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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의도
영적 헌신
영적 각성
2016년 8월 2일
놓아버림 몰입 중!!
토론
신에 이르는 길은 만가지라고 하는데, 수많은 종교와 영적 유파에서는 자신의 길이 유일하다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지의 소치이거나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시도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시대의 위대한 영적 스승들은
다양한 길을 통해 이해에 도달했습니다.
모든 깨달은 스승에게
공통적인 것은
'에고를 완전히 내맡겼다는 것'이지요.
그 방식은 달랐다고 해도
최종적인 결과는
같았습니다.
신은
편애하거나
배척하지 않습니다.
선택은
구도자의 영감과
카르마적 경향성의 결과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미 신에게 선택받았습니다.
참나는 이미 현존하며,
그렇지 않다면
생명과 존재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받아들임은
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
신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 입니다.
하늘은 누구에게는 있고
누구에게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태양은
임으로 소수에게만
골라 비추지 않습니다.
신은
완전하며
전체적이지요.
아첨은 인간적인 개념입니다. 사람은 태양을 예배할 수 있지만 태양은 조종당하지 않습니다. 각성은 이득이나 성취가 아니며 착하다고 해서 보상으로 주어지는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모두가 유아적인 개념들이지요.
신은 불변이며
누군가의 조종에 따라
호의를 배풀지도, 혹은
흥정이나 아첨에 유혹당하지도 않습니다.
예배는
몰두와 영감을 강하게 해주어서
예배하는 사람에게 유익합니다.
신은
멎어있고 침묵하며
움직임이 없습니다.
구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일까요?
자기 회의나 소심함 대신에
'확신과 안심'을 갖고 시작하세요.
자신이
탐구해볼 만한 가치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유보없이 받아들이고
'신에 대한 진실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겠다'고
굳게 결심하세요.
유보없이 받아들여야 할 사실은
단순하며 대단히 강력합니다.
그러한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엄청난 영적 진보를 가져다 줍니다.
1) 자신을 향한 신의 사랑과 의지가 살아있는 증거는
자신의 존재라는 선물입니다.
2) 성스러움, 공덕, 선함, 자격있음, 죄없음 등의 측면에서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 마세요.
그러한 것은 모두 인간적인 개념인데, 신은 인간적인 개념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3) 신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개념이 무지임을 받아들이세요.
신은 평화이며 사랑일뿐 그 밖에 어떤 것도 아닙니다.
4) 신을 판관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벌받은 경험에서 비롯된
죄책감의 투사로서 일어난 에고의 망상임을 각성하세요.
신은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각성하십시오
5)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단순하게 (200이하로 측정되는) 부정성을 피하라는 것이었고
가르침의 목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무조건적 사랑의 수준에 도달하면
죽음뒤에 영혼의 운명이 확실하고응 그 영혼은 안전하다는 것을 예수는 알고 있었지요.
이것은 근본적으로 정토불교와 같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에서 가르친 것과 동일한 결론입니다.
6) 구원과 깨달음은 다소 다른 목표임을 각성하세요.
구원은 에고의 정화를 요구합니다.
반면에 '깨달음은 에고의 완전한 해소'를 요구하지요.
깨달음이라는 목표가 더 힘들고 근본적입니다.
7)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사적인 내가 아니라
동기부여자인 의식의 비개인적인 성질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십시오.
'영적 영감과 봉헌'이 수행을 밀고 나갑니다.
8)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미 실현되었음을 각성할때 불안감의 자리에 편안함이 들어섭니다.
목표는 영적 봉헌의 길위에 있는 것이지요. 영적 발달은 성취가 아닌 생활방식입니다.
그것은 자체의 보상이 따르는 지향이며 중요한 것은 자신의 동기가 갖는 방향입니다.
9) 앞으로 전진하는 모든 걸음이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영적봉헌과 수행은 생명에게 주는 선물이며 인류에 대한 사랑입니다.
10) 신에 이르는 일정표나 정해진 행로는 없습니다.
