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쇼생크 탈출'을 보았다. 앤디가 탈출하고 난 다음부터 모건 프리만이 분한 레드가 석방되어 앤디를 찾아가는 부분만.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줄거리를 잇기란 어렵지 않았고 무언가에 끌려 보았는데. 달랐다. 영화가 전혀 달랐다. 아니 내가 보는 눈이 달라졌다. 진정한 걸작, 위대한 작품에는 모든 사상과 이론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해가 지나고 세월 아무리 흘러도 그 안에는 새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앤디가 탈출한 곳은 감옥이다. 이렇게 뻔한 사실을 왜 언급하는가. 감옥. 우리는 자신의 일상 혹은 삶 그도 아니면 매일 채워야 하는 나날들을 감옥이라고 표현한다. 그 감옥은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생각일수도 있고 회사일수도 있고 사상일수도 있고 체제일수도 있다. 혹은 주변의 누군가일수도 있다. 이처럼 눈을 돌려보면 감옥의 모습은 다양해진다. '감옥'은 하나의 은유인 탓이다. 그럼에도 그 속성은 동일하다. 나를 가둬놓고 있는 것.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를 가두어 놓고 있는 것은 공권력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체제이다. 우리 삶은 공동체 속, 체제 속에서 이루어진다. 앤디가 감옥에 들어간 계기는 누명이라고는 하지만 그 누명은 체제 안에서 언제든 생겨날 수 있는 것, 우리는 억울한 사연을 수없이 접하고 있지 않은가. 개인은 공동체를, 시스템이 만들어낸 사회 정의를,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권력을 당해내지 못한다. 더구나 그 권력이 거대한 것임에랴.
인간은 자신의 사소한 이익을 위해서 권력에 무릎꿇기 마련, 상대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해도 그건 상대의 일일 뿐 나의 일이 아니므로 나의 돈 한푼이 더 소중하다. 따라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일상은 누군가의 감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편 나 자신의 감옥을 만들고 있기도 한 셈이다. 감옥을 만들고 유지하는 이는 남이고 체제이고 이기심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영화 속의 누명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 아내와 그의 정부를 죽였다는 누명은 앤디가 어찌할 바 없이 공권력에 사로잡히는 계기로 어느 한 체제에 빠져드는, 즉 옴짝달싹 못하도록 옭아매는 계기가 된다. 인간은 어떤 사건을 혹은 어떤 결정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결정짓게 된다. 은행원이 되는 계기, 공무원이 되는 계기, 자영업자가 되는 계기 기타 등등 어느 한 순간엔가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 짓고 그 세계로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 세계를 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삶이므로.
이제 포스터에 쓰인 글귀를 보자.

"Fear Can Hold You Prisoner, Hope Can Set You Free"
공포는 당신을 갇힌 자로 붙잡아 둘 수 있지만 희망은 당신을 자유로 만들수 있다." 직역이라 뭔가 어색할 것이다. "공포는 당신을 갇혀있게 하지만 희망은 당신을 자유로 만든다." 정도가 어떨까. 'prisoner'는 죄수라고 하지만 포로 또한 'prisoner'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죄수'보다는 '죄 짓지 않은 채로 갇혀 있는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붙잡힌 자' 혹은 '갇혀 있는 자'가 적당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공포, 그 공포는 감옥을 만든 시스템에 대한 공포이다. 이 체제가 언젠가 나를 알아줄 것이라는 희망이 '토미'라는 인물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체제가 내 무죄를 알아줄 것이라는 그 희망을 버릴 수 없기에 공포는 더욱 짙어진다. 그러나 때로 희망은 나를 기만하는 존재, 생각, 기대가 된다.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 체제의 힘을 깨닫고 성경을 보면서 자신을 누그러뜨리는 삶. 서양세계에서 언제나 지배자는 성경을 이용한다. 순응하면서 살아가라. 너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살아가라. '그 안에 구원이 있으니.'
