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은 초기그리스도 사상이 신성로마제국시절 교황권과 왕권의 결탁으로 그 왕조나 교황권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으나. 거대명문가문의 영향력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특정가문출신의 교황이 탄생되고 품격에 맞지않는 교황의 탄생으로 중세기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우럽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중의 하나인 독일지역에서 교황권에 반기를 든 사제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루터였다. 교황은 루터외의 이탈 세력의 영향력을 진화하기 위해 트리엔터공의회를 개최한다.
이공의회는 갈라진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가톨릭내부의 규정을. 엄격히 규정하였던것이다 그이후 가톨릭교회는 여러 어려움을 겪게되고 그 존재의 영향력이 큰 신성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유럽에서 고립의 길로 들어섰다.
프랑스아비뇽으로 교황이 감금되는 시기도 맞아 굴욕적이었고 프랑스혁명으로 근로자들은 자유를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수도원이 공격을 받았다
이성에 의존하는 계몽주의 출현으로 유럽에서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사상이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여서 성서를 문학비평식으로 연구하기 시작되었다. 이는 지난 16세기에 뛰쳐나간 루터와 그이후의 개혁교단은 성서해석권을 교회에서. 자유롭게. 할수있도록 하였기에
성서는 루터에 의해 자국어로 발간되었고 이는 활자발명에 의해 급속도로로 보급되었다.
트리엔트공의회는 성서해석을 함부로하는 교회 특히 개신교회의 오류확산을 막기위해서 일반인의 성서소유를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영향력인지. 교황청에 의해 조선교구가 설치되고 파리외방선교회의 신부가 조선땅을 밟을때 그들은 성서대신 교리를 갖고들어왔는데, 백년뒤에 대동강에 들어온 함대에 타고온 선교사는 한글번역 성서를 잔뜩 싣고들어 왔다고한다. 그성서는 교전중이었기에 절차를 거쳐 전하지지 못하고
강가의 어느백성이 이를 거두어서 벽지로 사용하면서 그곳에 적힌 내용을 읽게되면서 그리스도를 믿게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절두산근처 양화진에는 오늘날까지. 개신교회의 초기인물의 묘소가 남아있다고 한다.
천주교회의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교황권은 19세기에 들어와서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했으나 독일. 프랑스간의 전쟁으로 다 마치지 못하였다. 교황청은 이탈리아의 통일전쟁으로 이탈리아에. 남아있는. 많은 교황권토지를 포기하는 대신에? 독자적인 독립국가로 인정받는 조약을 무솔리니정부와 맺었으니 그것이 오늘날 바티칸시국이 로마시안에 태어나게 되었다.
그이후 바티칸에서 두번째 공의회가 소집되니 제2차바티칸공의회였다. 그때 전례 평신도와 관련외에 몇가지가 논의되었다. 평신도역할이 재적립되고 갈라진 교회와의 화해가 시작되었다.
무슨일인지 공의회의 효과는 아주 느리게 일어나고 있었다. 요한바오로2세는 병중에도 갈라진교회와 화합을 위해 세계각처로 돌아다녔다. 그분은 정교회 성공회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지도자와도 만났다.
그이후 현교황에 이르기까지 공의회를 실천하기 위해 여러 교황권고문이 반포되었다. 특히 현교황에 의해 반포된 복음의 기쁨과 환경과 관련 찬미받으소서는 그이후 실천을 위한해로 선포되서 후속작업이 이루어지고
가끔씩열리는 공의회대신에 시노드가 열렸으니. 본당소모임에서 출발한 논의끝에 내년 세계주교회의때. 논의할 의제가 결정되고 공개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적지않는 본당에서는 관심밖이었다. 본당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던 것이다.
요즘과 같이 현직교황의 강론등이 우리말로 번역되어서 발행한적이 있을까싶을정도였지만 이를 구입하고 관심을 갖는 신자는 거의 없을정도이다,현교황은 교황청발코니에서 하는 짧은 강론을 순례자를 위해 하는데 유투브에도 소개된적이 있고 도서관에서 본 책인데 평일미사의 강론도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교황권고문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지만 판매부수는 아주 미미하다고한다. 딱 신학생수만큼 팔린다고 한다. 그러나 현교황의 첫반포문인 복음의 기쁨은 많이 팔렸다고하나. 가톨릭교회내 신자들이 많이 구입하였다기 보다는 개신교목회자나 봉사자들이 많이 구입했다고 한다.
그들도 대형교회로 집중되는 문제를 인식하고 소모임에 대한 연구나 적용에. 열중하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가운데에 제2차바티칸공의회가 있다고한다.
요한바오로2세의 두번방한과 현교황의 방한은 한때 개신교단의 걱정꺼리였다. 가톨릭에 사람들이 모여들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지금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지만 만일하게되며ㆍ 가톨릭을 택하겠다는 응답자들이 불교를 넘어선적이 있었다.
그러나 교황이 다녀가고나서 개신교단은 안심했다고 하니 교황의 개혁적인 것들을 한국교구나 본당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이 명백히 들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아시아주교회의에서 촉발한 소공동체운동은 좋은 제도이지만 이를 받아들일 기초가 마련되지않는 상태에서 조급한 교구에서 무리하게 적용하려하기에 삼십년이상 흘러가도 그리고 주교회의내에 소위원회도 있고 해마다 코로나 시대에도 빠지지않고 개최되는 전국회의에도 불구하고 뿌리를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운동의 배경은. 전문성을 갖지못한 사제들이 오년마다 본당에 와서 자신만의 사목을 펼치기에 연속성도 없고 현체제인 사목협의회나 평협을 통한 제분과및 단체의 운용은 본당내에. 소수만 품을수 있는 한계에 대한 인식들은 교구나 본당신부도 갖고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소공동체시스템으로의 전환은 할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마치 두집의 불편한동거 생활이 삼십년이상 해오고 있다는 어려움이 있다.
이는 성서형제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요 코이노니아팀단위가 정상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것도 아무런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취약한팀회합을 위해서라도 전국회의만 할것이 아니라 본당이나 지구별로 모임을 한달에 한번 갖고 코이노니아팀간 상호방문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역별로 충분한대화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팀장에 의한 팀원에게 활동배당을 하,고 헌장을 따르기는 어려운 국면이 있지만 스스로 이런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없이는 극복할수가 없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