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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의 임랑해수욕장은 월호추월(月湖秋月)의 승경이라 하여 예로부터 차성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백사장에 새겨진 연인들의 발자국이 추억을 불러올 것만 같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
그녀와 마주친 건 그날, 저녁
백사장에서였다
그녀에게 다가간 건
오로지
노래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 말을 하자
그녀가 자신도 그렇다며
나를 끌어안으며
살짝 입술을 부딪쳐 왔다
기억과 꼭 같지는 않았지만 분명 내 영혼에 흔적을 남긴 얼굴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방금 지나쳐온 방 앞으로 되돌아갔다.
길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방은 바다를 향해 창을 활짝 열고 있었다.
나는 창 옆으로 비켜서서 방 안을 기웃이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낯선 정거장에 잘못 내린 이방인 같은 표정이었다.
가지런한 눈매와 얌전한 눈썹, 도톰한 입술이 아무래도 낯익었는데 어디서 본 것인지는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기억을 찾아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창에서 좀 비키세요!"
가수 정훈희 씨가 운영하는 기장 임랑의 카페 '꽃밭에서'. |
그녀가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몽유병자처럼
창으로 다가오더니 쏘듯이 말했다.
얼굴이 화끈했다.
나는 얼른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는 창에서 비켜났다.
그녀가 놀라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나는 걸음을 재게 놀리며 계속 생각했다.
'어디서 봤는데 이렇게 기억이 안 나지? 기억과 다르긴 해.
내가 기억하는 얼굴은 무언가에 깊이 몰입한, 아주 열정적인 얼굴이었어. 그래도 다른 사람인 건 아냐. 느낌이 이렇게 또렷한 걸 보면.'
그녀에 대한 생각은 끊이지 않고 분주하게 머릿속을 오갔다.
나는 임랑해수욕장 입구에 서 있는'갈맷길 1코스'라는 푯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갈맷길을 안내하는 푯말에는 임랑해수욕장에서 시작해 칠암, 일광, 기장읍, 죽성만, 대변항, 오랑대를 지나 해동용궁사, 송정까지 연결된
마을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갈맷길의 총 길이는 28.8㎞였다.
어림잡아 열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숨이 찼다.
언젠가는 걸어볼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그 길을 걸은 후, 내가 그 길을 걷기만 하면 내가 하는 말을 다 들어주겠다고 공언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의 표현에 의하면 나는 마냥 '게으른 놈'이었다.
아버지는 지난 방학에도 내내, 내게 쌍심지를 켰다.
다른 집 아이들은 스펙을 쌓는다고 바쁘다는데 맨날 기타나 치고 노래나 불러서 뭐할 거냐고
성화가 장난 아니었다.
이놈아, 그거라도 할려면 제대로 하든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넌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그러려면 내 눈앞에서 썩 사라져버려!
그 말에 나는 바로 할머니 댁을 찾았다.
아버지가 화를 낼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 댁은 훌륭한 은신처였다.
부산MBC가 2012년부터 개최하고 있는 임랑 해변대학가요제. |
나는 아버지의 고향이자 내가 태어난 임랑(林浪)을 사랑했다.
임랑의 파도소리는 가슴에 쌓인 온갖 찌꺼기들을 씻어주는 힘이 있었다. 파도소리는 어디에 있어도 들렸다.
바다를 에워싼 송림과 나지막이 엎드린 집들의 다소곳함, 그 사이로 오밀조밀 이어진 골목, 바다를 끼고 달려가는 동해남부선의 힘찬 바퀴소리는 끝없이 나를 유혹했다.
특히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밤의 바다는 뛰어들고 싶도록 아름다워서
자다가도 해변을 서성이게 만들었다.
나는 임랑에만 오면 자유로운 유랑의 길손이 된 듯 행복해졌다.
"갈맷길이 이 길의 이름인가요?"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 새 그녀가 곁에 서 있었다.
어깨가 드러난 긴 원피스 차림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늘이 드리운 그녀의 얼굴은 고즈넉해 보였다.
나는 목덜미를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예쁜 이름이네요. 작년에 왔을 땐, 여유가 없어선지 이런 걸 보지 못했는데…."
그녀가 생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순간, 가물거리던 기억이 한꺼번에 솟아올랐다.
지난해 이맘때, 그녀는 가수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에 앉아서
'내년에도 꼭 해변대학가요제에 참여하겠다'고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술에 취해 울면서 되풀이하는 말은 더없이 비장했다.
훨씬 잘할 수 있었는데 예선에서 떨어진 것이 억울하다고도 했다.
