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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어떤 권사님이 집이 어렵고 힘든 일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잠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 기도회에 나갔습니다. 그렇게 한 주, 한 달,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겨울이 오고 추웠습니다. 눈이 내리는 날 새벽 기도회에 왔는데, 그날은 많은 사람이 빠졌습니다. 하지만 권사님은 작정하고 기도하는 중이라 그날을 채우기 위해 그날도 온 것입니다. 한참을 기도하다 갑자기 자신이 너무도 불쌍한 것입니다. 이렇게 춥고 미끄러운 날은 집에서 좀 더 잠을 자고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팔자가 서럽다고 생각이 들자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권사님은 억지로 새벽 기도회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새벽 기도회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억지로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 때문에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가사가 저를 힘들고 어렵게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이 찬송을 부르다 보면 그렇습니다.
찬송가 364장입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 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 당해 슬플 때 나 위로 받게 하시네
정말 나는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나?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자꾸 저에게 묻습니다. 막 물음을 던집니다. 진짜야, 정말이야, 사실이야! 그럼 제가 답합니다. 그럴 때가 있기도 해, 하지만 기도는 힘들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찬양을 부를 때, 정말 가사처럼 기도하는 그 시간이 즐겁습니까?
내 기도하는 그 시간 내게는 가장 귀합니까?
어느 순간 나는 예배자와 삶의 현장에서의 나 사이는 두 사람인 듯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습니다. 예배 때는 거룩하고 성스러우며 마음의 평안과 순전한 사람 같은데, 삶의 현장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배자와 삶의 현장에서의 살아가는 사람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새벽 기도회 때 교우들과 여러 번 반복해서 따라 하게 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자로 문제를 받습니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답을 씁니다.” 문제를 받은 사람이나 그 문제의 답을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채점을 하시고 몇 점이라고 하실까요.
다음 주는 맥추 감사절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에 특별하게 절기를 보내다는 의미보다 더 깊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봤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그를 통해 하나님은 영화롭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삶을 살며 드리는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그 자체가 놀라운 일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몇 번이고 말씀을 쓰면서 부딪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예배를 받아주시는 것 자체 만으로도 너무도 놀라운 일인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을 얻는 것이라는 말씀은 계속 부딪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생각이 납니다. 다윗이 생각이 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각이 납니다. 그들은 분명 영화로운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영화롭게 해 주신 복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기복이라는 단어와 속물이라는 단어가 저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의 주인공을 하나님은 수고했다로 끝을 내실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고에 걸맞은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시기에 정확하게 무엇이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예배자의 모습일까요. 물론 작은 것까지 생각하면 너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3가지 정도만 생각하면 어떨까요.
첫째 행복한 가정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은 그 행복한 가정을 그대로 가지고 예배의 자리로 오라고 하지 않을까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개성이 있습니다. 누구도 하나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비슷하고 닮은 사람은 있습니다. 하지만 전부 다릅니다. 가정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에는 숫자로 셀 수 없는 가정이 있습니다. 똑같은 가정은 단 한 가정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 행복해, 저렇게 하는 것이 행복해하는 말로 충고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충고일 뿐 실제 상황은 다릅니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가지고 싶은 마음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복한 가정입니까?
찬송가559장입니다.
1.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후렴)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2.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3.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이러한 가정을 가꾸며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가족이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럼 그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말씀과 삶이 하나 된 예배입니다. 그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갑자기 주여 하는 한숨이 나옵니다.
이런 가정이 찬송가에나 있는 가정이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새벽 기도회에 교우들께, 몇 명 되지 않는 가족 전부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는 것도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공감하는 겁니다. 남편이 믿지 않고, 자식들 중에도 그렇고, 부부가 서로 하나 되어 믿는 것도 쉽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 찬송가 559장은 천국에서나 가능한 가정으로 보여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는 가정이 모두 함께 행복하게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힘을 써야 합니다. 기도하며 헌신하며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많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마음을 둬야 합니다.
며칠 전에 “부모님 죄송합니다” 일기에 유서를 쓰고 초등학교 5학년이 16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학교에서 폭력을 당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학교는 인성교육보다 입시 교육으로 아이들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부모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 가족이 믿고, 그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뿌리내려 건강한 정체성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아가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그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철저하게 하나님을 알고 따르며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속한 세상의 공동체 안에서 행복한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인은 아니지만 아는 권사님이 저에게 목사님 혹시 데살로니가 전서 5장16절-18절 말씀이 바뀐 것을 아세요 그러는 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도 잘 아는 이겁니다.
