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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신앙 – 성경]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인간과 함께하신 하느님의 여정이 교회의 역사라고 한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말씀하셨고, 또 인간은 그 말씀에 어떻게 응답했는지에 관한 역사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그 성경을 읽어 온 역사가 신앙인들의 삶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입니다. 교부들에게 성경은 무엇이었고, 교부들은 성경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교부들이 말하는 성경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성경을 ‘하느님의 편지’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가까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도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는 당대 신자들을 꼬집는 글을 남겼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집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책을 손에 들고 여러분을 향해 쓰인 것을 찾고 성경을 탐구합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 그들에게는 ‘책의 면들이 어떤가?’, 아니면 ‘글씨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쓰여 있는가?’와 같은 것이 중요하지 그것을 읽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쓸모나 이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와 특권을 과시하려고 그렇게 합니다. 이는 결국 허영입니다. 책의 쓸모는 어디에서 옵니까? 황금으로 쓰인 글자입니까, 그 책의 내용입니까? 성경은 책 속에만 남아 있으라고 주어진 게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겨지라고 주어진 것입니다”(「요한 복음 강해」, 32, PG 59, 186-187).
가톨릭 신자들은 유사 종교나 이단들에 현혹되기 쉽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상대적으로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도록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기도와 성경 읽기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인 듯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나도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그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은 나의 마음, 살로 된 심장에 새겨지게 됩니다.
하느님 말씀과 기도
치프리아노 성인은 기도로 이어지는 성경 독서의 성격을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십시오. 또 열심히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할 때는 그대가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고 성경을 읽을 때는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서간」, PL 4, 226).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대의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대가 읽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대와 말씀하십니다”(「시편 상해」, PL 37, 1086).
이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고 하는 교회의 전통을 말해 줍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읽기’, ‘묵상’, ‘기도’, ‘관상’의 순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기도하는 이는 결국 하느님을 닮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뵙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서로 닮는 만큼만 서로를 알아보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 면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것과 나의 것을 알아보고 닮지 않은 나의 모습을 그분의 모습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 정신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내적인 시각을 비추어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보고 성경에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성경은 거룩한 이들의 행실을 이야기해 주고 약한 자들의 영혼이 그것을 따르도록 이끌어 줍니다. 악덕에 맞선 싸움에서 승리할 때 우리의 약함을 북돋워 줍니다. 성경 말씀의 바탕 위에서, 힘 있는 많은 사람의 승리를 바라보는 만큼 싸움에서 정신이 약해지는 일이 적어지게 됩니다. 잘못된 것도 알아보게 해 줍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승리에서 본받아야 할 것들을 얻게 해 주고 그들의 실패에서 우리가 넘어질까 두려워해야 할 것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욥은 유혹으로 강해진 사람이라 적혀 있고 다윗은 유혹에 패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옛사람들의 덕은 우리의 희망을 강하게 해 주고 그들의 실패는 우리에게 현명한 겸손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욥의 도덕」, PL 75, 553-555).
하느님의 말씀과 세상의 말
요즘 세상은 미디어의 홍수 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어 있는 동안은 늘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지요. 엿새 내내 미디어가 퍼뜨리는 세상의 가치관 속에 있다가 주일 하루 성당에 가서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우리 안에 더 크게 차지하는 가치관이 복음 말씀이 아닌 세상의 가치가 아닐는지요. 예로니모 성인의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예언서들을 읽기 시작하자 예언서의 조잡한 문체가 내게 싫증을 불러일으켰다. 눈이 멀어 빛을 볼 수 없었음에도 나는 내 눈이 아니라 태양이 잘못된 탓이라 여겼다. 이렇게 오래된 뱀이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침으로써 사순 시기가 반나마 지났을 무렵 내 몸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열이 내 육신을 쳐서 나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 나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영으로 붙들려 올라가 심판관이신 주님의 법정으로 끌려갔다. 그분을 둘러싼 광휘가 너무 찬란하여 땅에 엎드려 있던 나는 감히 눈을 들어 그분을 볼 수도 없었다. 그분께서 너는 누구냐고 물으시자 나는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답을 드렸다. 그러나 주재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는 키케로인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매질을 당하면서 뉘우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이 말만 속으로 되풀이하였다. ‘저승에서 누가 당신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6,6) 뒤이어 나는 외치기 시작했다.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서간」, 22,30, PL 21,416-417).
