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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한상원목사
PW : 믿음 BIW : 대적하지 말라 AG : 슬로밋
TS : 믿음이란 하나님의 실존과 거룩에 대적하지 않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제가 안 죽였어요
사오정이 국사 시간에 안중근 의사에 대하여 공부하는 데 자꾸 조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사오정! 왜 그렇게 졸아!”하면서 야단쳤습니다.
“저 안 졸았어요.”
“그럼. 안중근 의사를 누가 죽였냐?”
그러자 사오정은 “제가 안 죽였어요.”
선생님은 속이 터져 때릴 수도 없어서 ‘아버지 모시고 오라’고 해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사오정 아버님, 요새 사오정이가 수업 시간에 말을 잘 안 듣고 자꾸 조는데 집에 무슨 일 있나요? 아니 글쎄 안중근 의사를 누가 죽였냐고 하니까 자기가 안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오정 아버지가 깜짝 놀라면서,
“예! 선생님, 걔가 요새 몸이 아파서 가끔 병원은 가지만, 절대 의사를 죽일 아이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들에 그 아버지입니다.
우리들이 사오정 아버지는 아닐까요? 아니 사오정곽 같은 사람은 아닐까요?
가끔 교회에서 보면 사오정처럼 동문서답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들이 동문서답하는 사오정이 되지 않으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잘 배워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성경 공부 시간에 열중하여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잘 읽고 성경 공부를 잘해야 합니다.
성경을 잘 읽고 성경 공부를 잘해야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아야 우리의 신앙도 자라게 됩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자라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도 넘치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P4.
어느 어르신의 기도
저의 늙은 것을 참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소년 시절에 요절하였고,
어떤 사람은 청년 시절에 일찍 갔고,
어떤 사람은 문지방에서 넘어져 살 수 없어 하직했고,
저는 하늘이
준 천수를 누리며 무사하게 살아왔으니,
이는 하나님이 저를 돌봄이니,
이에 감사하고 만족함을 느낍니다.
오늘의 저는 늙었지만,
오늘이야 말로,
남은 인생 중에서,
가장 젊은 날입니다.
오늘을 꽉 붙들고,
오늘을 건강하게 살고,
멋있게 우아하게 여유롭게 살다가,
전능의 성령의 날에,
값어치 있게 쓰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지금 늙어 있어도,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생각나면 전화하고,
보고 싶으면 만나고,
좋아하면 사고,
어디 가고 싶으면 달려가고,
놀고 싶으면 놀고,
어떤 때는 정말 시간이 길게 느껴 집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제 부터는,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말게 하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늘그막에
하나님의 일을 한 모세와 같이,
아론의 지팡이와 같이,
이 늙은이를 써 주시옵소서.
오직 영과 혼과 육을 하나님의 중심에 두고 인생을 살게 하소서.
이것이 값진 인생인 줄 믿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영생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이니,
그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게 저희 마음을 주관하소서.
그래야 제 마음이 평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런 기도를 드린 어르신처럼 우리들도 오늘이 가장 젊고 패기가 넘치고, 행복한 날인 줄로 믿고 힘차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김용임 가수가 부른 “나이야 가라. 오늘이 젊은 날”이라는 노래가 있듯이 살아 있는 날 중에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고, 좋은 날이라고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매일매일 청춘처럼 기쁘고 젊게 살아갈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참 많은 여인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레위기에도 보면 오늘 본문에 슬로밋(Shelomith)이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은 단 지파 디브리의 딸(the daughter of Dibri the Danite)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슬로밋이라는 여인을 좀 더 묵상해 보려고 한다.
슬로밋이라는 여인은 어떤 여인일까?
슬로밋이라는 여인은 어떤 삶을 살다 간 여인일까?
생명의 책,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삶의 원리가 되는 모세5경, 토라에 기록되었으니 칭찬받을 수 있는 여인일까?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방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성경인 레위기에 기록되었으니 영광스러운 여인일까? 아닐까?
D4.
① 하나님의 거룩성을 온전하게 지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업신여기지 않고 왜곡시키지 않기를 간곡하게 원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전면으로 도전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떠난 사람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파괴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은 이스라엘의 단지파 어머니와 애굽 사람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투는 사건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
사람이란 존재는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다툼이나 싸움은 일어날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다투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는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면 이상한 일일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과 다투면서 아마도 자기 자신이 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사람은 상대에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그러면 쓰나.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아주 쓸모없는 신이구먼.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란 신이 그럴 수 있나? 여호와 하나님이란 신은 가짜이거나 사기꾼 신이구먼.” 등등 넘어서는 안 되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저주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 사람의 아버지가 애굽 사람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이스라엘 단지파 출신의 여인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을 듣고 출애굽의 대열에 끼어서 출애굽한 사람이다.
