 친구들과 온갖 장난을 함께 치며 잘 어울리는 악동이자 호쾌한이었다.
그런 덕호가 코마네치 사진을 오려 책갈피에 끼우고 다닌다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내게 비밀을 들킨 덕호는 얼굴까지 빨개지며 당황했지만 코마네치 이름이 무수히도 등장하는 짧지 않은 대화가 오간 후 우린 어느새 둘도 없는 친한 친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청소당번이 되어 교실청소를 마칠 때 쯤이면 덕호의 검도부도 연습이 끝날 시간이었다. 강당은 중학교동과 고등학교동을 사이에 둔 운동장 한쪽 끝의 높은 언덕 위에 있었고 강당과 운동장은 긴 석재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난 청소당번이 아닌 날에도 가끔 그 계단에 앉아 덕호를 기다리곤 했는데 3학년 선배들이나 고등부 선배들은 천상 범생 짜투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내가 덕호와 친하게 지내는 걸 의아해 하는 듯 했다. 아마도 검도부에서는 덕호도 무척 터프했던 모양이고, 그랬으니 거의 무패에 가까운 높은 승률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검도 명문이었던 우리 학교의 검도부는 그 군기가 엄청 쎘던 것도 사실이다. 강당 계단에서 덕호를 만나는 것이 거의 매일의 일과처럼 되어버린 것은 그해 겨울로 접어들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강당을 호젓하게 감싸고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잎사귀를 모두 떨구고 이제 문밖에만 나서면 입김이 폭폭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던 시절에도 난 가끔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늦어지는 덕호의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때로는 먼저 연습을 끝낸 덕호가 기다려 주고 있기도 했다. 훤칠한 키를 하고서 차가운 강당 계단에 철푸덕 엉덩이를 붙이고 어깨근육이 드러나는 앞으로 웅크린 자세로 앉아 있다가 청소를 끝내고 찾아오는 내게 멀리서부터 씩 웃으며 손을 작게 흔드는 그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당시 그는 이미 어른 티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웃는 모습은 평소 무표정한 얼굴과는 사뭇 달랐고 한창 험악하게 일그러진 주먹다짐 직전의 표정과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웃곤 했는데 분식집에서 학교와 검도부와 코마네치에 대한 얘기들을 하면서 그는 언제나 그런 웃음을 하고 있었다. 덕호의 시련이 시작된 건 중3이 되면서부터였다.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그가 소년체전 서울대표에서 제외된 건 나이때문이었다. 대표 제외사실이 확정된 날, 그는 세상이 끝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거의 얘기하지 않던 집이나 가족들에 대해 그는 어느날 그 강당계단에 나란이 앉아 처음으로 내게 입을 연 것도 그 날이었다. 그에게 두 살 위의 형이 있었다는 얘기도 그날 처음 들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고 만 형이 그의 부모님께 남긴 마음의 상처는 물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난 그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그렇게 덕호와 친하게 지내면서 한번도 그의 집에 가본 적이 없고 그의 아버지도 만난 적이 없다. 첫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절망은 아마도 오래 계속되었던 것 같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절망은 알콜중독과 성격파탄으로 이어졌던 모양이다.
덕호는 그렇게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지만 그 이유는 결국 아버지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또래들보다 나이가 좀 많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소년체전에 출전하지 못하는 것도 그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배후에 그의 아버지의 파탄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콧등과 턱의 상처들 뒤에도 역시 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말하는 덕호도 듣던 나도 눈물이 뺨을 흘려 내렸다. 그런 사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친구의 삶에 대한 열정, 검도에 대한 열망이 내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후 졸업할 때까지 거의 아무런 대회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역시 나이제한 때문에 아마도 참가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는 3학년 내내 밤늦게까지 도장을 떠나지 않고 죽도를 휘두르며 연습에 열중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이젠 그런 제한없이 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잡념을 떨쳐버리려는 몸부림이었을까. 강당 계단에서 덕호와의 만남은 그 후 뜸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틈틈이 우린 무슨 대단한 계획이라도 세우는 듯 진학과 진로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덕호는 물론 검도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난 소설가나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덕호는 이미 스카웃 손길을 뻗쳐오는 검도명문 학교들 이름을 거론하며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하며 들어도 그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어디를 선택할지 묻곤 했고 난 덕호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난 여전히 어린애로 남아 버린 것 같은 웬지모를 열등감을 느끼면서 나같은 비특기자는 뺑뺑이가 진학과 운명을 결정해 줄거라고 자조하곤 했다. 이젠 없어져 버린지 오래인 성동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덕호의 어머니를 처음 보았지만 그 얼굴이나 분위기를 이젠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상기된 표정의 덕호가 날 끌어안으며 기뻐하던 일은 생생히 기억난다. 그는 검도명문인 서울 북공고로 진학하게 되었고 난 신문로의 서울고등학교였다. 나로서는 뺑뺑이의 결과치곤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당시에도 체육특기생 스카웃에 거액의 계약금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고등학교에서 맘껏 꿈을 펼칠 수 있게 된 덕호를 나는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편으로는 헤어지게 됨을 아쉬워해야 했다. 하지만 꼭 서로 연락하고 곧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호를 다시 만난 것은 고3 진급을 앞두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졸업후 처음엔 곧잘 주고받던 전화통화가 뜸해지더니 언젠가부터는 서로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내가 중학시절 이후 줄곧 살고 있던 남가좌동의 우리 집을 기억하고 있었고 어느 일요일 저녁 느닷없이 우리 집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검도를 그만 둔 것은 반년쯤 전의 일이라고 했다. 중 3시절 시작된 그의 불운을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북공고 검도부의 엄청난 군기를 그가 당해내지 못한 것도 아니었고 시작부터 성적이 나빴던 것도 아니었다. 몸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이미 오래부터의 일이었지만 덕호는 그동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간질이라는 것이 그토록 건강하던 덕호에게 발병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간질은 불치병 아닌가. 덕호의 집은 여유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당시 거기까지 당장 생각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그는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덕호는 얼마후 도장에서 똑같은 증세로 다시 정신을 잃었고 곧 검도부에서 퇴부조치를 당했다고 했다.