각 개인의 행로가 저마다 독특하다고 해도 가야할 길은 상대적으로 모두에게 공통적입니다.
영적작업이란 인간에고의 구조속에 내재된 공통적 인간 결함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인간결함이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에고 자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인간이 되면서 더불어 상속받은 것이었습니다.
에고의 세부는 과거 카르마에 따라 다릅니다.
11) '간절한 기도'는 봉헌과 영감을 고조시키고 진보를 촉진합니다.
12) 누구나 신의 은총을 입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몰두하는 영적 구도자는 현인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지요.
에고는 무서우리 만큼 강할 수 있어서
높은 영적 존재들이 갖는 힘의 도움이 없다면 에고는 스스로 신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여태까지 살았던 모든 위대한스승이나 화신의 의식의 힘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우린 그것을 이용할 수 있지요.
명상을 통해
어떤 스승이나 스승들의 가르침에 집중하면
구도자는
그 스승의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특정 단체나 혹은
어떤 독점적인 단체의 회원들만이 아닌
'모든 구도자가 다 성공하는 것'이
진정으로 깨달은 현인의 의지입니다.
개별 구도자의 영적 발전이
인류 전체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승들의 깨달음 또한
구도자에게 이익이되지요.
그 힘과 에너지는
불러서 쓸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요구조건도
의미도 없습니다.
영적작업이 분투로 느껴지는 일이 많은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에고는
결정짓는
습관적 지각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각을
해체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먼저 확인해야 하지요
사람은
에고를 갖고 있는데 대한
죄책감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에고의 기원을 살펴보는 것으로
촉진될 수 있지요.
인간은 의식진화에서 몹시 어려운 위치에 있습니다. 이 평면에서 생명은 전통적으로 태초의 진흙에서 출발하고 원시적인 유기체를 갖는다고 묘사됩니다. 생물학적 생명이 시작된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의 유기체가 생존하기 위해 무수한 도전과 맞서는 것을 봅니다. 동물의 삶에 대한 프로그램들만 보아도 에고의 기본적 동기와 장치들은 단순하고 뻔하지요.
인간 삶에는
동물의 전략이 따릅니다.
텃세권,
종들간의 전쟁,
영토전쟁,
집단통치,
사냥,
경쟁자 죽이기,
짝짓기 의식,
새끼들의 보호 및 양육,
형제간의 경쟁,
위협,
남들에 대한 통제,
그밖에 공격당하는 것과 위험한 것에 대한 두려움,
'무리에서 쫒겨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동물패턴은
이른바 본능이라는 생리적, 감정적 반응속에
뿌리내리고 있지요.
지난 수천년 동안
이런 본능이 세련되어
학습된 행동양식으로 일어났는데,
학습된 행동양식은
사회와 부모의 입력과 훈련을 통해
강화되었지요.
이는
개인적인 것만이 아닌
무지막지하게 강화된 사회적 패턴이 되었고,
정치적, 국가적, 사법적 위치성과
신념체계로 정립되었습니다.
지성은
생존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고,
지성이 세련되면서
그 모든 기본적으로
동물적인 프로그램들이 정교해졌지요.
의식에는
고유한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프로그램은
모두 의식이라는 하드웨어 자체속에
소프트웨어로 설치됩니다.
비록 이제는
지성으로 표현되지만
이러한 생존양식의 기본형태는
동물의 세계로부터 일어났습니다.
교육조차도
일차적으로
생존과 성공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에고의 고유한 동기는
생존과 이득이고,
둘 다 어려움을 기반으로 하지요.
인간 유기체의 메커니즘 또한
두뇌의 신경화학과
두뇌구조 및 두뇌의 고유한 고통/쾌락 반응에
지배됩니다.
저절로 작동하는
이 보상 메커니즘은
우회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덫이지요.
인간의 창의성은
인공적인 보상/쾌락장치,
말하자면 두뇌의 화학적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재프로그램할 수 있는
인공물질같은 것을 발견함으로써
이 메커니즘을 낚았습니다.