세상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분을 닮아 가는 기도의 여정이 바로 성경 읽기라고 한다면 그 과정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 또한 필요합니다. 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싫증을 내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지요. 다마스커스의 요한 성인은 성경을 읽는 이들을 이렇게 격려합니다.
“게으름으로 두드리지 맙시다. 힘 있게 꾸준히 두드립시다. 두드리는 데 지치지 맙시다! 이렇게 하면 우리에게 열릴 것입니다. 한 번이나 두 번 읽고, 읽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계속 읽고 묵상하며 여쭙시다. 모세는 말합니다. ‘아버지에게 물어보아라. 알려 주리라.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라. 말해 주리라’(신명 32,7).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정원의 샘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 흐르는 지극히 맑고 영원한 생명수를 길어 냅시다. 단순함으로 그것을 맛보고 즐깁시다. 다함 없는 은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정통 신앙」, PG94, 1176-1177).
[교부들의 신앙 – 기도] 교부들의 기도
“기도란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관상하는 것이며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고 천사들과 같은 영예를 누리는 것이다. 선에 있어 진보하는 것이며 악을 물리치고 죄인들이 회복되는 것이며 앞날의 기초를 이루는 현재의 선을 누리는 것이다”(「주님의 기도 I」).
니사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주님의 기도’를 풀이하며 기도를 이처럼 정의합니다. 그에 따르면 기도란 “거룩한 신적 활동이지만, 대다수의 사람이 살면서 소홀히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무일도’는 ‘하느님의 일’(Opus Dei)을 우리 식으로 옮긴 것이지요. 이는 본디 수도원 전통에서 시간마다 바치던 기도, 시간경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 곧 삶 전체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기도의 본 뜻입니다. 교부들의 글을 대하다 보면 어떤 주제를 이야기하다가도 자연스럽게 기도로 넘어가는 대목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삶이 곧 기도였던 그분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에프렘 성인과 암브로시오 성인의 기도를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에프렘의 기도
“왕 중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생명과 죽음의 권한을 쥐고 계십니다. 당신은 숨은 것과 비밀스러운 것을 아시니 우리 생각도 감정도 당신께는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저의 많은 죄를 씻어 주소서. 당신 앞에서 저는 악을 행하였습니다.
날마다 저의 삶은 저물어 가고 저의 죄는 날마다 쌓여 갑니다. 육신과 영혼의 주인이신 하느님, 당신은 제 육신과 영혼이 얼마나 약한지를 아십니다. 주님, 제 약함을 당신 힘으로 채우시고 저의 비참을 당신이 지탱해 주소서.
많은 사람이 저를 놀라워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당신이 저의 굳센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제게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모든 선의 주인이신 주님, 당신이 하신 좋은 일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헤아릴 수 없는 저의 죄를 기억하지 마시고 수많은 저의 배신을 용서하소서.
주님, 저의 기도, 비참한 이의 기도를 외면하지 마소서. 지금까지 저를 지키셨듯이 저를 지켜 주시어 마지막 날까지 당신 은총을 제게 보존하소서. 당신 은총은 제게 지혜를 가르치셨습니다. ‘당신 길을 걷는 이는 복되니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지혜입니다.
주님, 저의 부족함 속에서도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께 영광을 드립니다. 당신 자비가 제게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의 도움, 저의 보호이셨습니다. 당신의 크신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우리 하느님이신 당신께 영광 있으소서. 아멘”(「잠언의 모방」, 130).
시리아인 에프렘(306-373년) 성인은 ‘성령의 수금’이라 불리는 교부입니다. 흔히 ‘노년의 기도’라고 불리는 이 기도에서 성인은 이제 저물어 가는 인생과 그에 비례하여 쌓여 가는 죄들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비참 속에서도 주님을 찬미하는 노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암브로시오의 기도
“‘치유받을 수 있도록 네 상처를 의사에게 열어 보여라. 보여 드리지 않아도 그분은 네 아픔을 아시지만, 그분은 네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기다리신다. 눈물로 너의 상처를 씻어 주신다. 복음서 속 여인도 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제 허물을 깨끗이 씻어 버렸다. 그렇게 죄를 씻고 제 죄의 악취에서 멀어졌다.’