엄마의 말을 듣고 출애굽의 대열에 참여하였지만, 지금까지 출애굽 과정에서 시내 산까지의 여정을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하고 느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저주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저주하고 대적하는 이 사람을 붙들고 모세에게로 와서 감옥에 가두게 된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여쭈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14-16절까지의 말씀으로 해답을 주신다.
하나님은 “그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23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니 그들이 그 저주한 자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성들은 그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낸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들었던 모든 저주를 그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어서 전가시키고 돌로 쳐서 죽인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그 사람은 돌에 맞아 죽는 것이다.
너무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하게 불러도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조롱하고 저주하고 대적했다면 당연히 죽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저주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다.
여호와 하나님이란 이름이 너무나 고고하고 거룩하고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면서 성경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그분” 또는 “그이름”이라고 읽는다.
너무나 엄격하시고 존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고 저주하고 대적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조롱이나 저주를 받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가장 존귀하시고 엄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너무나 엄격하게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조롱이나 저주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다.
그래서 오늘 슬로밋 여인의 아들은 참혹하리만치 돌에 맞아 죽게 된다.
그러면 자신이 낳은 아들이 실로 끔찍하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살아야만 했던 슬로밋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을까?
ⓐ 애굽인과 혼인한 이스라엘 여인
이 여인은 고센 땅에서 단 지파 디브리의 딸로 태어난 여인이다.
디브리(Dibri)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디브리의 딸이라고 말하면 “아하...그 사람의 딸이구나. 그 사람의 외손주가 그런 일을 저질렀구나.”라고 알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디브리라는 사람은 단 지파 중에서도 상당히 중심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상당히 많은 잡족들이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많은 잡족들 중에는 상당수의 애굽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 추산할 수 있다.
많은 애굽인들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슬로밋(Shelomith)이라는 여인도 애굽 고센 땅에 살면서 애굽인과 혼인한 여인이다.
슬로밋 여인이 애굽의 고센 땅에 살면서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남성과 결혼하였으면 좋았겠지만, 그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민족들과도 혼인을 맺었을 것이다.
다양한 민족들과 혼인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중다한 잡족들이 동행했던 요인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혼인한 다양한 민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약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대단한 믿음을 가지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방인들보다는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는 여인
슬로밋 여인은 애굽인과 혼인하여 몇 자녀를 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슬로밋 여인이 낳은 아들 중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있는 것이다.
이 아들은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과 다투는 일이 생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다투고 싸우면서 사는 것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어떤 모습으로든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이란 존재는 어떤 모습으로든 다투고 싸우면서 정도 들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싸울 때 싸우더라도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마지노선이란 것이 있다.
넘어서는 안 될 그 마노지선을 넘어가 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까지 발전하게 된다.
슬로밋 여인의 아들은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는 과정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일이 발생한다.
아마도 이 아들은 자신이 무척이나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무슨 연유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싸웠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자신들이 믿는 신에 대하여 싸우지 않았을까 싶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애굽 사람이기 때문에 애굽에 있는 다양한 신들과 비교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다투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슬로밋 여인의 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조롱하고 저주하고 대적하는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슬로밋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조롱하고 저주하고 대적하는 것은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되는 마지노선을 넘는 것이다.
슬로밋 여인의 아들의 입에서 조금의 거침도 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고 저주하고 대적하는 말이 도무지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란 분은 이름을 부르기도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데,
감히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일인데,
여호와 하나님이란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오는데,
슬로밋 여인의 아들은 조금도 거침없이 마구마구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고 저주하고 대적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슬로밋 여인의 아들이 하는 말을 듣던 백성들은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백성들은 슬로밋 여인의 아들을 붙잡고 모세에게로 끌고 온 것이다.
모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감옥에 가두게 된다.
아들이 감옥에 갇히는 모습은 슬로밋 여인에게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수치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엄마는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들로 인하여 명예를 누려야 하는데, 자신이 낳은 아들로 인하여 견딜 수 없는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명예롭게 살고 싶고, 명예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각오로 살아간다.
그런데 슬로밋 여인은 명예는커녕 아들로 인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아들로 인하여 뭇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면서 수치를 감내하는 것이다.
ⓒ 뭇 백성들의 질타를 당하는 여인
슬로밋 여인의 아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로밋 여인을 향하여 따가운 질타를 보내는 것이다.
백성들은 직간접으로 견딜 수 없는 질타를 하는 것이다.
아들을 잘못 키운 죄, 아들이 저지른 죄악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슬로밋 여인은 온갖 질타와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직접 말로 질타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속으로 질타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슬로밋 여인은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수군만 거려도 자신을 향하여 조롱하는 것 같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날개가 있으면 멀리멀리 날아가 버리고 싶다.
입이 있어도 변명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다.
죄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싶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 죽은 아들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여인.
슬로밋 여인의 아들을 감옥에 가둔 모세는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 여쭈었는데, 하나님은 뜻밖에도 그 아들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아들이 조롱하고 저주하는 말을 직접 들은 사람이 그 아들에게 안수하면서 자신들이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도로 그 아들에게 하도록 한다.
