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김유신 가문
한편,
의성 금성의 조문국 왕릉을 발굴한 결과를 살펴보자.
'고분의 조성 시기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으로 여겨진다'는 분묘를 발굴한,
학계 學界의 발표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4세기 중반이라면,
제17대 내물 마립간 (奈勿麻立干 재위 기간 : 356년~402년)시대이며,
이때부터 성골 聖骨 출신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6세기 중반은,
제 24대 진흥왕 (眞興王 재위 기간 : 540년~576년)과
제 25대 진지왕 (眞智王 재위 기간 : 576년~579년)이 다스리던 시기다.
진지왕 다음은
제 26대 진평왕 (眞平王 재위 기간 :579년~632년)이며, 이때부터 성골 출신 왕자가 없어,
제 27대 선덕여왕 (善德女王 재위기간 :632년~647년)이 성골 출신의 공주 신분으로 왕위에 오르고,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유언으로 사촌 동생인,
제 28대 진덕여왕 (眞德女王 재위 기간 : 647 ~654)이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 在位에 오른다.
제 28대 진덕여왕의 아버지는 진평왕의 아우인 국기안 國其安 갈문왕이며,
어머니는 아니 阿尼 부인이다.
그러니, 아니 부인이 조문국의 마지막 공주 출신이란 것이다.
이로써 신라 중세시대 中世 時代를 마감하면서 성골도 끊어진다.
고서 古書에는 언급 言及이 없지만,
이때쯤에는 어떠한 사유로 인하여 조문국 왕족이 몰락 沒落한 것으로 보인다.
김수로 왕의 후손,
가야계 출신의 지략 智略이 뛰어난, 김해 김씨 김유신 장군의 가문이 이때쯤 두각 頭角을 드러내고 있다.
김유신의 조부 祖父 김무력이 역사서에 등장한다.
그리고 김유신 장군은 가야국, 충청도 진천 출신으로, 경주 북쪽 안강평야 安康 平野를 지나,
기계 杞溪면 현내리에 조부 祖父 김무력이 자리를 잡았는데,
손자인 유신은 경주 남동쪽의 산내면 山內面의 단석산 斷石山에서 도를 닦아,
득도한 장군으로 신격화 神格化 되어있다.
단석산은 도를 닦은 김유신이 득도 得道의 증명으로 칼로 큰 바위를 잘라, 둘로 쪼개었다는 설화 說話다.
현재도 단석산에는 칼로 자른 듯, 깨끗이 두 쪽으로 갈라진 큰 바위가 그 자리에 있다.
김수로 왕의 가야왕족 12대 후손 後孫,
김유신 장군 가문의 출현과
조문국의 몰락 沒落은 상호간
인과관계 因果關係가 연루 連累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먼 곳으로 이사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자신의 살던 곳이나,
고향과 가까운 방향으로 터를 잡는다.
그러니,
충청도 진천 출신이 거리가 멀리 떨어진 경주로 이사하게 된다면,
통상적 通常的으로 경주에서 한 발짝이라도 진천과 가까운 영천이나 아화, 건천 쪽에 터를 잡을 것이다.
그런데,
경주를 지나 형산강을 건너 드넓은 안강 평야를 거쳐,
오지 奧地라 할 수 있는 기계면 현내리에 터를 잡았다면,
지정학 地政學적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위에 나열한 지명 地名, 영천 永川, 아화 阿火, 건천 乾川은 경주에서 볼 때,
충청도 진천과 가까운 지역은 맞지만,
의성군 금성으로 가려면,
역시, 이 지역들을 통과하여야 한다.
당시, 경주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아주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 要衝地라는 것이다.
그럼 왜?
대대로 이어온 가야국의 왕족을 포기하고 신라와 통합한, 큰 야망 野望을 품고 있었던 김무력은 각종의 정보 수집에 용이 用利한 교통의 요충지를 마다하고, 두메산골 먼 오지 奧地에 새로이 터를 마련하였을까?
이는,
현장부재증명 現場不在證明이 필요한 시점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경주에서 의성 금성으로 가는 그 통로에서 발을 슬며시 빼고는,
다른 ‘한적한 곳에 터를 잡았다’라고도 볼 수 있다.
옛 주거지나 고향과 멀리 떨어진 현 주거지의 반대편 지역에 터를 잡으면 상당히 불편하다.
그러나,
범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면,
현 왕족과 절친했던 다른, 한 왕족을 멸족시켰다는 대중 大衆의 눈총을 받는 것에 비하면,
오가는 시간적. 신체적인 불편함을 겪는 것이 심리적으로는 더 편안할 수도 있다.
김유신의 누이동생 남편인,
29대 태종 무열왕부터는 진골이 왕위를 계승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가계 家系,
즉, 가야계 김해 김씨가 신라의 왕족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야의 김해 김씨나 신라의 경주 김씨나 같은 피를 나눈 형제 집안이다.
역시, 동일 同一한 조상(마신 馬神 김일제의 부친, 휴도왕)에서 갈라져 내려온 같은 가문이다.
그러니 두 집안이 다시 합세한다고 하더라고, 이상해 보일 것은 전혀 없었다.
진골 출신 김춘추와 가야 출신 김유신 두 가문이 연합하여,
무력 武力으로 성골의 모태 母胎를 없애버린 것이다.
당시의 성지 聖地였던,
유일하게 왕비 세습의 특권을 누리며, 무소불위의 세도 勢道를 부리던,
의성 금성의 호연씨 부족을 척결 剔抉시켜버린 것이다.
진골 신분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 논 것이다.
구태의연 舊態依然한 제도를 타파 打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왕을 추대할 수 있도록,
당시의 성역 聖域인 골품제의 제도개혁을 단행해 버린 것이다.
즉, 성골의 모태인 조문국을 역사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비담의 난도 이 시기에 일어난다.
이제,
성골은 사라졌다.
진골 출신, 상대등 비담도 대권 大權을 잡을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런데,
그게 제 뜻대로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김유신 가문과 제3의 세력이 김춘추를 밀어준 것이다.
조문국을 축출 逐出시킨 그 명분 名分은 앞서 언급한 왕비나 태후들의 무분별한 이성 교제와 문란한 행실,
그리고 무소불위 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한 조문국 출신 인물의 전횡 專橫을 문제 삼아,
이에 공분 公憤한 대소 신료 大小 臣僚의 합의로 그에 대한 척결이 단행되었다.
태후들의 문란한 사생활과 권력을 전횡 專橫하고 있던 조문국 출신 인사 人士들의 위세에 억압받고 눌리어,
치를 떨고 있던 사대부 士大夫들을 규합 糾合시켰다.
그리고, 태후들의 비상식적인 문란한 사생활을 뒤에서 옹호 擁護하는 기성 旣成 세도가 勢道家,
의성 금성의 호연씨 부족을 축출시킨 것이다.
그리고
사후 事後에 화백회의 和白會議에서 용인 容認해준 것이다.
사서 史書에서 삭제시키기로 합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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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