오 예수님, 제 인생길을 함께 걸으시느라 더럽혀진 당신 발을 제가 씻도록 허락하신다면! 제 행업으로 당신 걸음마다 더럽혀 놓은 얼룩들을 씻어 드릴 수 있도록 당신 발을 제 앞에 내어놓으신다면! 하오나 당신 발을 씻어 드릴 살아 있는 물을 어디서 구하리이까? 당신 발을 씻어 드릴 수 없다 해도 저 자신이라도 깨끗이 씻을 수 있다면!
‘그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는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들으려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하리까? 저는 제 죄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더 크게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적 통치라는 두려운 권력과 시장의 분노한 소란으로부터 주교직에 부름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두렵습니다. 당신은 그토록 너그럽게 저를 용서하셨음에도, 제가 적게 사랑한 자, 은혜를 모르는 자로 심판받을 것이 두렵습니다”(「참회론」, 1-2.8).
권력자들에게 굽히는 일이 없었고 죄인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던 암브로시오 성인은 사목자들의 모범이었습니다. 암브로시오의 전기 작가 파울리노는 그런 성인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는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였고 우는 이들과는 함께 울었다. 누가 죄를 고백하기 위해 찾아올 때마다 울곤 하여 고백하는 이마저 울게 하였는데 그것이 마치 주교 자신이 죄에 떨어진 사람과 함께 죄에 떨어진 듯하였다. 그러나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그가 전구해야 할 주님 말고는 그 누구와도 말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렇게 하여 그의 후임 주교들에게 사람들의 고발자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전구자가 되라는 훌륭한 모범을 남겨 주었다.”
그의 말대로 암브로시오가 죄인들과 함께 울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하느님 앞에서 죄인임을 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암브로시오 성인이 남긴 찬미가 한 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무일도 제1주간 주일 제1 저녁 기도 찬미가로 바치는 기도지요.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Deus, creator omnium)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기도인데 「고백록」 제9권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어머니 모니카 성녀를 여읜 뒤 기억하는 찬미가이기도 합니다. 본디 모두 여덟 연으로 되어 있으나 우리가 바치는 성무일도에서는 여섯 연으로 되어 있지요.
세상에 어둠이 내려오는 시간에 하느님께 올리는 찬미가입니다. 저녁 기도는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에서 암브로시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의 빛이 꺼지는 일이 없이 우리 마음이 그분을 향해 깨어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만물의 창조주신 우리 하느님
우주의 지배자도 당신이시니
낮에는 태양 빛을 내려 주시고
밤에는 단잠으로 쉬게 하시네.
피곤한 뼈마디를 쉬게 하시어
다시금 일하도록 힘을 주시고
피곤한 마음까지 쉬게 하시어
쌓여진 근심 걱정 풀어 주시네.
은총의 하루해가 이미 저물고
또다시 어둔 밤이 다가왔으니
지은 죄 뉘우치며 용서받도록
찬미의 노래 불러 감사 드리세.
마음을 가다듬어 주님 기리며
처절한 가락으로 하소연하고
정결한 사랑으로 섬겨 드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예배 드리세.
깊은 밤 어두움이 누리를 덮어
대낮의 밝은 빛을 몰아내어도
우리의 믿음만은 한결 같으니
이 밤도 믿음으로 환히 밝으리.
사랑의 아버지와 독생 성자와
위로자 성령께서 삼위일체로
영원히 무궁토록 살아 계시며
만물을 사랑으로 다스리소서. 아멘.