희망을 키워주는 혹은 배신하지 않는 체제에는 그 체제가 유지될 여지가 있다. 정의가 살아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체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에게서 버림받지 않는 체제는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희망을 배반하는 체제는 버릴 수 밖에 없다. 버리던가 탈출을 포기하던가. 자유를 찾던가 순응하던가 둘 중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지배자에게 종교는 무한히 매력적이다. 종교는 순응을 가르치고 복종을 가르친다. 단 지배자가 권하는 종교만!
희망을 배반당한 자는 또 다른 꿈을 꾼다. 보다 크고 보다 본격적인, 근원적인 꿈을 꾸는 것이다. 체제로부터의 탈출. 체제가 강력한 만큼 탈출의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열망이 강한만큼 꿈도 오랫동안 지속된다. 포기하는 이들이 대다수인 것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하기 때문이다. 석방된 앨리스가 감옥으로 돌아갈까 하고 갈등하는 모습은 세뇌가 그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희망이 얼마나 강렬한지는 일상의 행위가 말해준다. 일상은 순응하는 듯 보이면서도 그 안에 여지를 감춰두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위해 '벽을 파냈던 이'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 '갇혀 있는 자를 이용했던 이'나 비열한 만족을 위해 '갇혀있는 자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이'나 일상의 속성은 동일하다. 체제에 순응해서 주어진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일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일상은 지극한 만족을 주는 것도 아니요 커다란 일로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일상은 일상일 뿐, 그래서 일상은 지루하고 무의미하고 권태롭다. 그 일상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만 다를 뿐.
한 주먹씩, 한 숟가락씩 벽을 파내는 일은 무한히 단조롭다. 그러나 그 일상은 힘을 갖고 있다. 눈에 띄지 않게 모이고 쌓인 힘은 다른 세계를 만날 계기를 만든다. 혹자에게는 자유로 가는 계기를 만들지만 혹자에게는 파멸로 가는 계기를. 소장의 일상은 파멸로 이끌었지만 앤디의 일상은 다른 세상으로 이끈다.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다른 세상은 없는 법. 하루하루가 동일해 보이는 일상의 힘은 그처럼 크다. 쇼생크는 극단의 일상이다. 지루함의 극단, 억압의 극단, 타의로 이루어진 삶의 극단.
소장의 일상이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인과응보라면 앤디의 일상은 희망에 대한 보상이다. 소장이 일상에서 지극한 환희를 맛보았던가. 제한된 세계지만 그 안에서 가능한 온갖 권력을 누렸던 그의 일상이 화려하고 눈부신 것이었던가. 소장 역시 말할 것이다. 내 일상은 지루했노라고. 아무런 기쁨도 없었노라고. 그 지루한 일상에서 타인을 이용해 모은 돈, 타인을 휘둘러 쌓아놓은 업적은 온전히 자신의 파멸을 위해 공헌한 셈이다.
감옥 탈출을 다룬 영화는 많다. 포로 탈출을 다룬 영화 또한 많다.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대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영화들 중 이 영화 쇼생크 탈출이 이토록 인상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 지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두어놓고 살기 때문이다. 늘 변하고자 열망하며 또 다른 세계를 희망한다. 따라서 시대와 공간과 인종을 불문하고 우리 모두는 자신 안에 앤디의 모습을, 속성을 갖고 있다. 탈출을 갈망하는 아니 변신을 갈망하는 희망이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다.그 그래서 쇼생크 탈출은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이 될 것이다. 우리의 가슴 속 깊숙한 곳을 건드렸으므로.
이제 자신에게 물어볼 차례가 되었다. 당신의 일상은 어떤 모습인가. 지금이 아닌 또 다른 세계를 향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일상인가.
사족일 수도 있는 말을 하나 더 얹는다면 영화 원제는 'The Shawshank Redemption'이다. 단순히 '탈출'이 아니다. 물론 '쇼생크 탈출'이란 제목도 영화 내용상 들어맞는다. 그러나 'redemption'은 보상, 속죄, 해방이란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쇼생크 감옥의 죄수 생활에 대한 보상으로 본다면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혹은 쇼생크 탈출의 보상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가 쇼생크를 탈출했기에 보상을 얻었다는 의미로 'redemption'에는 '탈출' 하나만으로 뜻할 수 없는 미묘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
첫댓글 정말 멋진영화에요! 저도 학교선생님께서 보여주셔서 봤답니다!
