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도원
임병식 rbs1144@daum.net
무릉도원은 그저 지어낸 이야기 / 옛 전설 속의 이야기로만 여겼다
그런데 현시의 세상 그것도 / 몽환적 별천지 장관을 보다니……
순천 하고도 괴목 골짜기 소문 듣고 / 찾아간 그곳은 수수 만 평 복숭아밭
분홍 천지의 세계가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저런 곳에는 신선이나 살지 / 세속에 찌든 사람이 어찌 범접하랴
차를 타고 지나며 감탄했다
내 생에 저런 구경거리는 다시 /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바라보며
감탄사만 연발했다
내가 보기에 복숭아 고을 월등은 이름이 / 달리 월등이 아니라
보여주는 선경 자체가 월등이었다
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즉흥시는 내가 순천 승주 월등고을을 둘러보면서 읊조려 본 것이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을 때, 그리고 이미 꽃이 지고 난 이후, 수확을 마친 시기에 지나간 적은 있으나 정작 붉은 꽃술을 폭죽처럼 터뜨린 개화기에는 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친구가 찍어 보낸 사진을 보고서 마음이 동했다. 때마침 이날은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임시 공휴일이라서 투표를 마치고 서둘렀다. 진즉 동부수필회원들과 선암사 문학기행을 예정한 터라 조금 코스를 조정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그런 복사꽃 만발한 무릉도원을 구경하랴,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들르게 된 월등고을 복숭아 단지. 산모퉁이를 몇 구비 돌고 고개를 서너 개 넘으니 눈앞에 커다란 분지가 나타나는데 먼빛으로 연한 색채가 드러났다. 그것은 싱그러운 기운을 품고서 연무에 가려진 실루엣 상태로 비쳤다.
신비 속을 뚫고 봄바람과 더불어 다가가자 아련한 실체는 점점 선명해지면서 제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한 덩어리로 보이던 것이 농장주들이 해놓은 구획정리에 따라 세분화하여 나타났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의 눈으로 볼 때 그러할 뿐, 전체적으로는 일매지게 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늘은 똑같이 일조량을 쏟아부어 한 빛깔, 한 모습으로 통일시켜 놓고 있었다.
차를 타고 좁다란 길을 지나자니 꽃이 만발한 복숭아밭은 앞에도 꽃, 뒤에도 꽃, 길 양편에도 온통 꽃 천지를 이루어 꽃 사태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속에 파묻힌 기분을 무어라 표현할까.
나는 잠시 눈을 감고서 문득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을 떠올렸다. 한 어부가 산속에서 동굴을 발견하고 그 안을 들어가 보니 분홍빛 만발한 복숭아밭이 있었다는 그곳. 어부는 선경의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과 어울려 선경에 취해 지내다 돌아왔다는 그곳. 그 장면을 상상하며 나도 지금 그런 구경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아니, 그런 상상을 하지 않더라도 복사꽃은 마법을 부리지 않는가 한다. 어딘가 모르게 묘한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꽃 대궐을 이룬 벚꽃도 보기에 무척 화려하지만, 그다지 신비롭지 않은데, 이것은 한없이 사람을 취하게 만들면서 몽환적인 분위기에 안기게 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흥분이 되면서 그리움과 기쁜 감정이 몸 깊이에서 솟아올랐다.
이런 곳에서 젊은 청춘남녀가 만난다면 금방 친해지지 않을까. 아니, 젊음이 한참 지나 고목 등걸이 된 노인의 가슴에도 회춘의 마음이 들지 않을까.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입술을 움직여 시흥을 풀어냈다.
그간 내가 다녀본 중에 인상에 깊이 박힌 장소의 기억이 몇 군데 있다. 첫 번째가 가을 녘이면 고향 뒷산에 피어난 산국화를 잊을 수가 없다. 한창 녹음이 짙어가는 시기에 풀밭에서는 여치가 합창을 하고 풀무치가 뛰노는 가운데 앞서서 다소곳이 얼굴을 내미는 것이 원추리와 산국화이다.