[교부들의 신앙 – 교만] 마르티노 성인이 전하는 교만
물을 만물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던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사람에게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쉬운 일이라면 남을 충고하는 일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으로 유명한 소크라테스 또한“알아야 할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한없이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비로소 ‘자만’과 ‘교만’에서 벗어나 자신의 분수를 깨닫고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호모 데우스’(Homo Deus), 곧 ‘신이 된 인간’이라는 말이 새로 생길 만큼, 오늘날의 인간은 근대의 산업화와 과학 기술 문명에 도취되어 스스로 하느님인 것처럼 착각하는 교만의 길로 끝없이 나아가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 올린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수많은 고층 건물과, 쉴 새 없이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의 굴뚝을 바라보노라면 현대판 바벨탑 사건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브라가의 마르티노(Martinus Bracarensis) 성인이 남긴 「교만」(De superbia)이라는 작품을 통해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의 모습을 겸손되이 돌아보고자 합니다. 성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자부심과 교만이라는 양날의 칼
양날의 칼처럼 ‘자부심’이라는 뜻을 지닌 ‘Pride’는 ‘교만’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뛰어나고, 또 잘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순간, 자칫 교만이라는 늪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마르티노 성인도 이러한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교만’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갈 수 있었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현세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렸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교만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도 있었던 위대한 예언자 ‘다윗’을 예로 들며 말합니다.
다윗 임금은 교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죄의 위험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다음의 성경 말씀을 읊으며 신심어린 마음으로 늘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거만한 발길이 제게 닿지 않게, 악인들의 손이 저를 내쫓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나쁜 짓 하는 자들은 넘어지고 쓰러져 일어서지 못하리이다”(시편 36,12-13).
또한 “하느님처럼 되어서”(창세 3,5), “주님께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역겨워하시니 그런 자는 결코 벌을 면하지 못한다.”(잠언 16,5), “오만의 시작은 죄악이고 오만에 사로잡힌 자는 악취를 뿜어낸다.”(집회 10,13), “나는 구름 꼭대기로 올라가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져야지.”(이사 14,14)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교만은 죄의 뿌리이자 근본임을 항상 자각해서 경계해야 한다고 주의를 당부합니다.
하느님을 적으로 대하는 교만
이처럼 교만은 자신의 처지 이상으로 높이 오르려는 ‘오만’이기도 합니다. 교만 가운데 가장 사악한 것은 자신이 하느님과 동등하거나 능가한다고 생각하여 하느님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마르티노 성인은 이야기합니다.
성인은 하느님의 첫 번째 천사였던 ‘루치페르’(Lucifer)를 예로 들며, 교만으로 말미암아 그가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고, 그 폐해로 인간에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영광과 빛 때문에 ‘루치페르’라고 불리는 첫 번째 천사는 숭고하고 축복받은 천사계에서 떨어졌습니다. 자신의 빛나는 아름다움이 천국의 어떤 능력보다도 위대하다고 착각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하느님의 배려와 도움 없이 오롯이 스스로의 능력인 것처럼 믿어서, … 스스로 하느님인 양 착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하느님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이 받았던 축복이 하느님께서 먼지와 재에서 빚어 만드신 인간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질투에 사로잡혀, 자신을 넘어뜨린 교만이라는 똑같은 무기로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질 것이다.’(이사 14,14)라고 스스로에게 말한 것처럼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창세 3,5 참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이 되고 싶다는 인간의 탐욕, 오직 이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했습니다”(「브라가의 마르티누스」, 18-19면).
결국, 교만이라는 씁쓸한 꿀로 만든 매혹적이고 위험한 첫 번째 독약이 천사와 사람까지 속여, 하늘과 땅의 창조물 모두를 쓰러지게 했습니다.
이처럼 교만은 다른 대상이 아닌 오직 하느님만을 적으로 대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신다.”(야고 4,6; 1베드 5,5)고 일러 줍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
교만이라는 악은 많은 사람을 유혹과 위험에 빠뜨립니다. 교만한 자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영적으로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사람과 부자 그리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입니다.
교만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더 강하게 유혹하여 자신을 위대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무엇을 행하거나 생각하고 말할 때, 자신의 지혜와 분별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보면서도 하느님을 찬미하거나 감사드리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치켜세워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존경하라고 강요합니다.