이렇듯
상속되는 유전적 중독 성향조차 있는데
이는 다른 모든 목표추구를 빛바래게 하고
그것을 대신합니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이 모든 수준의 행동과
프로그램된 태도는
전 인류의 집단적 에너지 장내에서
어떤 에너지 장을 방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보통의 앎으로는 알 수 없는
영향력의 장으로부터
강화받습니다.
이러한 의식수준은
그 프로그램들을 지지하며
사회적 찬성과 반대를 유도하는
대중매체를 비롯한 온갖 형태의 인간 의사소통을 통해
더욱 강화됩니다.
비록
에고의 생물학적 뿌리에 대한 이 요약이
자명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목적은
개인이 자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이러한 메커니즘의 기원과 중요성에 대한 앎을
제고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개인이 자신의 의지로
에고구조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각성할 때
죄책감은 덜어지며,
자신과 타인에 대한
깊은 연민이 일어나지요.
인간 조건은
일차적으로
카르마적 소여(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비난없이 연민과 더불어
그러한 것으로서 수용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인류는
감정적 본능과
그것을 상쇄하는 영적 깨어남의
힘 사이의 긴장의 영역에서 살아갑니다.
(즉 동물/천사의 갈등)
에고가 생물학적 뿌리를 갖고 유전적으로 전달되며 사회적으로 강화되고 강력하게 재프로그램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에고는
초월될 수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에고의 본성이 아니라
에고를 "나" 혹은 "나자신"과
동일시하는 문제입니다.
에고는
그것으로서 상속받은 것이며,
실제로 개인과는 무관한 "그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그것을 개인화하고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겨나지요.
에고 구조라는 '그것"은
독특하거나 개별적인 것이 아니며,
카르마적 편차는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비교적 비슷합니다.
정말로 개인차가 나는 것은
자신이
에고 프로그램에 의해
노예화된 정도
입니다.
따라서
지배정도는
자신이 에고와 동일시하는
범위에 따라 정해집니다.
본질적으로
에고에는
아무런 힘이 없고,
에고 프로그램을 약화시키는 힘은
사람이 영적으로 진보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집니다.
그것이
의식척도가 갖는
진짜 의미지요.
우리는
사람들이 에고 프로그램에 어떻게 지배당하는지 볼때
앎이나 통찰이 없다면
스스로 헤쳐나오는 것이 상대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각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탐욕, 증오, 두려움, 중독, 혹은
자부심에 휘둘린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좀더 현명했어야 됐어라는
가설적, 도덕주의적 위치성을 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의식하지 못한다는 게
바로 그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죄란
사실 의식진화상의
한계로 볼 수 있습니다.
붓다와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한계를 공히 "무지"라고 불렀지요.
진화는
점진적 변화로 그 자체를 표현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길을 더 멀리 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한 사실을 알 때
용서와 연민이
분노, 두려움, 증오 혹은 선고를 대신합니다.
남을 기꺼이 용서하려는 자발성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수용할 줄 아는
우리 자신의 능력속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죄악적 방식으로 표현되는 한계를 수용하는 것은 부도덕이나 윤리의 결여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연민과 용서가
찬성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200이하의 에너지 장에서 사는 이들은
무자비한 고통을 겪기 쉽지요.
기독교 전통에서 사람들은
개인을 위해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동시에
비온전성 및 부정성(악)에 맞서지 말며,
그러한 것을 피하고
그런 것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죄인이란
'영적 성장이 아직 초보적인 불운한 사람'으로
볼수 있지요.
에고와 친숙해지는 것의 목적은 에고를 무장해제시키고 수용을 향한 길을 열기 위한 것입니까?
우린 에고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은 채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책감과 자책을 비롯한
여러 부정적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을 압니다.
많은 사람이
영적작업에 관여하는 것을 꺼리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지요.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에고의 부정적 측면을
타인이나 심지어
신에게 투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질투, 앙갚음, 복수, 편파성 등은
모두 신이 아닌
에고의 속성입니다.
좀더 큰 맥락에서
우리는 에고를
악이 아닌 일차적으로
이기적인 동물로 볼 수 있습니다.
