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4. 주일예배설교
고린도전서 13장 1~13절
사랑을 다시 배웁니다.
■ 음악 방송을 듣거나 보는 편이신가요? 음악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가사는 무엇일까요?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요즘 노래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10년, 20년 전 노래만 해도 가사 중에 <사랑>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노래에 사랑 가사가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이라는 주제가 다루기 편해서일까요?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면 앨범 판매가 잘 돼서일까요? 사랑은 모든 사람이 목말라 하는 주제이기 때문일까요?
아마 이유를 하나로 규정짓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 각각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은 사랑에 목말라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찾고, 사랑에 방황합니다. 이에 문화의 한 축인 노래가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도 <사랑>을 아주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사랑 이야기’(Love story)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아예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명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이 들은 설교나 강의가 ‘사랑’일 것입니다. 어쩌면 매주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제 ‘사랑’에 대해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만 할까요? 성경이 사랑 이야기이고, 매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가장 이해 못 하거나, 실천이 가장 안 되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둘 중 어느 이유일까요? 두 가지 다입니다.
■ 일명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은, 모두에게 익숙한 본문입니다. 특히 사랑의 태도를 이야기할 때면 어김없이 인용되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탁월한 대답을 주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사랑에 대해 놓쳐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합니다. 하나는, 사랑의 ‘절대성’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영원성’입니다.
사랑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1~3절이 설명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본문은 아주 단호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고, 모든 수고가 무가치하다고 말씀합니다. 심금을 울리는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은사와 믿음을 보여도, “사랑이 없으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자선을 베풀어도, “사랑이 없으면”, 헛된 수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일에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엄청난 것이라 해도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 됩니다. 무엇이든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은 것은 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합니다.
그렇다고 이를 ‘사랑지상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면 다 된다는 것이 사랑지상주의입니다. 사랑이면, 그 어떤 행위도 다 용납되고 용서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지, 사랑이면 다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크게 두 축으로 역사하십니다. 사랑과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고려하지 않는 사랑지상주의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혹시 ‘사랑지상주의’를 13절 때문에 확신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아마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으로 ‘사랑지상주의’를 확신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면 믿음과 소망을 사랑의 하위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3절의 말씀은 믿음-소망을 사랑의 하위개념으로 이해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셋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를 지원하는 중심축입니다. 믿음은 소망과 사랑을 지원하고, 소망은 사랑과 믿음을 지원하며, 사랑은 믿음과 소망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셋의 관계는 유기적이지 위계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의 의미/의도는 무엇일까요? 사랑이 최고라는 의미가 아니라, 결론과 영원성의 의미입니다. 믿음과 소망의 결론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소망을 굳건히 하고, 소망 가운데 믿음을 보전·성숙시킴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의 종착지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소망은 지상에 국한하지만,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삶은 사랑만 있을 뿐입니다. 믿음과 소망은 최종 완성지인 천국에 이르기까지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은 사랑의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8절이 더욱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 방언, 지식이 언제까지 필요할까요? 천국 가기 전까지입니다. 모두 폐기의 시점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언제까지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영원성입니다.
사실 이 사랑의 영원성은 결과로서의 영원성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영원성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은, 사랑이 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있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은 나중에 필요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은 사랑의 영원성을 말씀하신 것이자, 제일 앞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랑지상주의’가 아닌 사랑을 중심으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이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할 때, 신앙과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무엇이 사랑이고, 어떤 것이 사랑이 아닌지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4~7절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무엇보다도,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는 참을 수 있을 만큼 참는 것이 아닙니다. 참을 수 없을 때도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셈법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셈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래”라는 시간은 천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온유해야 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내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참고(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무례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너를 위해 내 유익을 포기하고, 너를 위해 나를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친절하고 예의바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줏대 없이 만만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선과 입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를 결코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보고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이래야 사랑은 아름답고 변치 않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사랑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너무 이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랑을 쉽게 이해하는 이 시대에 ‘이게 과연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르십니다. 이것은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치열하게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시야와 지식이 죄 가운데 가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야와 지식을 쫓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인 그 때에는 이렇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9~12절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지금은 다 이해하지 못해도, 이렇게 사랑하라고 하시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기가 힘들다고 선을 긋지만, 이 또한 이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이 말씀하시는 사랑을 회피해서도 안 되고,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사랑을 내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의 힘으로 하십시오. 물론 우리의 믿음의 성숙도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덜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도 이 땅에서는 늘 불완전하게 성장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힘으로라야 원하시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령님께 맡기면 자신이 아무 수고를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내 수고가 성령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지, 성령님의 은혜로 내 수고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믿음의 고백과 수고가 성령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다 힘에 부치면 이를 또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 사랑, 어렵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울 뿐입니다. 해보면 해볼수록 쉬워질 것입니다. 사랑할수록 성령님의 은혜가 점점 충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할수록 사랑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오래 참을수록 진국이 되는 이유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이 사랑하는 삶으로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비전교회가 사랑으로 충만한 믿음공동체, 소망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