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문턱의 둘레길/靑石 전 성훈
9월의 첫 번째 토요일, 발음하기도 어려운 역대급 태풍 “힌남노”가 접근한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들린다. 태풍이 올라오기 전에 산행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무리하지 않으려고 둘레길로 방향을 바꾼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영면하고 계신 방학동 ‘간송 옛집’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선다. 자동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아주 고요한 숲길을 걸으며 귀를 기울인다. 뜨거운 여름에 짝짓기를 하려고 새벽부터 노래를 부르던 매미들의 합창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그 많던 산새들은 어디에 있는지 숲속은 마치 물을 끼얹듯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북한산 둘레길 이정표를 보고 옷매무시를 정리한다. 배낭에서 무릎보호대를 꺼내 착용하고 겉옷은 벗어서 배낭에 집어넣고 지팡이 길이도 조절한다. 20분 정도 걸었는데 등허리가 땀에 젖어서 차갑게 느껴진다. 이따금 반대방향에서 내려오는 순례꾼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다. 대답을 하거나 목례를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못 들었는지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도 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따스한 햇살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마음을 활짝 열고 둘레길을 걷는 기쁨을 만끽하며 천천히 걸어간다. 북한산 둘레길, ‘왕실묘역’구간을 벗어날 무렵 쌍둥이 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 주위에는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서 쉬고 있다. 그중에는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은 채 하얀 발등을 내놓고 있는 사람도 보인다. 바닷가 백사장이 아니라 그런지 몰라도 맨발 모습이 왠지 모르게 생경하게 느껴진다. 전망대를 지나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올려보고 땅을 내려다보며 느긋하게 걸어가니 어느 듯 무수골로 들어가는 계곡이다. 폭이 2m 정도인 골짜기 좌우에는 썩은 나무들을 괴어놓아 이끼가 무성하다. 계곡에는 물이 흐르는데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물이 흐른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다. 무수골로 들어서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띤다. 혼자서 걷는 사람들이 많고 일행과 함께 또는 남녀가 같이 걷는 모습도 보인다.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걸어 단맛에 빠진 탓인지 숲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린다. 도봉탐방지원센터 앞에서 의정부 호원동 방향으로 길을 바꾸어 걷는다. 오르막길에서 힘이 들어 숨을 가쁘게 내쉬며 올라간다. 등 뒤에서 따라오던 젊은이들이 내 앞으로 휘익 하고 지나간다. 힘찬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젊은이들을 보니 젊은 날 내 모습이 떠오른다. 수락산을 성큼성큼 올라가고, 뜀박질을 하며 내려오던 40대 중반의 한창 날리던 시절의 내 모습, ‘아! 옛날이여’이란 노랫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포대능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다락원 방향 둘레길로 들어선다. 이 길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늘 한갓지다. 도봉산의 우람한 삼형제인 만장봉, 선인봉, 자운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포토존 의자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혼자서 내 모습을 찍으려고 하니까 어느 분이 사진을 찍어주시겠다고 한다. 남을 배려해주는 선배 노인들의 모습에 감사하고 머리가 숙여진다. 다락원이 가까워지자 어느 공사장의 요란스런 기계소리가 들리고 저 멀리 도봉산역으로 향하는 전철 모습도 보인다.
계절은 가을의 문턱을 넘어 서고 있지만, 산에는 푸른 옷을 입은 나무들이 무성해 아직도 한 여름 같다. 6개월 만에 다시 찾은 북한산 둘레길, 언제나 그 모습 그 대로 말없이 안아주고 품어준다. 싱숭생숭하거나 울적한 마음으로 산을 대하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변덕스런 내 마음뿐이다. 혼자 산을 찾거나 둘레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기에 외롭다거나 심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잠시 쉴 때는 돋보기안경으로 바꿔 쓰고 수첩을 꺼내어 몇 자 끼적거리는 일은 소소한 즐거움이다. 다시 맞이하는 가을의 문턱,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내고 싶다. (2022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