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할 정도로 현상을 낯설게 보기
<신앙과 삶>과의 인연은 내가 가난의 현장에 들어간 때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후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번에 원고를 의뢰받고 그간 작성했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해당 시기마다 치열히 고민했던 단상들이 보임과 동시에 순수함과 유연함이 함께 느껴진다.
지난 9년간의 박사학위 과정은 소신 즉 개인적으로 옳다고 생각했던 바에 대해서조차 지속적으로 뒤집어 보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말은 쉽게 했지만, 사실 그것은 지나치게 혼란스럽고도 난감한 일이었다. ‘나의 사고’를 끈질기게 부정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무척 힘겨웠고, 흔히 ‘잘한다고 칭송받는 사람’들이 만드는 빈곤의 생태계를 분석하는 과정 또한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난 그 어디에서나 항상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일종의 ‘방랑감’은 한편으로는 ‘고독’을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선사하며, 특정 관점에 치우치지 않는 학자로서의 방향성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얼마 전, 나의 논지에서 숨통이 트이는 동료 하나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위로가 많이 되었다.
“특정 세력을 등에 업고 그들의 지지를 받으며 글을 쓰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죠. 그러니까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그 글을 쓰는 당신은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고된 길을 뚜벅뚜벅 걷는 용감한 사람입니다.”
‘시지프’(Sisyphe) 같다는 칭찬을 들은 것이다! (필자의 첫 저서, <누가 빈곤의 도시를 만드는가>(2021)에서 난 쪽방촌의 빈자들을 언덕 아래로 계속 내려오는 무거운 돌을 평생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그러나 고된 일을 반복하는 것으로 자신의 비관적 운명에 맞서는 시지프 같다고 적은 바 있다.) 현상을 깊이 더 깊이 고뇌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방향으로 생각이 굳지 않는 것은 ‘예민함’이라는 이면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다행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부디 앞으로도 사고의 유연함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간이 흐른 후 난 어떤 방식으로 또 지금과는 다르게 성장해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제, 내가 오랜 시간 관찰했던바 가운데 중요한 일부를 <신앙과 삶> 독자들에게 흘려보내고자 한다.
버림받지 않았기 때문에 주목해야 할 쪽방촌
일반적으로 ‘쪽방촌’이나 ‘빈민가’라는 단어를 들으면 사회적으로 ‘배제된’ 또는 ‘고립된’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마치 버림받은 땅으로 생각되곤 하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포용’을 해결책으로 생각하게 한다. 교회에서 목회자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곳에 관심을 기울이자고 설교한다.
20여 년 전, 버림받은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찾아왔다. 그들의 눈에는 가난으로 고통받는 빈자들이 안쓰럽다. 게다가 둘러본 쪽방의 주거 환경은 끔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동정에는 묘하게 질책이 섞인다. 왜 그렇게밖에 못사냐고. 긍휼로 가득한 그들은 주님께 기도한다. 주님, 저들을 살려주소서.
쪽방촌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들은 마음껏 섬긴다. 굶주리는 자를 먹이고, 환자를 돌보고, 애로사항을 처리하는 맥가이버가 된다. 그들은 그로부터 행복해하는 빈자들을 보면 족했다. 반면 ‘감사’가 없는 자들에게 그들은 서운함을 느꼈다. 아, 정말 중요한 것은 물질적으로 돕는 복지가 아니구나. 저들은 도움을 당연히 여기고 이용해 먹는구나. 상대의 반응을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을 거듭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만이 살길임을 깨닫는다. ‘불신’을 전제하게 된 그들은 예배를 향한 상대의 성실성을 보고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 이제 가난만으로는 그들의 눈에 들 수 없다. 또한 지원이 있으면 기분 맞추기, 굽신댐과 복종이 따라야 한다. 쪽방촌에서 은혜는 불평등을 낳는다. 빈자는 그리스도인과 다른 의견이 있어도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없다. 내는 순간 아웃. 자존심을 지키려는 몇몇 사람들은 분노를 표출하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악마화’된다. 주여, 좁은 길을 걷는 제가 저들을 더 용납하게 하소서. 또한 저들이 사탄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설교의 톤은 점차 강압적으로 변한다. 최소한의 돈도 우상이다. 술과 도박을 멀리하고 생활 방식을 바꿔라. 누가 때려도 참고 화내지 말아라. 욕구를 절제하라. 예배는 무조건 지켜라. 소자에게 베푸는 자가 복을 받는다. 우리가 너희에게 최선으로 베풀듯 너희도 가진 것 없더라도 서로 베풀어라. 제멋대로 살지 마라. 너희의 생각은 주님의 것과 다르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환경의 변화는 소용없다. 기뻐하라, 슬픔 많은 쪽방도 천국이 된다. 그렇게 사회문제로서의 가난은 계도 되어야 할 개인의 영적 문제로, 교회는 빈자의 행동을 조련하는 권력으로, 쪽방은 천국으로 둔갑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데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딜레마다.
한국 사회의 쪽방촌에는 적지 않은 사회적 관심이 쏟아진다. 그래서 이곳은 더욱 주의를 기울여 살펴야 한다. 견제되지 않는 포용은 필시 폭력을 낳는다. 지금 가난의 현장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필자의 신간, <서울의 심연 : 어느 청년 연구자의 빈곤의 도시 표류기>(필요한책, 2024년 5월 발간)를 읽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