그런 후에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아들에게 그대로 행하여 아들을 돌로 쳐서 죽이게 된다.
돌로 맞아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슬로밋 여인은 울부짖지 않았을까?
백성들이 무참하게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슬로밋 여인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감정이었을까?
아무리 자기 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넘어서는 안 되는 마지노선을 넘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죽이기까지 할 수 있느냐? 하면서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을까?
그것도 너무도 끔찍하게 백성들이 돌로 쳐서 죽이도록 해야만 했단 말인가? 하면서 분노하지는 않았을까?
아들을 잘못 가르친 것은 애미의 잘못이니 아들 대신에 이 애미를 죽여달라고 하면서 울고불고 매달리지는 않았을까?
아들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데 애미로서 무슨 생각인들 하지 못했을까?
아들 따라 같이 죽고 싶지는 않았을까?
멀쩡한 아들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데 무슨 행동인들 하지 못할까?
우리들 자신이 슬로밋 여인의 처지였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발광하고 있지 않겠는가?
가만히 관객이 되어 그냥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자기 아들이 죽을죄를 지었어도 아들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그냥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애미가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로서 다윗 왕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사무엘하18;33)”라고 통곡하지 않던가.
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아들이 죽었는데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을 그리워하며 통곡하는데, 슬로밋 여인은 어찌 아들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데 가만히 앉아 있겠는가?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슬로밋 여인이 아무리 분노하고 원망하고 울부짖어도 하나님의 뜻은 돌이키지 않는다.
죽은 아들은 다시 살아 돌아오지도 않는다.
슬로밋 여인은 이제 죽은 아들을 가슴에다 묻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아들이 죽을죄를 지어 죽었어도 아들을 낳은 애미로서 한 맺힌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죄 많은 여인, 재수 없는 년, 자식 잡아먹은 년이라고 자책하면서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슬로밋 여인이 낳은 다른 자녀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저주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은 아들을 자신의 가슴에 묻고 평생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자녀들에게 결코 이 아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여 애미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일깨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뼈저리게 강조하면서 평생을 회개하고 자책하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② 슬로밋 여인의 아들을 희생양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왜 하나님은 슬로밋의 아들을 용서하지 않고 징계하셨을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한없이 넓고 자애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신 분이다.
그러면 슬로밋 여인의 한 맺힌 울부짖음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 아들을 용서해 주실 수는 없었을까?
하나님은 조금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고 그 아들을 징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고 싶어하신 것이다.
슬로밋 여인의 아들이 저지른 사건은 슬로밋 여인의 아들만 저질렀던 사건일까?
앞으로는 이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어쩌면 중다한 잡족들이 동행했기 때문에 슬로밋 여인의 아들이 저지른 사건과 비슷한 사건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다.
넘어서는 안 되는 마지노선을 넘어가는 경우는 허다하게 발생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시간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어쩌면 슬로밋 여인의 아들의 경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기 위한 희생양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단지 아버지가 애굽 사람이라서 이런 징계를 받았다기보다는 히브리 민족 전체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조롱하거나 저주하거나 대적하는 행위를 한다면 슬로밋 여인의 아들과 같이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매사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이다.
매우 강하게 메시지를 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종류의 사건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런 종류의 사건들은 비일비재하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슬로밋 여인의 아들을 희생양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종류의 징계하시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기 위하여 희생양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다(多)를 얻기 위해서 소(少)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슬로밋 여인의 한 가정의 아픔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B4 & L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기 위하여 희생양으로 슬로밋 여인의 아들을 사용하신 것이다.
희생양이 된 아들을 처참하게 먼저 보내고 한 맺힌 삶을 살다 가야만 하는 슬로밋 여인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올곧게 살아야 함을 일깨우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한없이 자애롭고 자비롭고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고 저주하고 비난하고 대적하는 죄, 성령 하나님의 감동을 거역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런 죄악의 문제는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정직하고 올곧게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깨우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고 저주하고 대적하는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살아야 함을 일깨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탄이 앞세우는 인본주의를 내세워서 평등이니, 인격이니 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려는 죄악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징계하실 것이다.
슬로밋 여인의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넘어서는 안 되는 마지노선을 넘는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하고 그런 아들을 둔 슬로밋 여인은 평생 한 맺힌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평등이니 인격이니 하더라도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마지노선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자연에는 기본질서가 있다.
자연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악행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동성애법을 만들고, 하나님을 가장 대적하는 이슬람법을 만들고, 인권이란 미명 아래 몹쓸 법들을 만들고, 주민자치법을 만들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올무에 빠진 인간들의 죄악을 하나님은 반드시 징계하실 것이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참여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지키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 따라 살아나기 http://cafe.daum.net/GRACEOFJES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