동물자기를 이해하고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영향력은 줄지 않습니다.
내면의 동물은
애완동물처럼 우스꽝스럽고
재미있을 수 있으며
우리는 아무런 죄책감없이
내면의 동물을 즐길 수 있고
그것이 훈련되고 제대로 길들여지기를 기대할 수 있지요.
이 훈련이 바로
"문명화"라는 말이 뜻하는
것입니다.
에고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쏟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각성은
점진적 과정입니다.
에고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이해는
영적 진보를 앞당겨줍니다.
에고는
무찌르거나 패배시켜야 할
적이 아니고,
정복해야 할 악도 아니지요.
에고는
연민 어린 이해를 통해
해소됩니다.
군사적, 외교적 실수의 태반은 적을 철저히 연구하지 않은데서 생겨납니다. 이는 많은 저명한 군사 지도자들이 서글프게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러시아를 과소평가했습니다. 히틀러는 영국의 결의를 과소평가했지요. 스탈린은 독일의 이중성을 과소평가했고,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을 공격한 뒤 '우린 잠자는 거인을 깨웠다'고 탄식했습니다.
따라서
구도자들은
에고 구조에 정통해질 것을 권유받고
부정이나 죄책감으로는 에고가 해소되지 않는다는 걸
알도록 권유받습니다.
흥미롭게도
에고의 지배력은
수용, 친숙함,
연민어린 이해에 의해 약화되지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기비판, 선고, 두려움,
수치심은 에고를 강화시킵니다.
연민의 정을 가지고 보면 에고는 더이상 무시무시해 보이지 않습니다.
에고는
초월됩니다.
왜냐하면
에고는
궁극적 실상이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서 비롯된
한 세트의 생존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에고의 감정표현은 아이들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에고는 동물일뿐 아니라 아이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힘은 주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방법을 통해
정신분석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안나 트로이트는
에고의 방어기제에 대해
서술했습니다.
그녀의 저작덕분에 우리는
본능적 욕구를 자기에 대항하여
내면으로 돌리는 행위는 물론,
억압, 억제, 부정, 투사와 같은 개념들에
익숙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동물의 세계에서 비롯된 타고난 욕구'는
정신분석학에서
'이드'라고 부르는 것 안에
감춰져 있었습니다.
초자아(양심)의 통제 메커니즘은
부모와 사회에서 유래되었고,
그 다음에 의식적 에고는
이 기본적인 생물학적 욕구를 사회와
화해시키는 일을 맡았지요.
자아이상은
자기가 되고자 소망하는
이상화된 이미지였습니다.
그것은
영웅, 이상화된 기질, 영적이상,
성격형과의 긍정적 동일시를 포함했지요.
페르소나는
사회에 내놓는 에고의 그런 면이었고
그 페르소나의 스타일이 이른바
성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은
이 심령의 패러다임을 확장시켜
인간의 영적 차원까지 포함시켰는데,
흥미롭게도
인간의 영적차원 역시
생물학적 충동과 마찬가지로
'소여'로서 타고난 것입니다.
융은 또한
인류의 공통성을 보았고,
그것에 개념보다는
상징을 통해 작용하는
'집단무의식'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나중에
자기의 본성은
이른바 자기심리학을 거쳐 정교해졌고
영적측면은
자아초월 심리학으로
연구가 진전되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에 수반되는 문제들은
실존적 분석의 주체가 되었고
그래서
정교한 심리학이
수세기 동안 철학을 사로잡았던
중대한 영역, 소위 현대 휴머니즘안에 출현했습니다.
에고를 이해하기 위해 그 모든 주제를 다 알 필요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알기 위한 인류의 분투를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고찰일 뿐입니다.
그런 것은
에고의 지배를 초월하려는
지성의 노력을 나타내지요.
지금까지의 얘기에서 지성은 에고에 대한 답이 아니라 사실상 에고가 정제된 것이 분명해집니다.
옳습니다.
