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소설로 쓴 소설이 폭우의 날들이었다. 그저 억수로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어릴 적 어머니의 병문안을 갔던 때의 기억과 죽은 친척형의 죽음 소식을 듣고 폭우 속으로 그가 신혼살림을 살았던 집으로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전형적인 부랑인처럼 아내에게 버림받고 알코올중독자에 당뇨합병증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사내, 하지만 그는 보호시설에 있는 자식들을 찾아와 자신이 아버지 노릇도 못한 채 이렇게 허망하게 가야 한다는 사실로 괴로워한다. 그런 그를 마지막으로 본 건 그가 얼마 안 되는 돈을 빌려 간 때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내와 신혼살림을 차렸던 집 마루에서 죽어간다. 그가 죽은 후 잠시 폭우는 그쳤다가 다시 검은 먹장구름으로 흘러간다는 내용이었다.
<힘든 날>, 오늘 소책자의 제목이었다. 가장 힘겨운 고통의 시간 가운데 오히려 더 달콤한 체험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힘든 일이 있기에 우리 인생은 그만큼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이리라. 곡절있는 삶을 말하려면 나는 항시 그 흐드러지듯 웃음소리를 내는 고모를 떠올린다. 아버지 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고모님은 항시 이야기를 하다 이차저차저차저차 해서 하는 식으로 이야기의 흥을 돋군다. 고모의 이야기는 끝이 없을 정도로 이어진다. 꼭 이야기 스무 고개를 넘어가는 것처럼 고갯마루를 넘으면 또 다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억지로 힘든 일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참으로 많은 일들과 부딪친다. 더 사람답게 살려면, 인간적이 되려면 그만큼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자식노릇, 아비노릇, 그리고 아내와 남편노릇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 아침마당에선 자상한 남편이 나와 아내의 몫까지 챙기면서 처가에서 이쁨 받고 사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송수식 박사는 그 남편을 보면서 오히려 요즘 아들 가진 부모를 걱정했다. 세상살이 쉽지 않고 또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역시 부족함이란 남는다. 완벽할 수가 없다. 다만 사람 사는 세상 곡절을 가진 채 또 얼키고 설킨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가야 한다.
세상사 이야기가 어찌 술술 풀리기만 할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고,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다 보면 이야기 속에는 인생사 부침처럼 그렇게 오르고 내리는 흐름이 있게 마련이다. 그 흐름을 따라 지속하면서 그 흐름을 살려가는 것이 어쩌면 이야기를 살려가는 방법이리라. 그저 견뎌야 할 때는 견디면서 견책을 달게 받고 또한 그 수고로움과 마땅이 짊어져야 할 것들을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 나이들어갈수록 더 짊어져야 할 짐이 무거워지는 건지도 모른다. 더 많은 사람 속에서 더 많은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만 몸은 더 약해지기만 하니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건 당연한 일이다. 나이들어갈수록 더 자신을 비워내고 더 가볍게 할 수 있다면 모를까.
눈을 감았다 뜨면서 숨이 멎는 듯한 웃음소리를 이으면서 깨어나시는 고모님의 그 한 맺힌 대화처럼 세상사 이야기의 곡절이 있지 않겠는가. 그저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렇게 필연적으로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될 곡절이 있다. 사람들이 겉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그 곡절마저 없을까. 세상사 겉으로 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다 알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한, 우리는 그 곡절을 간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 말하지 않지만 짐작은 하고, 또 일일이 설명은 하지 않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말과 행동으로 그 의지를 불태운다.
그들도 얼마나 참았을까. 그들도 얼마나 많은 고개를 넘어온 것일까. 작중 인물, 세상사 인물, 혹은 우리 주변의 인물들 모두가 다 그들의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수없는 아우성, 부딪치는 파도, 그리고 생사를 가르는 물결이 끝없이 밀려온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운명처럼 얼키고 설키면서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과 만난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접어든 채 우리는 다른 길을 꿈꿀 수 있는 자유조차 없이 한 많은 인생길을 간다.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길이기에, 그 곡절은 더 애간장이 탄다.
가네, 가네, 이제 가네, 이제 가면 언제 올까. 워이가 워이가. 북망산천 나는 가네, 워이가 워이가, 상둣꾼의 상두소리와 요령소리를 따라 만장 휘날리던 시골길을 따라가던 어린시절의 기억처럼이나 우리네 인생 도시에 있건 저 산골 벽지에 있건 간에 한 번 왔다가 서서히 가는 것이야 마찬가지가 아닌가. 옛날처럼 사람을 작별하는 곡소리가 애절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듯 세상에 나왔다가 또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을 곳곳에서 본다. 낙엽이 진 길, 헌인릉 가는 길 쪽으로도 근조라고 씌여진 버스의 뒷모습이 슬쩍 보이며 사라진다.
인생이 끝이 있는 것이기에, 어쩌면 문학이라고 하는 것도 존재하리라. 인생이 끝이 없고 그저 이렇게 환락같은 세상, 그저 즐기면서 천년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사람들은 그저 신처럼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잘 살아야 백년, 그 백년도 못 살고 가는 인생이다. 그렇게 벼랑에 몰린 사람들은 그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그저 막된 선택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마치 자살테러를 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살다 살다 못살면 그저 죽기밖에 더하겠냐면서 이를 악 물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약을 먹어도 죽지 못하는 사람, 그저 눈물 뿐이고 더 이상 세상살이에 아무런 낙도 없는 사람들이 그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근근히 살아가기도 한다. 그저 조용히 소리 없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어느 땐가 책방에 들렀던 중학생의 입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세상 막다른 길이 얼마나 가까운 건지,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은 그저 세상을 떠나는 새처럼 또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일까. 청산도에서 찍었다는 서편제의 롱샷, 진도아리랑가락에 서서히 신명이 나는 순간이 그토록 우리네 가슴을 적셔오는지도 모른다. 금산의 꽃각시, 그 소리 좋던 양반도 세상을 떠났다. 가난한 아이들 데려다 키우고, 또 동네방네 노인들 환갑잔치며 칠순잔치에 소리꾼으로 불려다니던 그 금산 꽃각시가 부르던 진도 아리랑 가락 또한 장구가락에 밤새며 부르던 목쉰 노랫소리처럼 애절하게 밤을 가르며 들려온다. 어디 하루하루 곡절없는 날이 있었던가. 기쁘면 기쁜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얼마나 웃고 울었던가. 그 많은 사연 뒤로 하고 떠나는 사람들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 곡절있는 날들, 그 소리 없는 정막 속으로 높은 피리음 하나 흔들리지도 않고 삐익 정적을 깨며 다가온다. 마치 초혼의 곡조인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