5:16 항상 기뻐하라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바꿨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뻐하라, 범사에 기뻐하라”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막 웃습니다. 기쁘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참 어렵고 힘든 모양이군요. 그랬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군요.”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가 속한 직장이나 혹은 여러 군데 모임에서 이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늘 우리 안에 은혜가 넘쳐야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의 속한 일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정말 싫어하는 일과 겹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공동으로 죄를 계획하고 서로 용납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그 상황에 접하지 않고는 쉽게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아합 왕이 여호사밧 왕과 사돈이 되어 전쟁에 함께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여호사밧 왕이 이 전쟁에 대해 물어볼 선지자가 없느냐고 청합니다. 그러자 400명의 제사장이라고 불러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왕의 눈치를 보고 그가 원하는 답을 주고자 분명 거짓인 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왕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때 거짓 제사장들은 그 일이 직장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예배를 드린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감사는 감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드리는 예물은 예물이 아닙니다. 그들이 노래하는 찬양은 찬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직장생활이나 일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는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받으신 예배를 함께 기뻐하여 영광을 돌리며 축복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이번 달 16일 금요일에 박상호 권사님 아들 기준형제의 가게를 확장해서 이전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3가지를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 첫째는 정직이었습니다. 둘째는 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가게를 여는 사람은 다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시작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기준형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공이 뭐냐” 이걸 정의를 잘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에 맞게 생활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공을 돈을 많이 벌어서 더 이상 가게를 하지 않고 집에서 아내와 함께 아이와 함께 살면서 여행도 다니면서 남들도 좀 돕고, 그것을 만일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선영 자매가 갑자기 놀라 하며 그거 목사님 어떻게 알았냐고 하는 것입니다. 신기하고 신기한 모양입니다. 마치 자신들 부부의 이야기를 도청해서 다 듣고 말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직장이나 그 외에 더불어 살아가는 자리에서 어떻게 기준을 세우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에는 뜻을 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뭡니까? 세상이 원하는 대로 맞추면서 살아야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심을 따르며 살겠다는 뜻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의 자리에 옵니다. 이미 하나님은 그의 삶을 통한 감사의 모든 것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충분히 영광을 받으시고 남았습니다. 또 예배의 자리에서 그를 기뻐 받으십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교회가 행복한 공동체가 되도록 섬겨야 합니다.
어떤 분이 교회를 네 종류의 공동체로 분류했습니다. 그럴듯해서 소개합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네 종류의 교회를 만납니다.
공동묘지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믿음의 활동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에 기쁨이 없고 의무감으로 오가는 교회입니다.
박물관 같은 교회도 있습니다. 골동품을 보며 기뻐하는 것처럼 ‘그때 우리 교회가 이런 모습이었다.’라고 그리워하며 옛 추억을 먹고 삽니다.
극장 같은 교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오지만 한 곳만 바라봅니다. 그곳에 있는 배우나 노래 잘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손뼉 치고 끝납니다.
잔칫집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축제가 있고 기쁨이 있고 만남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함께 섬기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공동묘지, 박물관, 극장, 잔치집” 잔치집과 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카피라이터 ‘이만재’가 쓴 ‘교회에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만재씨는 이 책에서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이던, 다니는 사람이던 교회 가기 싫은 일흔 일곱 가지 이유를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종합하면 ‘교회와 세상이 다르지 않더라, 교인과 세상 사람들이 매한가지더라’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참 좋으나 교회는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그래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도 그 안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말씀대로 씨름하고 돌아와 보고하고 다시 힘을 얻고 말씀을 품고 삶의 자리로 가는 곳입니다.
요즘은 길거리나 공원이나 꽃을 참 많이 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꽃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꽃이 있기는 한데 잡초가 더 많으면 뭐라고 합니까? 잡초밭이라고 합니다. 잡초가 있지만 꽃이 더 많으면요 꽃밭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공동체는 모두가 다 성숙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숙한 성도가 더 많으면 그 선한 영향력이 미성숙한 성도를 성숙한 성도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삶의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많아지면 그 공동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시간과 교회 공동체에서 보여주기식 예배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상에서의 삶의 시간들을 잘 살아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보여주신 선한 영향력이 있는 삶을 기꺼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감사하며 기뻐하십니다. 더불어 그런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는 성도를 도우시길 기뻐하십니다. 그를 구원하시며 그를 복되게 하십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함이 동반되지 않는 예배는 거짓 예배입니다. 그 예배는 수천번을 드려도 하나님을 욕되게 할 뿐입니다. 가정에서의 삶, 직장이나 내가 속한 세상의 일들을 하는 곳에서의 삶이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섬김의 삶이 먼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주인공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시며 축복되게 상급을 허락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배자로 문제를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답을 써내려 갈 것입니다. 우수한 성적의 공동체 제자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영적 꽃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