멋적은 미소를 지어가며 그렇게 말하는 덕호의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내 마음을 헤집고 들었다. 그가 얼마나 낙담하고 충격을 받았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난 친구의 불운을 대할 때면 제대로 된 위로의 말 한 마디 못해주고 마는 얼간이다. 자꾸 갈라지는 덕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점점 더 슬퍼지는 마음을 껴안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또 덕호를 잊었다. 스스로도 버거운 내 생활에 묻혀 살아야 했고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6.25 당시 하나님과 세운 약속을 지키겠다며 신학교를 다시 다닌 끝에 목사가 되면서 우리 집안도 경제적으로 끝없는 추락을 하던 시절이 계속되었다. 난 덕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학비를 낼 형편이 못됨을 충분히 알고 있던 난 서울대 농대를 가라고 집요하게 종용하던 담임선생님을 뿌리치고 학비면제 조건을 내건 외대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의 대학생활이 막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하던 시기에 덕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번에도 아무런 통보없이 캠퍼스에 홀연히 나타났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미 전에 살던 집에서 이사를 나왔던 당시 덕호는 아마 내 고등학교에서 내가 진학한 대학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는 눈부신 흰색 해군 수병복을 입고 있었다.
이번엔 학교앞 다방에서 그는 역시 담담한 말투로 그의 계속되는 불운을 이야기했다. 고3시절, 연기하려면 얼마든지 입대를 연기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덕호는 자포자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애쓴다던 그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포기하고 자퇴서를 냈을 때 앞으로 사회가 저학력의 그를 얼마나 냉대할 것인지 남들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고 현실적이었던 덕호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될데로 되라는 심정이었는지도...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해군도 영장을 받고 입대하는 것인지 자원하는 것인지 아리송해진다. 그는 이미 몇번 군함을 타고 출항했었다고 하며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위에서 느꼈던 것들을 마치 시를 읊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시인이 되어 있었다. 군복은 그에게 아주 멋지게 어울렸다. 하지만 그 흰색 군복에도 어딘가 서글픔이 묻어 있는 듯 했다.
그는 신체검사를 이상없이 통과했고 입대 이후 아직까지 한번도 발작이 없었다고 했다. 간질이 그런 식으로 자연적으로 낫는 수도 있는지 의아했다. 아니면 언젠가 재발병하기 위해 몸속 어딘가에 숨죽이고 잠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애당초 간질이 아니었는지도... 덕호의 운명은 마치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마구 내돌려쳐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었을 것이다. 검도는 그의 인생이었다. 비록 늠름한 수병이 되어 있는 덕호였지만 그 질문을 들었을 때 그는 마치 팔다리가 잘린 사람처럼 참담한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덕호는 그 대답만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덕호는 그 후 더 이상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를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것은 중학교 교정 강당 앞 긴 계단에 앉아 있던 덕호의 어른스런 모습과 손을 흔드는 그의 입가에 번지던 예의 정겨운 미소다. 덕호야 잘 있니... ?
강당 앞 긴 계단에서 나를 맞던 미소
- 딴지 인도네시아 특파원 가람 |
첫댓글 글쓴이가 저와 같은 고교 동문이군요. 학교 다닌 연대도 비슷한데..누굴까?
제가다녔던 고등학교의 전신이 성동중학교 였지요 저는 성동 고등학교를 졸업햇구요...뭐랄까 전 그시대를 살지않았지만 85년 고등학교 당시에도 글의 덕호라는 사람처럼 제주변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던기억에 맘이 않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