400대로 측정되는 지성은
의학과 기술분야에서의 엄청난 성취와 함께
과학으로 표현되어
사회를 이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성은
양날의 칼입니다.
지성은
사람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것을 막아줄 수 있지만
또한 핵무기와 독가스를 발명해 낼 수도 있지요.
400대는
여전히 형상과 낮은 힘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분자든 개념이든 말입니다.
한계는
형상자체속에 내재해 있고,
형상의 한계는 그
것을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섬을 통해서만 피할 수 있지요.
그래서 형상너머로 가고자 소망하는 이들은
전통적으로 영적이란 이름이 붙은
비선형적 영역에 의지합니다.
사람이
낮은 힘을 넘어 힘power의 영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것은
완전한 에고가 끈질기고 한껏 강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형상은
많은 노력을 요하는 반면,
힘의 은총은
엄청난 과제를 수월하게
성취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힘의 독특한 성질이지
그것의 양이 아닌데,
왜냐하면
힘은 정량화할 수 있는 것의 영역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힘은
과정속에서 소진되지 않고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촉매와 비슷합니다.
예를들어
공적인 삶에서 '미안합니다'라는
사소한 한마디가
국가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는지
보세요.
대부분의 전쟁은
탐욕, 증오, 혹은 자부심의 수준으로 측정되는
의식 에너지 장에서 발발합니다.
자부심에 대한 해독제는
겸손함인데,
이는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아니라
허영과 가식을 포기하고
현실적 평가를 고려한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겸손함의 이로움은
그것이 나중에 자멸을 막아주는 것은 물론
"얼굴에 계란을 맞는" 수모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겸손함이란
사실 한계와 매개 변수들에 대한 정확하고
현실적인 평가와 앎을 뜻합니다.
이렇듯
지성은
부정확하지 않습니다.
지성은
보다 앞선 영적 앎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그릇된 도구일 뿐이지요.
명석한 지성은
자체의 한계를 알게 되고
그래서 자신의 밖에서 답을 구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것을
최첨단 과학에서도 볼 수 있는데,
지금 과학은 의식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과학은
의식의 본성에 관한 이해없이
의미있는 진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에고가 의식진화에 필요한 단계라는 것을 압니다. 항상 우주에 대해 설명하고 연구한 뒤, 다음 단계는 그 근원을 찾기 위해 형상너머를 바라보는 것일까요?
그것은
논리적인 진행입니다.
형상에 대한 연구는
물리학, 화학, 천문학, 우주론 등의 표현에서
지성에게 대단히 매혹적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은
우주는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갈것인지를 묻기 시작하지요.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또 다른 동물본능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호기심입니다.
동물은
항상 먹이, 짝, 혹은
은신처를 발견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찾아다니는
만족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
탐험은
인류가 타고난 것인데,
'가장 높은 수준에서그것은 영적 탐구'에
이릅니다.
영적 탐구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자기의 기원과 운명은 무엇인가?
신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와 같은 의문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면 호기심은 구도자에게 유익합니까?
겸손할 때
호기심은 쓸모있는
하인입니다.
그러나
식별력이 없을때
그것은 심각한 함정으로 이끌 수 있지요.
호기심은
순진한 구도자를
올가미와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함정은 물론
막다른 골목과
불필요한 혼란으로 이끌수 있습니다.
진정한 스승이 필요한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겸손함이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명백한 사실,
즉 인간의 마음은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는 능력이 없다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진실과 거짓을 식별할 수 있다면
역사적으로 전쟁도 사회문제도
무지나 빈곤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깨달을 것이고,
인류의 의식수준이
여러 세기에 걸쳐 190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테지요.
그러한 맹목은 어떻게 생겨난 것입니까?
동물은
형상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생존의 기본요소는
육체, 먹이, 적을 식별할 줄 아는 능력이지요.
따라서
동물 뇌는
지각을 촉진하도록
진화합니다.
에고의 내용 너머를 바라볼 때
우리는 깨달음을 구하는 이에게
지극히 중요한 성질-지각이라는
에고의 기본 기능에 이르게 됩니다.
