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0월 4일,
윤석양 이병 `보안사 사찰` 폭로
1990년 10월 4일 보안사에 복무 중 탈영한 윤석양 이병(당시 이병, 24세, 외대 러시아과 4년 제적)이
서울 연지동 서울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국군보안사령부가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교수,
재야인사 등 민간인 1,300명을 대상으로 정치사찰과 동향파악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사찰의 증거로 이날 제시한 사찰대상자의 색인표, 개인별 파일 및 컴퓨터 디스켓.
윤석양은 외대 4학년 2학기에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하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신병교육 뒤 1990년
7월 3일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어 혁노맹(혁명적 노동자계급투쟁동맹)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보안사의 협박에 못이긴 윤석양은 혁노맹 간부 1인의 소재지를 알려주었고, 이 후 혁노맹 수사에
조금씩 협조했다. 이 후, 보안사 수사관들은 윤석양을 조금씩 신임하게 되었고, 보안사에서는 8월 22일,
현역군인 10명이 포함된 '혁노맹' 사건을 발표했다.
이후 윤석양은 보안사 분석반에서 혁노맹에 대한 수사 보고서 작성과 사노맹(남한사회중주의 노동자연맹)에
대한 자료 정리 업무를 하였다. 그러던 중 이중스파이의 의심을 받게 되었고 결국 9월 24일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있던 자료를 가지고 탈영 후 은신해 있다가 이 날 폭로한 것이다.
폭로한 내용은 군 정보수사기관인 보안사의 대민 사찰의 증거로 동향파악 대상자 색인표 1,303매,
노무현, 이강철, 문동환, 박현채 등 4명의 개인 신상카드, 개인별 동향 파악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켓
30장(447명 분량), 학과ㆍ학번ㆍ활동내용 등이 기록된 서울대 출신 운동권 387명의 신상카드 등이다.
이러한 증거물을 통해 당시 보안사가 평민당 김대중 총재, 민자당 김영삼 대표 등 각계각층을 사찰했고,
각 동향파악 대상자에게는 담당관 1명이 지정돼 있으며 이 담당관이 매달 말에 1차례씩 감시대상자의 발언
내용과 접촉인물 등 주요 활동내용을 파악해 '문제인물 동향관찰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10월 5일 국방부는 폭로 문건이 보안사에서 작성한 것임을 시인하면서 "전시나 계엄령이 선포된 때에
대비해 적 또는 불순세력으로부터 대상자들을 보호 및 차단하기 위해 작성된 자료로 정치적 목적의
대민 사찰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10월 7일, 평민당 김대중 총재는 내각제 개헌 포기, 지방자치제 실시, 보안사 해체, 민생 안정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갔고, 다음 날인 10월 8일 노태우 대통령은 이상훈 국방부장관과 조남풍 보안사령관이
경질했지만 학생들과 야당(평민, 민주, 국민연합)은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주장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에 대해 노태우는 국민의 분노를 피해가기 위해 10월 13일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다.
즉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은 실제 민생치안을 강화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기반으로 두고 나온 정책이라기
보다는 집권 4년 차를 앞두고 어지러운 정국과 사회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이벤트성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당시 국민들은 긍정적 반응을 보였고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조직폭력배 1,923명을 검거하는
실적을 남기기도 했다. 다만 거물급 조직폭력배는 이미 대부분 잠적하는 바람에 실질적인
효과에는 부정적이었다.
범죄자가 다른 범죄자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12.12 군사쿠데타의 선봉에 있었고 언론 통폐합, 삼청교육대사건 등 각종 정치 공작과 학원 사찰
등 정치 활동에 깊숙이 개입했던 '국군보안사령부'는 1991년 1월1일부터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편 사찰 대상자이던 노무현, 한승헌, 김승훈, 문동환, 강동규, 이효재 등 각계의 주요인사 148명은 1991년
6월 27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국군보안사령부가 군과 관련된 첩보 수집, 특정한 군사법원 관할 범죄의 수사 등
법령에 규정된 직무범위를 벗어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평소의 동향을 감시, 파악할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개인의 집회, 결사에 관한 활동이나 사생활에 관한 정보를 미행, 망원 활용, 탐문채집 등의 방법으로
비밀리에 수집, 관리하였다면, 이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한 것으로서 불법행위"라고 규정했다.
1998년 7월 24일 대법원은 보안사가 헌법상의 사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점을 인정하여 국가는
원고들에게 각각 200만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한편 윤석양은 2년간의 도피생활 끝에 1992년 9월 23일 대구에서 윤석양후원사업회 사무국장 양승균과
저녁 식사를 하던 중 국군기무사령부와 대구 헌병대 요원 등 7명에게 체포되었고 군형법상 군무 이탈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1994년 10월 2년의 형기를 마치고 만기출소 하였다.
'윤석양 후원사업회 준비위'(위원장 이우정)는 1990년 11월 1일 오후 기독교회관에서
발기인대회를 갖고 윤이병 신변보호, 폭압정보기구 해체 등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1990년 10월 13일 오후 보라매대회에서 윤석양의 큰누나 윤석례 씨가 동생 대신 참석해
연단에 나서 보안사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