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서하면 은행정 천년 나무
- 천군만마 장수, 군주의 위엄
함양군 서상면의 남덕유산 기슭에서 여름에는 손이 시리고 겨울에는 발이 따뜻한 물이 솟구치니 남강의 첫물인 참샘이다. 이 참샘 물이 지리산에서 온 임천을 산청 생초면에서 만나 경호강이란 이름표를 잠시 달았다가 이내 군 소재지를 지나면서 다시 남강이 되어 함안군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남덕유산 육십령은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 사이의 동서를 잇는 구불구불 고갯길이다. 산세가 하도 험해 60명이 모여서야 고갯길을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참샘의 남강물이 그 육십령을 내려와서 처음 만나는 마을이 함양군의 맨 위쪽 고을인 서상면이다. 여기에 주논개(1574~1593)의 묘가 있다. 논개는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에서 선비 주달문과 밀양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논개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천하 건달인 숙부 주달무가 토호인 김 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아버렸다.
1578년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는 경상도 안의현 봉정마을 외가로 피신했다. 그러자 김 풍헌이 장수 현감인 최경회(1532~1593)에게 논개 모녀의 심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최경회는 논개 모녀의 억울함을 알고 이들을 무죄로 인정,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부인 나주김씨의 시중을 들게 했다.
1579년 논개는 최경회를 따라 무장현, 1582년 영암군, 1584년 영해 부사를 거쳐 1587년에 사도시정일 때 한양, 1590년 봄 담양으로 왔다. 오래도록 병환에 시달리던 부인이 숨을 거두며 혼인할 것을 권유했던지라, 최경회는 성년이 된 논개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해 겨울 어머니 순창임씨의 죽음에 담양 부사직을 사임하고 화순으로 낙향하며 논개에게 고향 장수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으로 화순과 장수에서 의병을 모집, 무주의 우지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논개는 이를 도우며 보필했다. 1593년 진주성이 위태롭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최경회를 따라 논개는 제2차 진주성 싸움에 참여했다. 6월 21일부터 강력한 화력의 왜군에게 진주성은 무너졌고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남강의 핏빛이 사라지기도 전이다. 왜군은 촉석루에서 기고만장, 전승기념 술판을 벌였다. 이때 기녀로 위장한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강낭콩보다 푸른, 양귀비꽃보다 붉은 열아홉 꽃다운 나이였다. 그 뒤, 장수군의 의병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수습 논개의 고향인 육십령 너머 장수 장계면 주촌마을로 운구하다, 염천의 시신 훼손을 우려하여 육십령 아래 함양군 서상면 방지 마을 골짜기에 묻었다.
이 서상면 아랫마을은 서하면이다. 이곳 운곡리 은행정 마을의 은행나무는 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할머니 나무이다. 3백여 년 전 서하면 소재지 송계마을의 할아버지 은행나무가 죽자, 그 후로 열매는 맺지 않고 가지만 무성히 퍼졌다고 한다. 옛이야기로 이 마을은 배의 형상이어서 우물을 파면 배의 밑창을 뚫는 것과 같다며 우물을 못 파도록 했다. 그런데 은행나무 앞에 우물을 파자 송아지가 빠져 죽었고 사람들은 부랴부랴 우물을 메웠다고 한다.
두 팔 벌려 여섯 아름이 넘는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34m로 가까이에서 쳐다보려면 고개가 아프다. 가슴 높이에서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가 되고, 다시 5가지로 뻗었으니 그 자태가 사뭇 우람하고 아름답다. 천년 세월의 풍파를 겪었으나 아직도 울울창창하니, 마치 천군만마를 거느려 호령하는 장수이거나, 군주의 위엄으로 가득하다. 바라보니 신령스럽다.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함양 서하면 은행정 천년 나무 – 호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