동물에게 지각기능이란
대단히 유용하지만,
그것은 의식장에서 이원성의 창조를 낳습니다.
의식장에서는
소재, 방향, 타이밍이 생겨나는데
왜냐하면 동물생존에는
그러한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사냥감을 포획하려면
여기와 대비되는 저기의 이원적 지각을
형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상의 한계는
감각에 대한 의존을 낳습니다.
그리하여
공간과 거리개념이 생겨나고
에고는 이 지각이 실상을 나타낸다고
결론짓습니다.
동물이
더 높은 실상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었는데,
그것은 동물의 필요와 필요의 충족은
모두 내용과 형상의 영역내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에고가 생각형태로
이미지를 조작하는 법을 배웠을 때
단순한 동물이기를 그치고
그 너머로 진화했지요.
이미지는 더욱 복잡해졌고
덕분에 대상이 어떻게 다른지는 물론
어떻게 비슷한지를 식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뇌는 확장되어
이제 사고의 복잡한 계산상의 요구를
추상적인 개념, 상징, 언어로
다룰 수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뇌는
기왕의 동물 뇌에 추가된 것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래서
새로운 뇌는
예전 것과 새것의 장단점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두 영역사이에
단절 스위치는 없었지요.
그래서
동물감정이
지성을 두려움, 분노, 탐욕등으로
물들일 수 있었습니다.
지성은 또한
동물 욕구와 관련된 이미지의 연쇄를
조작해낼 수 있었습니다.
주된 장애는 에고의 내용만이 아니라 구조가 아닙니까?
옳습니다.
영적진보가 가능한 것은
마음이 이해를 통해
에고의 내용을 재맥락화하고
에고의 메커니즘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렇게 되면 사람은 더이상 아무것도 모른채 에고에 휘둘리지는 않게 되지요. 이러한 진보는 선불교의 유명한 그림 "십우도"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십우도에서
에고는
처음에는 야생동물과도 같습니다.
다음 그림에서
에고는 길들여지고
통제됩니다.
그 다음에
에고는 초월되고
마지막 그림에서 그것은 사라집니다.
깨달음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진화에서 핵심요소를 요약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에고는
습관적으로
위치성을 갖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세요.
순진한 사람에게서
그것은 대개 말로 표현되거나
의식되지 않습니다.
위치성은
그 다음에 자동적으로
표면적 대립쌍의 이원성을 창조합니다.
이 지점에서 마음은
지각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데,
지각은 의미와 의의를
왜곡, 확대 혹은 축소시키는 렌즈와도 같습니다.
이 지각은
신념체계와 추정의 산물이고,
그래서 혼란스러운 필터가 되지요.
따라서
본질은
이원적 위치성에서 지각될 수가 없습니다.
입력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통해 처리되는데,
이것들은 동시에 후속 프로그램을 편집합니다.
그래서
실상은
지각의 스크린뒤에 가려
흐려집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지각되고 편집된 정보에 대한 해석속에서
살아가지요.
이 처리과정은
지극히 짧은 시간 지체를
창조합니다.
지각의 이 편집기능은
동시에 의미를 해석하는데
여기서 지성과 특히 기억이
의미있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에고기능의 구조와 복잡성, 그리고 자동적으로 지각을 편집하는 경향 때문에 에고는 무시무시한 장애로 비칩니다.
에고의 구조와
기능 모드를 안다면,
에고의 취약성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상하는 동안에 경험적으로
명백해지지요.
비개인적인 목격자/관찰자의 관점에서
우리는 에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지켜봅니다.
결국 나는
내용이나 데이터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내용에서 몇걸음 떨어져 있는
비개인적 장이라는 각성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 사람은
자신이 참가자나 주체가 아니라
관객임을 각성하게 되지요.
에고로부터의 그리고 내용이라는
한정된 지각적 이원성으로 이루어진
에고의 세계로부터 탈동일시를 촉진하기 위해
오랜세월에 걸쳐 수많은 영적수행과 기법들이
발전해왔습니다.
