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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친 물건 / 류영모 목사
I. 본문의 내용
길을 가다 발바닥에 가시 하나가 박혔습니다. 엉덩이가 땅바닥에 풀썩 주저 앉지요. 손이 발목을 붙들고 잘 보이도록 뒤집어 놔 줍니다. 눈은 B29처럼 슝~ 날아가서 가시를 찾습니다. 그러면 한 손이 박힌 가시를 붙들고 쑥 뽑지 요. 그냥 버립니까? 입속에 넣어서 가시를 질근질근 씹습니다. 어느정도 씹 었다 싶으면 목구멍에서 바람이 나와 퉤 뱉습니다. 노는 것은 오른 쪽 발목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발이 싹싹 깔아 뭉개고 지나갑니다. 이걸 이름 하여 유기체라 이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유기체로 보십니다. 가정을 교회를 민족을 국가 를 유기체로 보신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하는 말, 행동, 신앙, 인격 하나 하나가 우리 공 동체 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어떤 결과를 낳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살아 야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공동체 가운데 한 사람의 허물이 얼마나 그 공동체를 아프게 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난공 불락의 성 여리고를 전혀 하나님의 힘에 의하여 기적적으로 점령한 이스라엘의 백성은 아이 성이라고 하는 작은 성을 맞게 됩니 다. 한 이삼천명이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그들은 정예병 삼천 군사로 그 성을 쳐들어 갔다가 36명이 전사하고 혼비백산 쫓겨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옷 을 찢고 땅을 치며 통곡하고 하나님께 이유를 여쭙니다. 이유인즉, 여리고의 첫 성은 하 나님께 바친 성인데 그 성의 바친 물건을 아간이라는 사람이 훔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 다. 그리하여 아간과 그 가족을 돌로 쳐 죽였다는 잔인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II. 문제제기
① : 의혹
이 사건엔 몇 가지 의혹이 있습니다.
첫째, 이 사건에 아간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게 아간이 범죄했다 그렇게 기록하지 아니하고 그 족보를 들먹이고 있습니다. 조상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하며 그 집안에 아간이 이토록 무서운 죄를 지었다 성경은 그렇게 펼쳐가고 있습니다.
우선 아간은 유다지파 사람입니다. 우리개념으로 말하면 미국의 케네디가나 신라의 박씨 가문 정도를 말합니다. 명문집안이지요. 그 가문 중에서도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 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입니다. 증조부 세라는 "새싹"이라는 뜻을 가지고 가문을 일으킨 사람이요 조부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을 가진 삽디입니다. 가문을 꽃피운 사람입니다. 아버지 갈미는 "풍성한 수확"이라는 뜻으로 가문의 영화를 누리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 족보 유다 자손에서 다윗 왕가가 생성되어지고 바로 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에 태어나는 명문집안 가운데 명문 가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명문 집안에 싹 이나고 입이 피고 풍성한 열매가 달렸으니 이제 아간은 본전치기만 하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간대에 이르러 그 존귀 영광은 고사하고 후손의 이름마져 끊어져 버리는 사고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아간이라는 이름의 뜻이 "사고뭉치, 사 고덩어리"라는 뜻입니다.
대게 사람들은 본문을 읽을 때 나는 여호수아와 동일시하는 할 수 있는 사람이지, 나 와 아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성경을 읽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노 만 고트발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 내가 아간입 니다. 내가 사고 덩어리요 사고 뭉치입니다" 고백할 때에 침묵하던 성경은 내게 말씀하 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 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히4:12)" 오늘 이 시대의 비극이 여기 에 있습니다.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아간이라고 나서는 사람 이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제기② :
실패해서는 안될 상황
이 상황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실패해서는 안 될 상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명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여호수아라는 말만 들어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간장이 녹아내렸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 성들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사십년 광야생활이 끝났습니다.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가 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멋지게 무너뜨렸습니다. 이제는 용기도 생겼고 제법 담력이 생 겼습니다. 당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 하나로 말미암아 상황은 역전되고 맙니다. 심리적으로 주눅이 들었던 가나안 원주민들이 담력을 얻었고 반면 사기충천해야될 이스 라엘 백성들은 간담이 녹아 내립니다. 자칫 가나안을 점령하기는 커녕 가나안 주민들 앞에서 멀쩡하게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천지에 충만하던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 어졌습니다. 아이 성 전투의 실패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이름이 먹칠을 당합 니다.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당하시면서 까지 이스라엘을 실패시켜야 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1> 우선 이스라엘의 죄악과 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너진 여리고 성에 비 하면 아이 성은 작은 성이었지요. 아이 성을 탐지한 정탐꾼들은 여호수아에게 이삼천명 이면 능히 정복할 수 있는 조그마한 성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제법 우쭐댈 수 있었 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다는 것을 전제에서 나온 것이 었습니다. '보라! 우리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민족이 아니냐. 우리 군대를 보라 이땅에 가장 강한 성인 여리고성을 손쉽게 정복한 우리 군대가 아니더냐.'