^^ 몇 번씩 보면 더 절실해진답니다.
몇 번을 본 영화인데 볼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건 아마도 그 영화가 주는 메세지가 그리 단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희야님 쓰신 글 보니 더 분명해진듯도 하구요. 이루기 힘든 꿈을 가질 때 우린 ' 그냥 꿈으로 간직하기로 했어.' 합니다. 이루기 위해 애쓰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건 꿈이 아니라 별이랍니다. 그냥 바라만봐야하는 '별'... 목적을 위해 취해진 단조롭고 단순한 일상이 오랜 기간이 지나고 보면 꿈꾸는 이상의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지요. 다시 보면 또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하늘에 있는 별이지요. 보이기는 하되 다가갈 수 없는. 그렇게 살수야 없다고 말하기는 쉬운데. 실천이 참...
일상이 일상으로서 두렵지 않을 때......
그 다음 일상을 준비하고 있을 때.....
무지 재밌게 봤던 영화입니다. 그렇기도 하군요.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일상은 누군가의 감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편 나 자신의 감옥을 만들고 있기도 한 셈이'라고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자유를 찾던가 순응하던가 --> 찾든가 순응하든가.
넹.......넹.....소장이 하는 말. 이 곳에는 두가지만 존재한다는 말. discipline and bible. 생각할수록 무서운 말이더군요. 사실 소름이 쪽 끼쳤더랬습니다. 훈육은 육체, 바이블은 정신, 그러니 육체와 정신을 다 거머쥐겠다는 말이잖아요. 시스템이며 사회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거지요. 한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정신과 육체가 다 길들여져야하니까요.
자유나 순응은 관념이고 비현실적 개념이라는 생각,,,그런건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만 있다고 마음속으로 믿고 있는 환상체계고,,있다면, 자유와 순응 사이에 있는 적은 규모의 흐름,,,이거나 꼼지락거림이겠죠,,,그 꼼지락거림의 그늘이 지시하는 아주 미세한 방향을 가지고 우리는 자유니 순응이니 하는 거겠죠,,,이 세상에 기쁨이니 허무니 하는 것들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요?
위험하네요. 자칫하면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겠습니다.
저도 다시 한번 보고싶네요..
얍! 볼수록 좋은 영화가 있으니까요. ^^
저도 대여섯번은 봤습니다만, 오씨엔 틀다가 나오면 또 보게 되죠.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필설로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구요. 그 이름 잊었는데, 석방되고 나서 자살하는 영감 있죠? 거기서도 크게 충격 먹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이란 지겨운 것이면서도 우리를 안심되게 하는 요소란 걸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거의 모든 영화가 수퍼맨 이야기라는 게 좀 갑갑할 때도 있습니다. 앤디도 일종의 수퍼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Brooks has here(been이 빠졌지요). 라고 낙서를 남기고 목매달아 죽은 도서실 영감말씀이지요. 앤디, 지적 잘하셨습니다. 일례로 앤디의 감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지요. 그가 무얼 생각하는지 느끼는지 도통 표현하고 있지 않지요. 그래서 전 이 영화 주인공은 앤디보다도 레드가 아닐까 싶답니다. 인간답지 않나요. 도입부분부터 차갑게 설정된 (재판관의 말을 따르면 보는 자신이 피가 얼어붙는 것 같다는) 앤디는 관념의 구현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수퍼맨 이야기'는 아주 좋은 언급입니다. 그러잖아도 생각하고 있던 건데....다음에 한번 풀어보지요.
희야님의 고견을 기다립니다. 좀 어렵게 쓰시더라도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겠습니다.
아이런. 고견이라뇨.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더 공부 해야겠군요. 종합 시험 끝나서 잠시 숨돌릴까 했더니 숙제를 주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