나는 친구들과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노래는 예선 탈락을 억울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창작곡이라고는 했지만 어디선가 들은 듯한 멜로디에 식상한 사랑 타령이 지겨웠다.
그런 노래를 그녀는 최선을 다해 불렀다.
어떻게나 열심히 부르던지, 보고 있는 내가 힘이 들어 쓰러질 것 같았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던지, 노래가 끝나고 나자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첫 회라 참가자도, 관객도 적었지만 박수소리만은 우렁찼다.
그 때문에 그녀가 과도한 기대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억울하다며 우는 데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장담을 하더니 그녀는 올해 '제2회 기장 임랑 해변대학가요제'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녀를 꽤나 기다렸다.
가요제가 다가오자 자연스레 그녀가 생각났고, 과연 그 실력으로 올해도 참가할 건지 내내 궁금했던 것이다.
그녀는 예선에도, 본선에도 보이지 않았다.
경쟁도 치열했다.
첫 회에는 14개 팀에 불과했던 참가팀이 올해는 50개 팀이나 되었다.
전국의 실용음악과 학생들이 다 몰려온 듯 했다.
그 때문에 그녀가 포기했을 리는 없었다.
그날의 느낌으론 열정이나 투지가 보통이 아닌 여자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올해 가요제에는 왜 참가 안 했어요?"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금세 눈길이 싸늘해졌다.
아차, 싶었지만 그녀는 쌩하니 찬바람을 일으키며 가버렸다.
눈을 뜨자 밤새 뒤척인 머리가 묵지근했다.
그녀를 보낸 뒤로 마음이 줄곧 뒤숭숭하더니 잠자리까지 편치 않았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푸르스름한 여명을 가로질러 '묘관음사'로 갔다.
나는 새벽에 '묘관음사'의 평화로운 고요 속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근심이라곤 없는 양 기타나 두들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언제나 불안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아버지의 요구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새벽의 법당에 앉아 있으면 그 마음이 고요해졌고, 그것이 날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다.
대웅전에 들어서자 뜻밖에도 그녀가 절을 하고 있었다.
촛불의 은은함 속에 퍼진 향내가 코끝에 알싸했다.
나는 대웅전 구석에 가만히 서서 그녀가 절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웅전에 드나들긴 해도 겨우 합장이나 하는 나로선 줄기차게 몸을 굽혔다 일어나는 그녀가 신기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울고 있었다.
소리 없는 슬픔이 고스란히 내게로 건너왔다.
바늘에 호되게 찔린 기분이었다.
나는 살그머니 법당을 빠져나왔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가수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의 마당을 지나 해변으로 들어섰다.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해무에 휩싸인 고리원자력발전소의 둥근 지붕이 마법의 성처럼 의뭉스레 웅크리고 있었다.
그 위로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온힘을 다해 노래를 하던 얼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던 얼굴, 절을 하며 울고 있는 얼굴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밤 새 차가워진 바닷물이 살금살금 발목을 간질였다.
나는 발끝으로 모래를 후벼 파며 간간이 '묘관음사'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해는 벌써 떠올라 둥근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동해남부선 첫 열차가 철커덕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와 마주친 것은 그날 저녁, 백사장에서였다.
저녁 산책을 나오자, 그녀가 파시처럼 쓸쓸한 백사장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듣는 가곡이었다.
그녀는 먼 곳까지 퍼져나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저 사안 넘어 희이인 구름 아래 내 사랑 있을 듯싶어~, 여엉영 기다려 지이친 몸~, 가녀린 숨길로~ 그대의 가슴 깊이 아~ 안기고 싶소이~다….
제목도 알지 못하는 노래의 애달픈 가락이 가슴에 물이랑을 만들며 내게로 흘러들었다.
서녘하늘엔 홍시를 터뜨려 마구 흩뿌린 것 같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갈매기가 장단을 맞추는 듯 끼룩끼룩 울며 그녀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어딘가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싶었다.
그녀의 품속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떠나보낸 사랑도, 그리워할 사람도 하나 없는 내가 공연히 불쌍해졌다.
내가 그녀에게로 다가간 것은 오로지 노래 때문이었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다말고 돌아보았다. 의혹과 호기심과 경계심이 어린 눈길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어제처럼 그녀가 가 버릴까봐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함다. 바, 방해해서…."
"아녜요. …우리, 구면이잖아요?"
그녀가 생긋 웃으며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곁에 앉으라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간절했다.
나는 최면에라도 걸린 듯 그 곁에 앉았다.
"무슨 노랜데, 그리도 슬프게 불러요?"
하고 보니 하릴없는 질문이었다.
그녀가 바다에 눈길을 둔 채 말했다.
