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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1) 온유함의 힘
누군가와 함께 순례를 떠난다면 어디로 향하느냐도 중요하지만, 함께 하는 이의 마음과 성향도 중요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영적인 순례의 길에 오르면서, 자연스레 묻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어떠한 마음으로 이 여정을 함께해주실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경 속 장면은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와 마주한 순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놀라운 선포 앞에서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을 느끼셨음에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십니다. 이 당시 성모님은 어떠한 마음이셨을까요? 진정 이 대답은 그저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열어 보이는 온유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이란 무엇일까요? 온유함은 일반적으로 성격이나 마음씨가 사납거나 급하지 않고, 겸손하며 부드럽고 따뜻함을 뜻합니다. 저에게 떠오르는 온유함의 첫 번째 기억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아주 작은 사건에서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는 늘 엄격하고 철저한 분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의 저는 사소한 실수도 크게 혼날까 늘 조심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과 장난을 치며 방에서 놀다가 연필 깎기 통을 떨어뜨려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습니다. 바닥 장판에는 검은 얼룩이 깊게 배어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곧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실 시간이었고 형과 함께 필사적으로 바닥을 닦았지만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형과 저는 혼날 일만 걱정하며 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잠시 바닥을 바라보시더니 아무 말 없이 화장실에서 무언가를 들고 와서는 조용히 바닥의 얼룩을 말끔히 지워주셨습니다. 그날의 순간은 길지 않았지만 제 마음에는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야단을 맞을까 초조해하던 것과는 달리,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모습에서 참으로 온유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온유함으로 인도하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 여기서 ‘온유함’이라는 표현은 희랍어 πραΰς(práus)로, 단순히 “성격이 부드럽다”라는 뜻을 넘어서는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본래 이 단어는 야생마가 길들여져 가는 과정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야생의 말은 본래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명마라도 야생의 힘이 길들여지지 않으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온유함이란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목적에 맞게 조절되고 길들여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이 길들여져 야생의 본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대로이지만 주인을 신뢰하는 마음 안에서 절제하고 조화로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라고 말씀하실 때의 온유함도 바로 이 의미입니다. 강한 힘을 가졌지만 하느님의 뜻을 위해 절제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이들의 행복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온유함 역시 이러한 의미를 지닙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앞에서 자신의 뜻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온유함을 지니셨습니다. 이 온유함이 있었기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하느님의 위대한 일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온유함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마리아의 모성은 우리를 하느님의 부성적인 친밀함(the paternal tenderness of God)으로 이끄는 가장 가깝고, 가장 직접적이며, 가장 쉬운 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만큼 자녀들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존재는 없습니다. 어머니는 자녀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의 기척을 읽고, 아버지의 자비 안으로 자녀를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성자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연약함을 느끼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에게서 육체의 연약함을 받으셨기에,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이들을 바라보며 연민과 동정심으로 다가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온유함은 성모님의 마음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레지오 단원은 온유함을 실천하는 작은 마리아 돼야
어느 날 아버지께 들은 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당시 가족과 매우 각별하게 지내는 신부님 한 분이 계셨는데, 아버지 말씀으로는 처음에는 그분이 무척 엄하셔서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모동산 주변이 무척 어질러져 있음을 보시고, 아버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며칠 동안 그곳을 정리하고, 낡은 전등을 갈고, 필요한 작업을 꾸준히 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임 신부님께서는 깊이 감동하셨고, 이후로 아버지를 더욱 신뢰하고 자주 의지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성모님께서 아버지를 이끌어 교회 안으로 더 깊이 다가오게 하셨고, 어린 시절 제가 느꼈던 아버지의 온유함이 하느님의 일을 향한 조용한 헌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셨던 것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인간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따뜻한 시선을 성모님에게서 배우셨다고 언급하셨습니다. **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통해 온유함의 본을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온유함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때를 신뢰하며, 당신의 강인함을 하느님께 맡기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간직하는 태도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 또한 언제나 성모님과 함께 걷는 길고 긴 순례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온유한 순례자이셨고, 그 온유함 안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사도직은 따뜻함과 친밀함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머물고자 하는 내적 강인함이 필요합니다. 바로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그 마음 말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을 향한 순례길에 나서는 레지오 단원들이, 이 온유함의 정신을 실천하는 작은 마리아가 되어 세상 속에서 복음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의 샘]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는?
왜 사랑하는가?
12월 31일 밤 10시 성체 앞에 조용히 앉아 지난 한 해를 되돌아봅니다.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말을 했지만 그 생각과 말대로 살아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부끄러운 점은 매일같이 입에서 되뇌었고, 가슴속에서 수백 번 넘게 다짐했던 말을 살아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로 “사랑합시다.”입니다.