교만이라는 주제는 성경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생활에 밀착되어 만연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마르티노 성인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교만이라는 욕망이 생겨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진실로 죄의 악습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 뿌리부터 완전히 잘라 내야 합니다. 죄의 모든 산물은 그 씨가 자라나기 전에 제거해야만 완전히 없어지기 때문입니다”(같은 책, 23면).
마르티노 성인의 당부처럼 우리 마음에 교만이라는 싹이 자라나지 않도록 늘 마음의 거울을 함께 닦아 나가는 것은 어떨까요. 다윗 임금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교부들의 신앙 – 니사의 그레고리오] 선행
현대 사회 종교의 위상
‘종교의 수명은 얼마나 남았을까?’라는 오래된 물음을 제기한 어느 종교학자의 칼럼을 얼마 전 읽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드러난,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가진 부정적인 단면을 알려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것이 글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코로나19의 확산에 종교(신천지)가 숙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극우 개신교 단체의 집회와 현장 예배 강행은 사회의 위기를 자조하는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종교의 위상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입니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칭송받는 이스라엘의 유발 하라리 교수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실험실의 괴짜 몇 명이면 된다. 과거에 죽음이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일이었다면 지금은 공학자들이 그 권한을 인수받았다.”(「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김영사, 2017, 42쪽)라며, ‘신이 된 인간’(Homo Deus, 106쪽 참조)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기성 종교에 대한 무용론과 더불어 본체론적 위기를 맞은 것이 오늘날 종교가 직면한 현실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과연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은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온 천지에 ‘빨간 십자가’와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도배된 준(准)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밖에 없다.’는 독일의 현대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년, 「안티크리스트」 참조)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천과 행동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이 사회에 다시금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니사의 그레고리오의 「선행 - 사랑해야 할 가난한 이들」 제1권(De beneficentia - Vulgo de pauperibus amandis, I, 이하 「선행」 표기)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려움에 놓인 이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레고리오가 촉구한 실천
그리스도인들은 철학과 사색을 통해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악의 유혹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공연하게 악습에 빠진 채 술과 고기만을 멀리하고 물과 야채를 먹는 시늉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단언컨대 겉으로 드러난 여러분의 금욕적인 행위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겉과 속은 같아야 합니다.
집도 없이 헐벗은 채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근래에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의 집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대부분 전쟁의 희생자입니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입니다. 곳곳에서 손을 내밀며 구걸하는 그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하늘을 지붕 삼아 주랑과 골목과 모퉁이를 자신의 안식처로 삼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올빼미처럼 벽의 틈새에 숨어 지내며, 형편없는 누더기를 걸치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연민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식사라고는 사람들이 던져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동물들이 마시는 샘이 그들의 식수원입니다.
잔은 그들의 손바닥이며, 그들의 창고는 아무것도 넣을 수 없는 찢어진 주머니가 전부입니다. 무릎이 그들의 식탁이며, 태양은 식탁을 밝혀 주는 전등입니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대자연의 산물인 강과 연못이 그들의 공중목욕탕입니다. 이 잔인하고 방랑하는 그들의 삶은 날 때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가난과 시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불행한 여러분의 형제들을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단식을 통해 아낀 것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여러분과 그들 사이에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의 배부름과 형제의 굶주림이라는 내적 갈등을 스스로 이겨 냄으로써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방법만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놓인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과 선행을 통해 그들에게 빛과 식탁을 마련하고 포근한 쉼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애정 어린 말로 위로하고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한 선행은 결국 우리의 생명을 지켜 줄 것입니다. 선행은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며, 부자들의 스승이요, 좋은 간호사이자, 노인 요양 보호사와 같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들의 보물이며, 불행한 사람들의 안식처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선행은 아품을 지닌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와 선행을 원하십니다. 자비와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선하고 거룩하게 되고, 모든 지성을 뛰어넘어 한처음의 순결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신성에 동참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행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구구절절 우리에게 창조주이시자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닮도록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만의 기쁨을 위해서 모든 것을 차지하고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쾌락을 누리는 데에 돈을 쓰고,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 부를 축적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과 어려운 이웃에 대해서는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지금까지 절대로 변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천상의 진리를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는 지성과 이성을 지닌 여러분은 선행을 통해서, 현세적인 데 현혹되지 말고, 썩어 없어질 허망한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절제하는 삶을 통해,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쓰는 대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선행」 참조).