"'망향'이란 노래예요. 워낙은 두고 온 고향을 그리는 노랜데, 난 가사를 바꿔 잘 불러요. 고향이란 단어 대신 사랑이란 말만 넣으면, 애련한 사랑 노래가 되거든요. 우리 세대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란 게 있을 게 없잖아요? 사랑도 이미 그렇게 낡은 개념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못 잊는 사람이 바보인 거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먹해졌다.
순간, 또 울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만약 그러면, 사랑은 결코 낡는 게 아니라고, 또 새로운 사랑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랑에 대해서라면 너무나 몰랐고, 우는 여자라면 어째야 할지 더욱 알지 못했지만
그 말만은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다.
"노래가 슬프게 들렸다면, 제 마음이 그렇든가, 그쪽 마음이 그렇든가, 둘 중 하나일 거예요."
다행히 그녀는 이내 평소의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노을이 사위어 가는 백사장에 앉아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말소리가 잔잔한 파도소리와 함께 가슴을 파고들었다.
내 메마른 가슴에 촛불이 하나 켜졌다.
그녀는 ㅂ대학 실용음악과 학생이었다.
작년 임랑 대학가요제에 오기 전에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올해 가요제에는 그 남자를 떠나보내는 고통에 시달리느라 준비를 하지 못해 참석을 못했다고 했다.
"그를 보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게 임랑이었어요. 그러니까, 임랑은 내게 치유의 장소인 셈이에요. 임랑을 생각하면, 저 파도소리와 함께 그날, 내 못난 노래에 대해 열화같이 박수를 퍼부어주던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요. 그 온기를 기억하면, 기운을 잃었던 몸과 마음에 기운이 솟아요. 잘 안 되는 노래도 얼마든지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고, 떠난 사랑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인가 봐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가 당신의 박수소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걸 꿀꺽 삼켰다.
그 후, 우리는 매일 만났다.
'묘관음사'의 새벽예불에 함께 참례하기도 하고, 손을 잡고 갈맷길을 걷다가 지치면 돌아오기도 했다.
월내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부전역이나 경주에 가서 종일 돌아다니다 오기도 했다.
그 시간은 야금야금 아껴 먹는 과자처럼 소중하고 축제처럼 즐거웠다.
나는 아버지께 문자를 보냈다.
음악을 하겠습니다. 격려해 주십시오.
물론, 아버지가 반길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갈피를 못 잡던 아들이 분명히 뜻을 밝힌 것에 대해선 고개를 끄덕여 주리라 믿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가요제에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노래를 잘했다.
나는 늘 힘껏 박수를 쳐주었다.
나는 그녀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 말을 하자, 그녀가 나를 끌어안으며 자신도 그렇다며 살짝 입술을 부딪쳐왔다.
어느 새 열흘이 지났다.
그녀도, 나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부산으로, 그녀는 경주로. 우리는 월내역에서 동해남부선을 타고 각각 떠나기로 했다.
한 달 후에 노래를 하나씩 만들어 만날 약속도 했다.
그 후에는 함께 연습하여 '제 3회 기장 임랑 해변대학가요제'에 듀엣으로 참가할 계획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대상(大賞)이었다.
그 후, 임랑(林浪)은 내게 숲과 파랑의 바다만이 아니라, 임을 만난 임랑(臨郞)의 바다가 되었다.
정인 소설가
※ 공동기획 :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 '달이 빚어낸 바다 호수' 임랑은 어떤 곳
기장 장안읍 '임랑(林浪)'은 설렘을 주는 곳이다.
옛 이름이 '임을랑(林乙浪)', 입말이 어여쁘다.
임랑에 가면 왠지 '임을 만날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인다.
기장 옛노래인 '차성가'가 임랑을 놓칠 리 없다.
'도화수 뛰는 궐어(농어) 임랑천에 천렵하고, 동산 위에 달 떴으니 월호에 선유한다…'.
기장 사람들은 이곳의 경관을 월호추월(月湖秋月)의 승경이라 하여 차성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월호는 달이 빚어낸 아늑한 바다 호수!
이쯤되면 이태백이 술잔에 띄웠다는 달이 부럽지 않다.
바다를 배경으로 은빛 백사장과 송림 위에 달이 뜨면 청춘남녀들은 가슴이 달뜬다.
임랑 해안길을 '임 만나는 길'로 명명한 게 우연이 아니다.
이곳에서 매년 여름 임랑 해변대학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지난 2012년부터 부산MBC가 주최하고 있는 젊음의 축제다.
대학생이 만든,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곡들이 무대에 올려진다.
임랑이 문화콘텐츠 산실로 바뀌고 있다.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