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받은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마20:1-16)
2024,12,29 송년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예수 잘 믿고 싶어요”라는 복음성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주님을 믿으면서 세상도 같이 믿고, 예배는 드리면서 사랑하지 못하네...
기적은 믿으면서 우연이라 생각하고, 응답은 바라면서 기도하지 못하네,,,
은혜로 살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천국은 믿으면서 누리지를 못하네...
아버지여 내 영혼에 단비를 내리소서, 아버지여 가시밭 내 성품을 고치소서...
난 정말 난 정말 예수 잘 믿고 싶어요... 아버지여 돌짝밭 내 마음을 거두소서...
난 정말 난 정말 말씀대로 살고 싶어요. 이렇게 두 손 들고 주여 부릅니다“
** 예수 잘 믿고 싶어요(찬양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sJzOZ3fidEM
구구절절이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우리의 영적상태를 말하는 가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마지막 가사처럼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난 시간 동안 “예수 잘 믿었는가?”, “말씀대로 살았는가?”를 곰곰이 성찰해 본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지난 한 해 동안 우리교회의 표어를 생각해 보자. 금년 우리교회의 표어는 “참 빛을 비추는 그 빛들이 되자!”였다(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마5:14)
여기서 말하는 “참 빛”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고, “그 빛”이란 성도들(나, 우리들)을 뜻한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빛(a light)’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참 빛(the true light)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그 빛(the light)’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참 빛을 비추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본 설교자는 부끄럽지만 자신 있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만약 ‘참 빛을 비추려고 노력했는가?’ 또는 서두에 언급한 찬양처럼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은 했는가?’라고 묻는다면 어떨까?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분은 ‘그렇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은 그 마저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들의 영적인 상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또한 남은 평생 동안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면에서 평생의 숙제이기도 하다. 이 점이 바로 오늘 송년주일 설교에서 함께 나누면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였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 그 중에서 오늘 송년주일에 감사인 동시에 평생의 숙제인 한 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그것은 ‘쓰임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지난 시간 동안 크든 작든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축복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섬겼다고 느껴지는 분들은 더 많이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것에 감사하자. 만약 그렇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느껴지면, 앞으로 평생의 숙제에 더 열심을 내겠다고 다짐하자.
이러한 시각에서 송년주일에 오늘 설교 본문 말씀 속에 나오는 비유를 생각해 보자. 보통 오늘 설교본문 속에 나오는 비유를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라고 한다. 이 비유는 ‘천국비유’이다(마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마 20:1)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집 주인”의 뜻이다. 여기서의 집 주인은 당연히 세상 모든 것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 비유에 보면 이른 아침부터 들어와서 종일 일한 품꾼들도 있고, 중간 중간에 부름을 받은 품꾼들도 있다(제 삼시 - 오전 9시, 제 육시 - 12시, 제 구시 - 오후3시, 제 십일시 - 오후 5시). 아마 중간 중간에 들어온 품꾼들은 노동력이 약한 사람들(장애인, 환자, 노인, 못 배운 사람들, 흙수저, 소외된 자들 등)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모든 품꾼들에게 동일한 품삯을 주었다. 그러자 이른 아침부터 온 품꾼들이 주인은 원망하면서 항의를 했다(마20:10-12).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마20:14-16).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4-16)
주님의 이 대답이 이 비유의 핵심이이다. 이 비유의 핵심은 시간대나 신분이나 몸 상태에 상관없이 주인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고(초청), 순종하여(믿음), 포도원(천국)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동일한 영생(구원)의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송년주일을 앞두고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찍부터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들이나 비교적 일찍 들어온 품꾼들은 그들의 생각처럼 정말 합당한 댓가를 받지 못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들 중에는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늦게 들어올 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면 이들은 정말 자신의 일한 분량에 대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일까? 언뜻 종일 일한 시간을 돈으로만 계산하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시대에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이나, 평생을 교회에서 봉사한 사람들 중에는 이와 유사한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포도원에 일찍 들어온 품꾼들은 돈으로 환산 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와 행복을 종일토록 누리며 살아왔다.
그러나 늦게 부름 받은 사람들은 구원은 동일하게 받았지만, 황금 같은 시간들을 상처와 불행 속에서 살았다. 쉽게 말하면, 일찍부터 부름 받은 사람들은 오랜 시간동안 “더 많이 주를 위해 일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예배와 찬양을 드리면서 최고의 행복을 누렸다. 그렇기에 주님과 행복한 교제를 나누면서 더 많이 더 오래 쓰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 그들은 이 점을 놓쳤다. 그러나 훗날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다 이를 감안하셔서, 적절한 최고의 상급(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
오래전 신학생 때, 마카오(Macao)에 단기선교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마카오신학교에서 우리 선교팀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었다. 식사 후에, 마카오신학교 교장 선생님이 ‘맛있게 드셨냐?’는 질문을 했었다. 그때 우리 선교팀의 지도교수인 박광철 교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음식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좋았던 것은 우리들의 행복한 관계입니다!”
이 대답을 들은 마카오신학교 교장 선생님이 너무도 기뻐하셨다. 이 한 마디 때문에 모두가 행복해졌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경에서의 축복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단순히 품삯 몇 푼이나 음식 또는 소유물에 있지 않고, 행복한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포도원 비유에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언뜻 보면 불공평한 대우를 받은 것 같지만, 사실은 더 많이 쓰임 받고, 더 많이 좋은 관계를 누리면서 평생의 시간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더욱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또한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사실은 우리들 모두는 늦은 시간에 포도원에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다. 만약 포도원 주인이 사람을 돈이나 세상적인 조건들로만 계산했다면, 오늘 우리는 여기에 앉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지난 주중에 우리교회 어느 장로님이 평생 소중히 생각하는 사자성어 하나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빈천지교(貧賤之交)라는 말이다. 빈천지교(가난할 빈, 천할 천, 조사 지, 사귈 교)란, 가난하고 어려울 때 맺은 사귐은 평생 잊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영적인 빈천지교의 관계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어둠 속(죄, 질병, 상처, 삶의 무거운 짐 등)에서 눈물 흘릴 때, 내가 ‘낮선 자’가 되었을 때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잊으면 포도원 주인에게 항의했던 사람들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쓰임 받은 은혜”는 지금까지 일할 기회를 주님 은혜에 대해 감사인 동시에 평생의 숙제이자 사명이다. 그러므로 이 인생숙제를 잘하자. 지난 한 해 동안 쓰임 받을 수 있기 기회를 주신 은혜에 감사하자. 사도 바울처럼 앞으로도 더 잘 쓰임받기를 위해서 생명까지도 드리자(행20:23-24). 이것이 빈천지교의 은혜를 갚는 길이요, 주님과의 행복한 관계를 누리는 길이여, 참 빛을 비추는 그 빛들이 되는 길이다.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함께 하신다.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