사랑의 선행으로 전하는 복음
코로나19와 경제적 여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날, 니사의 그레고리오의 말씀을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옵니다. 비록 종교에 대한 회의와 무용론이 대두되는 지금이지만,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는 예수님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만큼은 먼저 나서는 선행으로써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신을 비움으로써 영생을 얻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선행을 통해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쁜 소식, 곧 복음 선포일 것입니다.
[교부들의 신앙 – 니사의 고레고리오] 생명의 길
코로나19 감염증이라는 무서운 역병의 시간을 보내면서 참 많은 것이 변해 갑니다.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이고 수많은 사람이, 팬데믹(전염병 세계적 유행)에서 벗어난다 해도 세상이 이전과는 같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지금, 인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희망을 비추는 일
이 새로운 길 위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공동번역 성서」, 로마 5,3-5). 왜냐하면 “종교는 … 사람들의 목마름, 사람들의 근원적인 갈망을 채워 주기 위해 생겨났다.”는 어느 노교수의 말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질병의 고통과 경제의 어려움 속에 내일을 걱정하며 고민하는 이웃들에게 희망이라는 생명의 길,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니사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yssenus, 335?-395년)의 작품, 「너희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사랑해야 할 가난한 이들」 제2권(In illud: Quatenus uni ex his fecistis mihi fecistis)을 통해서,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 모색해 보고 싶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대 바실리오(Basilius Magnus, 329-379년)의 동생입니다. 형을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존경하고 따랐던 그레고리오는 형의 사회적 가르침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이들 형제와 더불어 ‘카파도키아 삼총사’로 알려진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us, 329-390년)와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사회적 연대 의식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사랑해야 할 가난한 이들」 제2권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도 그 맥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00여 년 전 그레고리오는 다음의 복음 말씀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하늘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떠올렸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36,40).
니사의 그레고리오가 전한 강론
‘이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고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선택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길을 바라보며 그 길을 향해 헌신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은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온정이 담긴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은 특히 지금 이 순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생계를 위해 몸부림치는 가난한 이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이웃은 돌보면서 우리 가운데 복음이 실현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보여 주신 일치와 단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저버린 사람들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자연적 본성을 따라야 합니다.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된 불행한 이를 최소한의 연민도 없이 길가에 버려두고 온 사제와 레위 사람을 본받을 수는 없습니다(루카 10,30-36 참조). 어려움을 당한 이에게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이런 사람들의 본을 따른다면 우리도 결코 죄로부터 결백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말이 최소한 이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말로써 그들의 상처를 덮어 주고 사랑의 노래로써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생각은 과연 옳습니까?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과 사랑의 실천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림과 현실이 다르듯, 말과 행동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웃을 도와야 하는 주님의 계명을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다 그들을 격리시켜 놓고 먹을 것을 주었다고 그들에게 해야 할 바를 다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일은 자비도 연민도 없는 그저 보여 주기에 불과합니다. 그럴듯하게 선으로 포장은 했으나 결국은 그들을 우리의 삶 밖으로 추방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기억해야 합니다. “삶의 시작도 끝도 모든 이에게 한가지다.”(지혜 7,6)라는 말씀처럼 인간은 모두가 예외 없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게 마련이고 이 법칙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로마 11,20)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새겨, 겸손하게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교만으로 말미암은 첫 번째 희생자가 될지도 모릅니다(「사랑해야 할 가난한 이들」 제2권 참조).
함께하는 삶으로 드러내는 복음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이웃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간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모습과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빠진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 사랑의 나눔이라는 애덕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의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생명의 길이자, 하느님의 길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교부들의 신앙 – 빛이신 예수님]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빛’을 만드시어 ‘빛과 어둠을 가르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셨다”(창세 1,3-4 참조). 첫째 날에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넷째 날 한 번 더, 빛과 어둠을 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1,16-18).