의식의 본성에 대한 영적 지식
또한 도움이 됩니다.
한가지 바른 정보는
엄청난 분량의 그릇된 개념과 위치성을 말소시키는 힘을
그안에 갖고 있습니다.
영적 정보에는
현인, 스승 혹은 화신의 참나에서 비롯되는
막강한 힘의 고주파, 반송파가 동반되고
따라서 그것은
에고의 약한 에너지 장에 비해
훨씬 강력합니다.
'참나는 맥락'이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자기는 내용'임을 아는 것은
이미 엄청난 도약입니다.
순진한 구도자는
내용을 뒤섞는 일을 계속할 뿐입니다.
여러 생이
에고와 에고의 죄를 극복하여
끝내 어느 신의 약속에 도달하고자 하는
몸부림속에서 흘러가는데,
그 신은
어딘가 다른 곳(하늘나라),
다른 시간에(사후에) 혹은
아주아주 나중에 사람이 충분한 공덕이나 선업을 쌓을 경우
다른 생에 있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영적 진보는 느려보일 수도 있고 혹은 예기치 않게 갑자기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물론이고
겸손함과 깊은 내맡김이 있을 때
과정은 단축될 수 있습니다.
표면상으로
시간이 지속되는 것은
사람들이 결과를 구하기 때문이지요.
에고에 대한 에너지 공급이
단절되었다고 하더라도
에고의 관성은
완전히 소진될 필요가 있는듯 합니다.
예를들면 거대한 유조선과 같은 거함은 엔진을 끈 다음에도 완전히 정지하기까지 몇마일을 더 가는 일이 많습니다.
에고는
흔히 조금씩 붕괴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일단
'에고의 실상이 진짜 나라는 믿음이 무너지면 '
에고의 해소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에고에 바쳤던 충성과 충실함을
신의 궁극적 실상을 향해 돌릴 때
틈이 생겨납니다.
그 틈새로
성령으로 나타나는
신의 은총이 흘러들지요.
세상과의 절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부 가르침에선 그것을 필요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보통
세상을 완전히 떠나서
외로운 은자가 되거나
은거 수도회나
심지어는 침묵수도회 혹은 정규 수도회에
들어가는 전통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수사와 수녀들은 금욕, 가난, 순결, 겸손, 봉사, 단순함을 요구하는 영적 본헌으로 존경받아왔습니다. 일반적 구도자들조차 다양한 시기에 혹은 정해진 피정(안거) 기간에라도 위와같은 요소의 일부나 혹은 전부조차 지킵니다.
세속의 소유물을 버리는 것은 물론
세상의 매혹에서 물러나
보다 평온한 장소와 생활방식을
찾아 가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가장 넓은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의
절연은
진실과 신이라는
실상에 대한 각성을
가로막는 환상과
장애를 버린다는 것
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신에 이르는 모든 길은
거짓과 절연하고
사랑, 평화, 성스러움, 연민, 용서, 자비,
자선을 퍼뜨리는 것에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무지와 절연하고
진실을 어둠과 절연하고
빛을 택한다는 뜻이며,
증오와 분노, 자부심, 악의, 탐욕,
이기심과 같은
에고의 유혹을 끊어낸다는 의미지요.
절연이란 또한
비난이라는
이원적 덫으로부터의 자유,
혹은 양극으로 분열되어
대립쌍의 양극이라는
위치성에 매몰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가장 단순한 절연은
단순한 거부 혹은
수용하지 않음이지요.
높음을 선택하기 위해
낮음과 싸울 필요는 없으며
그저 그러한 대안을 거절하면 됩니다.
첫댓글 각성!
영적진보가 가능한 것은 마음이 이해를 통해 에고의 내용을 재맥락화하고 에고의 메커니즘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정보에는 현인, 스승 혹은 화신의 참나에서 비롯되는 막강한 힘의 고주파, 반송파가 동반되고 따라서 그것은 에고의 약한 에너지 장에 비해 훨씬 강력합니다. 참나는 맥락이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자기는 내용임을 아는 것은 이미 엄청난 도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