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인생의 중용을 말하고 있다. "중용"? (사전적 의미)"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상태" 를 말한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성도들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라고 권면하시는 말씀이다.
본문을 보라. 반복되는 어구가 있다. "지나치게"(16-17)라는 어구가 4번 기록.
이 구절들에 등장하는 "지나치게" 라는 표현이 바로 '중용"즉 "치우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16-17절을 공동번역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러니 너무 착하게 살지마라 지나치게 지혜롭게 굴 것도 없다 그러다가 망한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렇다고 너무 악하게 굴지도 마라 어리석게 굴 것도 없다 그러다가 때도 되기 전에 죽을 까닭이 없지 않는가"
그러므로 16-17절에서 "너무 착하게도 너무 악하게도 살지 말라"는 말은 적당히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착하게도 살아보고, 악하게도 살아보아야 인생의 참 맛을 알게 된다 혹은 우리 인생에는 착하게 사는 것과 악하게 사는 것이 각각 50%씩 적절하게 섞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나치게 의인도 지나치게 악인도 되지 말라는? 자기 의에 빠지거나 반대로 악에 굴복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지나치게 의인 행세하면 위선의 덫에 빠지고, 지나치게 악하게 굴면 죄의 올무에 걸릴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대표적인 예가 있다.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부류 중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생활상을 살펴보자(누가18:9-14)
악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11),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빠뜨리지 않았다(12)
구약성경에서는 일년에 한 번 금식하라고 권고한다. "대속죄일"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대략 1년에 100일 이상을 금식했다.
이들은 일반인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대우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이런 대우를 당연하다고 생각햇고, 자신들 처럼 살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비하하며 살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책망했다(14) 그 이유는? "자신을 높였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다(9)
지나치게 의인 행세를 했던 부류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금식을 해야 한다 안해도 된다 십일조를 안해도 된다"는데 있지 않다.
바리새인들 모두가 자신의 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이다.
본문 전도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의 의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위선자"즉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셨다(마태23)
그리고 예수님은 해결책을 제시하신다. 18절이다. "한 쪽을 붙잡았다고 다른 쪽을 버리는 것은 좋지 않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치우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다"(공동번역본)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한쪽만 붙들고 살지 말라고 권면하신다.
그렇게 할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부탁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에 치우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개인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충격적인 글이었다.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
1.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다. 그분의 머리 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목사와 장로들의 빠진 횟수와 날짜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2.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3. 크고 으리으리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이 무섭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4. 성도수가 제법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다. 그 분의 권위의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뜨리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 행태가 치우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양극단의 자세와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래 믿을 수록, 많이 알수록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은혜 받았다는 사람일수록 극단적인 말과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은혜받았다고 인정하기도 한다.
건강한 신앙은 극단적이지 않다. 극단적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정쩡한 상태를 말하는 것은 더 더욱이 아니다.
중용은 중간이 아니라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양쪽 모두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건강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극단적인 말을 내뱉지 않는다.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 여지를 둔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절대적이 않아서 틀릴 수도,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으로 부터 지적 받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이로 인하여 상대방으로부터 틀린 말을 듣거나 잘못된 행위를 목격했을 때에도 이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격려하고 위로할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올 해 2023년 미준교회 주제는? 자신의 의에 빠지지 마라. 자신의 의에 속지 마라. 자신의 의를 붙들지 마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중용의 자세를 취할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하나님의 은헤는 중용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18절을 보라.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라는 구절에서 "이 모든 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을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이다.
극단적인 말과 행동을 제한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나 직장이나 사회나 가정에서 인적네트워크의 영역이 어느 특정인이나 특정 부류에게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특정인이나 특정 부류를 싸고 도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랑하는 행위는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조종하는 것도 아니다. 설득하거나 압박하여 숨을 못쉬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마음 놓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여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자세가 치우치지 않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중용의 은혜이다.
극단적인 자세를 취하는 대신 하나님의 의를 붙들어라. 그러면 신앙생활의 중심이 생기고 그 중심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가 그 중심을 붙들게 되고 더 이상 치우치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