빛과 어둠, 그리고 식별
두 번 반복되는 ‘빛과 어둠을 가르셨다.’는 말씀을 두고 이런 묵상을 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도 빛과 어둠을 가르시기 위해 두 번이나 노력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빛과 어둠을 가르고 구별하고자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또 어떠한 것을 얼마나 쉽게 빛이라고 혹은 어둠이라고 단정 짓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빛과 어둠을 가르신 분께서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단지 주위를 밝혀 볼 수 있게 하는 데 그치지는 않습니다. 완전한 어둠 속에 있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공간도 느끼지 못합니다. 시간 감각을 상실해서 낮인지 밤인지,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공간도 느끼지 못합니다. 더듬더듬 조심스레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빛이 없으면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그때 빛이 밝혀지면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넘어, 새롭게 시간과 공간이 주어집니다. 결국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선물하셨다고 불 수 있습니다.
빛이신 그분과 함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요한 20,19)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잔혹 행위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제자들은 그들의 집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닫아걸었습니다. 어떤 빛도 그들의 감각에 와 닿지 못하도록 완전히 차단한 채 갈수록 더 큰 슬픔에 젖어 들었고, 밤의 어둠도 갈수록 더 큰 슬픔에 젖어 들었고, 밤의 어둠도 갈수록 더욱 짙게 스며들었습니다. 어떤 어둠도 그들이 느낀 슬픔과 두려움의 어둠과 견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위로와 충고의 빛으로도 그것을 옅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베드로 크리솔로고, 「설교집」, 84,2).
빛이 실현하는 쇄신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놓인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두려움에 닫았던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변한 것입니다.
빛이신 분을 모셔 들임으로써 제자들은 빛과 어둠을, 선과 악을,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육신도 모두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참조)라는 말씀처럼, 옳게 두려워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간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구원자께서 오시어 참빛을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빛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어둠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이 어둠이 그들을 눈멀게 하고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해가 눈이 병든 이들을 밝히려고 환한 광선을 내뿜듯이, 지지 않고 밤도 없으며 빛이신 영적 태양도 세상에 오시어 이루 말한 수 없는 당신의 거룩한 기적들을 통하여 신성의 눈부신 섬광을 널리 비추십니다”(오리게네스, 「요한 복음 주해 단편」, 9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21). 이때 ‘기대하였다’라는 말은 ‘기대하였지만, 그 기대가 무너졌다’는 뜻을 내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엠마오로 가는 길은 ‘체념과 절망의 시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되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아마도 ‘아, 이쯤에서 예수님을 만났었지…. 여기서 이런저런 말씀을 해 주셨지…’ 하고 기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길, 그 시간이 예수님을 채워졌습니다. 그리하여 같은 길이었지만, 전혀 다른 길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고, 새로운 시간 속을 걸었던 것입니다. 해가 있었을 때 걸었던 길은 빛 속에서도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밤에 돌아가는 길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죄와 무지에 눈이 먼 채 오랜 원수의 속임수와 오류에 빠져 있는 우리를’(루카 1,79 참조) 보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알게 하는 참빛을 우리에게 주셨고, 오류의 어둠을 거두어 가셨으며, 하늘로 가는 확실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을 이끌어 당신께서 보여 주신 진리의 길을 걷게 하셨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평화의 거처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존자 베다, 「복음서 강해」, 2,20).
빛을 바라보며 살아갈 이유
새로운 시간, 새로운 공간을 산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약속하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하느님께서 머무실 자리를 없애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삶과 생각 안에서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시지 못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두운 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에게 등대의 불빛이 생명줄과 같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빛이요 생명줄이십니다. 빛과 어둠을 가르신 분께서 우리에게 생명줄을 던지시고 빛이 되어 오셨습니다. 어둠을 뚫고 빛으로 이끄시는 분, 우리에게 살아갈 빛과 시간과 공간을 주시는 분, 그분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19.21). 빛과 어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두 번이나 빛과 어둠을 가르셨는데, 우리가 빛과 어둠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빛이시며 진리이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믿는 모든 이들은 빛이지만, 그들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며,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이는 누구나 어둠에 감싸일 것입니다. 어둠 속에 남아 있지 않으려면, 세상에 온 빛을 믿어야만 합니다. 세상이 본디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5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