그것이 지고 나면 미구에는 산국화가 피어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금방 온산을 차지하며 꽃 천지로 만들어 놓는다. 나는 그 전경을 잊지 못한다. 다음으로 언급할 것은 거문도 해변길이다. 절해고도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피는 동백꽃은 유독 청초하다. 붉고도 향이 진한데 여느 지역 동백꽃보다도 농도가 짙다.
겨울철, 자연 친화적인 오솔길을 걷노라면 자연스레 바위틈새를 돌고 돌아서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머리에 부딪히는 게 있었다. 바로 동백꽃이었다. 무언가 하고서 고개를 들어보면 해맑은 동백꽃이 눈앞에서 새색시처럼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이후로 특별한 감흥이 없었는데 이번에 다시 추억의 앨범 속에 이 복사꽃을 추가하여 간직할 것 같다.
왜 복사꽃이 마음을 흔든 것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막연히 드는 생각은 화려하지도 단백 하지도 않는 분홍빛이 정감을 일으켜서 조화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흔히 분홍은 흥분, 정열, 그리움을 나타내는데, 그것이 피를 끓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도홧빛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구경하나, 무엇을 가슴 깊이 간직하지 못한다. 여기저기서 화려한 것에 노출되다 보니 은근히 마음을 흔드는 멋은 모르고 산다. 그런 사람들에게 몽환적인 분위기를 알려주고 싶다. 무릉도원을 연상하는 신비감을 전해주고 싶다. 한 번쯤 와서 구경하고 간다면 추억 이전에 마음이 한층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나는 월등 복사꽃을 보고 온 후 진즉에 와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전에 먼저 와서 봤다면 내 문학도 좀 더 향내가 배어 나오게 쓰지 않았을까. 그것을 본 후로 나는 수밀도 복숭아가 다디단 이유는 본래 풍미를 느끼게 한 적당한 과즙에 복사꽃 특유의 몽환이 입혀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을 보고 돌아온 후 나는 며칠간 눈에 어른거리는 복사꽃 환상에 빠져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2024)
첫댓글 대한민국의 무릉도원이 인근에 있었군요! 복사꽃으로 눈에 넘치는 감흥을 맛 보셨으니 잘 하셨습니다.
복사꽃이 만발한 월등은 선경이 월등이었군요. 묘한 몽환적 분위기 하며 흥분과 그리움 기쁨의 감정을 누리셨으니
감탄이 입니다. 그 정도이니 고목등걸의 노년도 회춘이지 싶습니다.
고향 보성 뒷산 가을녘 산국화, 거문도 해변 동백꽃도 좋지만 생명의 색깔 복숭아꽃 홍연에 비하리요.
복숭아의 달디 단 것은 복사꽃의 몽환이라니 고개가 끄떡여집니다.
아름다운 선경지 무릉도원에 얽힌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의 선경, 이웃고을에 이른 환상적인 경관이 있다니. 말로만 듣던 무릉도원이 바로 이런 것을
일컽지 않는가 했습니다. 먼저 친구가 보내온 사진을 보았는데 한눈에 빠져들어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눈앞에서 마주한 월등고을은 그야말로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수만평에 만개한 복숭아꽃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어찌 그리고 흥분되고 마음을 들썩이게 하던지요. 시들었던 젊음이 한순간 불뚝 일어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내생애 가장 아름답던 풍광을 또하나 추가하고 돌아온 느낍니다.
복사꽃은 여느 봄꽃과는 다른 매력이 있는 듯합니다 월등 복숭아단지가 일제히 터뜨리는 봄의 찬가에 넋을 잃었네요 계속 확장해가고 있는 도원의 행로가 기대되는데 6월의 조생종 수확기와 8뤌초에 펼쳐지는 복숭아축제에도 찾아와 농익은 수밀도의 향기에 취해 볼 심산입니다
그날의 복숭아꽃 구경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이었습니다.
피어나는 꽃도 그렇게 예쁜데 그것이 주렁주얼 매달린 전경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생각만 해도 그윽한 정취에 취하게 됩니다.
2024년 한국수필 7월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