누구나 사랑하면서 살아가길 원합니다. 아니 사랑하기보다 사랑받기를 원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더 아파해야 하고, 더 힘들어지는 것이고, 더 나누고 없어지는 것이기에, 더 받고 더 편하고 덜 고통스러운 것을 선택하다 보니 사랑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며 살자.”라고 그렇게 외쳤지만 나의 삶은 “더 사랑받고 싶다.”라는 어리광을 부리며 지난 한 해를 살아왔음을 반성해 봅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각자의 방식대로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기의 꿈과 희망을 누군가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사랑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들이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라면서 “다 너를 위한 거야. 참고 이겨내야지!”라고 꿈을 강요합니다. 아내는 자신이 더 크고 편한 아파트에 살기 위해서 남편의 건강을 챙기고 뒷바라지해주지만 모든 것이 남편을 위한 사랑이라고 자신을 포장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미사에 참석하고, 기도와 성사 생활에 충실하며, 남을 도와주는 일도, 성당에서 봉사하는 것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느님과 교회, 이웃을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과 내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누구를 위해 미사에 참석하고 기도하며 봉사합니까? 무엇 때문에, 왜 지금의 이 삶을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해를 시작하는 지금 다시 한번 묻고 답해 봤으면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처음 만난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것은 설렘이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요! 사랑은 설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설렘은 떨림이며 끌림이고, 긴장감입니다. 설렘은 상대를 더욱 알고 싶게 합니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꿈이 무엇이고 상처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살고 있으며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주위와 환경에 관해서 묻고 알아갑니다. 그런 ‘설렘과 알고 싶음’이 사랑의 첫걸음입니다.
더 많이 알아가기 위해 자주 만나 대화하고 잘 바라보고 잘 들으며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노력합니다. 때로는 그 사람이 되어 생각도 해보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합니다. 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 사람이 가는 삶의 방향과 가치를 공유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그 사람을 알아가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같이 하고, 그 사람과 같은 시선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그 사람의 꿈을 응원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랑은 닮아감으로 살아가지 않을까요!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시선으로, 하나의 가치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첫 단계도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자주 만나러 가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의 좋아함과 싫어함을 잘 알고 계십니까?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하고, 그분의 꿈과 가치가 향하는 곳을 바라보려 하십니까? 그분을 사랑한다면서 우리는 우리의 꿈과 희망, 우리의 욕망과 욕심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매일 같이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라고 하느님과 대화하면서도 언제나 우리의 뜻과 우리의 꿈만 내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언제나 나를 의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인지 의심해야 합니다. 나의 시선과 내가 품고 있는 감정과 생각을 언제나 의심하고 고민하며 행동한다면 우리의 삶이 하느님과 예수님과 닮아가는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가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예수님과 닮아가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고 기뻐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걷는 우리 모든 레지오 단원들이 더욱 사랑하고 더욱 기뻐하고 더욱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11) “모순(矛盾)”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矛盾)’ 투성이 입니다. 우리 마음이 향하는 곳과 현실에서 행하는 우리의 행동은 언제나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순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어쩌면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모든 것이 모순입니다. 두 개의 양극단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죽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하고, 얻으려면 내어놓고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여정은 언제나 갈림길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알면서도 행하고,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길을 걸어갑니다. 또한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주 미약한 한 줄기의 빛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작은 말 한마디에 위로를 느낍니다. 그렇게 모순의 삶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의 여정에서도 그런 모순의 삶과 발견이 이루어집니다. 어쩌면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은 모순이라는 삶을 통해서 새로움을 깨닫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교회의 시작도 ‘죽음이라는 절망 안에서 부활이라는 희망으로’ 나아갑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사도들(사도 1,12-14 참조)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던 이유는 ‘절망’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예수님을 체험했지만, 예수님은 하늘로 떠나가셨습니다(사도 1,6-11 참조). 유다인들은 혈안이 되어 그들을 찾아 죽이려고 합니다.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해야 할지 그들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실행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하신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참조)라는 말씀을 까맣게 잊고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고, 두려움과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절망’을 루카 복음사가는 ‘침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이들에게 내리자 이들은 그 절망에서 용기와 희망을 찾습니다. 완전히 변화되고 새로워져 ‘절망의 침묵’은 ‘희망의 선포’로 바뀝니다. 이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새로운 그리스도 공동체가 탄생하게 됩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 두려움과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사랑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는 용기와 생명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 교회를 이룹니다.
성령께서는 순례하는 교회의 삶 안에 항구히 현존하심으로써 희망의 빛으로 믿는 모든 이를 밝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우리 삶을 지탱하고 활력을 주는 그 희망의 불이 타오르도록 지켜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속이지도 실망시키지도 않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39). 여기에서 우리는, 이 희망이 시련 가운데에서도 꺾이지 않는 이유를 봅니다. 곧, 믿음에 토대를 두고 애덕으로 길러지는 희망은 우리가 삶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3항>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삶,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삶
‘우리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을 매일 체험하며 성령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습니다. 그러면 성령은 일생에 한 번 받고 끝나는 것인가요? 아니면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의 은사를 통해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특별한 시기나 장소에서, 특정한 행위와 전례에 참석해야만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일을 시작하면서 바치는 기도’는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일상적인 일을 시작할 때 언제나 성령을 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면서 언제나 잘 되고 성공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낯섦, 자신에게 닥쳐올 어려움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실패와 좌절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선뜻 행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언제나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해주시기를, 그리고 나의 능력과 더불어 성령께서 보호(보호자 성령, 파라클레토스)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흘려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에서 위로받기도 하고, 지루했던 신부님의 강론에서 삶의 해답을 찾기도 합니다. 드라마의 한 대사에 우리는 눈물 흘리고 같이 아파합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무심히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또다시 걸어갈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몸에 밴 악습과 잊고 있던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매일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시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매일 수 없이 긋는 성호경을 통해서, 때론 습관적으로 참례하는 미사 전례를 통해서, 의무감에서 읽어가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나를 발견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하고, 다시 걷게 하는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성령을 느끼고 바라보고, 그 은총과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모순이 가득한 삶에서 옳은 길을 갈 수 있는 선택도, 반대 방향에서 돌아서는 용기도, 언제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순간임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여정
2025년 5월 8일, 새로 교황직에 선출되신 레오 14세 교황님께서는 로마와 전 세계를 향해 첫 강복을 베푸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폼페이의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우리 곁에 머무르시고, 당신의 전구와 사랑으로 우리를 도우시고자 하십니다.” 폼페이의 성모님에 대한 언급은 5월 8일이 ‘폼페이의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성당’의 초석이 놓인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날을 기념하여, 수많은 신자가 복자 바르톨로 롱고가 세운 이 성당에 모여 장엄한 묵주기도에 참여합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는 사랑의 끈
‘묵주기도의 사도’라 불릴 정도로 성모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을 보여준 복자 바르톨로 롱고는 묵주기도를 통해 많은 이들을 회개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기도문에는 이러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복되신 성모님의 묵주는 저희를 하느님께 묶어 주는 아름다운 사슬이며, 저희를 천사들과 결합시켜 주는 사랑의 끈입니다.”
이 기도는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기억하게 해 주며, 성모님의 손을 붙잡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합니다. 그래서 묵주는 세상의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손에 든 작은 무기이자,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는 생명의 밧줄입니다. 다윗이 무릿매질로 돌 하나를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렸듯, 우리도 묵주라는 영적 무기를 들어 세상이라는 골리앗에 맞서 싸우며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교회 전통 안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어 온 믿음의 열매인 묵주기도
시편을 외울 수 없는 이들은 기도문을 반복하며 기도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시간이 흐르며 오늘날 묵주기도의 형태로 정착되었고, 예수님의 생애를 바라보는 신비 묵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리 기도의 반복은 단순한 암송이 아니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는 훈련이 됩니다. “비파로 주님을 찬송하며, 열 줄 수금으로 그분께 찬미 노래 불러라”(시편 33,2)하신 시편의 노래처럼, 열 번의 성모송은 열 줄의 수금이 되어 우리의 하루를 울려 퍼지게 합니다.
특히 묵주기도의 각 신비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에 더하여,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2002년에 반포하신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를 통해 추가된 ‘빛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공생활을 묵상하도록 이끌며, 그분의 일생 전체를 보다 충만하게 되새기게 합니다.
전례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묵주기도
요일에 따른 신비의 배분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교회의 전례적 삶을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게 하는 지혜입니다. 월요일과 토요일의 ‘환희의 신비’, 화요일과 금요일의 ‘고통의 신비’, 수요일과 주일의 ‘영광의 신비’, 그리고 목요일의 ‘빛의 신비’. 이는 파스카 성삼일의 신비를 삶 안에서 매일 체험할 수 있게 돕습니다. 기도와 전례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호흡을 맞추며 신앙의 심장을 뛰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하고 빛의 길로 초대합니다.
전례가 교회 신앙의 절정을 보여주는 공식적 표현이라면, 묵주기도는 그 전례의 정신을 일상 속에서 살아내는 실천입니다. 신자들은 손에 쥔 묵주를 통해 고요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성모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눈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끌어안게 됩니다.
성모님의 동행 속에서 완성되는 묵주기도
묵주기도는 우리 존재 전체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 여정 속에서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모후이시며, 삶의 모든 순간을 함께 걸어가시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지치고 고단할 때, 묵주를 손에 쥐면 마치 성모님의 따뜻한 손길이 우리 곁에 머무는 듯한 위로를 느낍니다. 그 손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끄는 인도자의 손이며, 상처 입은 우리를 다정히 감싸 안아 주는 자비의 손입니다.
“저희가 그 가르침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묵주기도 마침기도에 담긴 이 간청처럼, 묵주기도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은총의 길입니다. 이 기도는 오늘날 더욱 절실히 요청됩니다. 세상의 소음 속에서 침묵을, 무관심 속에서 사랑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배우게 하며, 우리 삶을 참된 복음의 기쁨으로 이끌어 줍니다. 작은 묵주알 하나하나에는 눈물과 기쁨, 상처와 회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에 품으시어 하느님께 봉헌하십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늘을 향해 드려지는 사랑이 됩니다. 오늘 다시 묵주를 손에 들고 기도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