그런데 이스라엘 군사들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고는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뀌씩 돈 이유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소리를 지르라 그래서 크게 함성을 지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지요. 그러나 저들의 마음속에는 내심 자기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했다고 지금 믿고 있었습니다.
혹시 이 시간 여러분 가운데 기적적인 승리의 순간에 자만에 빠져 있는 분들은 없습니 까?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 넘어질까 조심하라. 승리의 순간처럼 위험한 때도 없습니다. 대군을 무찌르고 돌아오던 장군이 풀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코가 깨지는 경우는 종종 있 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대산맥을 넘었다고 자유하는 분들! 긴장하고 앞을 바라보아 야 할 때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커다란 고난에 부딪힙니다. 내 힘으로는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하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힐 때가 있지요. 그때 낮아집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의지합니다. 전폭적인 그분의 도 움과 그분의 능력과 권능으로 그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어집니다. 그 순간 무섭게 내 가 슴속에 사탄이 찾아옵니다. "너는 엄청난 일을 해냈다" 사탄의 유혹이지요.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도움을 요청 한 것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승리의 순간에 기 도했어야 했습니다.
<2> 문제는 7장 20절 이하에 보면 아간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듯한 모습이 나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물어보고 싶습니다.
"하나님, 이처럼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한 아간을 왜 처벌하셨습니까? 아니 글 쎄 벌을 내리더라도 훈계나 몽둥이 몇대 정도라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데 오늘날까지 괴로움의 골짜기 - 아골 골짜기라고 불릴만큼 잔인하게 태워죽이고 돌로 쳐 죽였다니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그토록 용서와 사랑과 융통성이 없으신 분이었단 말입니까? 제가 믿는 하나님은 적어도 그런 분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처 벌은 단순히 감정적이고 맹목적이지 않습니까?"
이때 하나님께서 성경 본문 12절을 통하여 그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멸망하기로 되 어있는 것에 관심을 가진 자는 멸망하게끔 되어있느니라. 이미 속물이 되어 버린 그 인 간들을 멸하지 아니하면 내 소중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속물로 전락할 수 있느니라" 아 간의 고백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어요. 그는 제비에 뽑힌 당첨자로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수사결과 완전히 범인으로 단정되자 또 그것도 여호수아의 권면에 못이겨 할 수 없이 고백하게 된 형식적인 회개였어. 마치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은 삼십냥을 피 밭에 던져버리고 자살하는 엉터리 회개와도 같은 것이었다네. 회개란 마음 아파하는 "회"와 돌아서는 "개"가 합쳐져야 하는 건데 그는 아파하는 회도 아니었고 돌아서는 개 도 아니었어.
그렇습니다. 흔히 우리는 양심의 가책 정도를 가지고 회개했다고 자위 할 때가 많습 니다. 가롯유다 이상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목매달아 죽을 결심을 한 사람 아니었습니까?
<3> 또한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
또한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은 우리 인간들처럼 맹목적이고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 을 성경은 우리에게 명백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앞장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6장 18절에 "너희는 깊이 명심해라. 없애 버리게 되 어있는 것을 무엇이든지 탐내지 마라. 하나님께 바쳐진 그것들을 너희들이 가질 때에는 너희 민족전체가 진멸당할 위험에 처할 것" 이라고 미리 경고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이 성 싸움에서 36명의 군사가 전사하는 진노가 임했는데도 계속 하나 님을 속이며 침묵을 지키고 끝까지 속여 보려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전염병 같은 죄악을 가만히 두었다가는 염병처럼 온 이스라엘에 번져가겠기에 자신의 명예와 이 름이 원수 앞에서 먹칠 당하면서 까지도 자기 백성의 범죄한 사실에 간섭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옛날 시골길을 버스타고 지나가다 보면 산등성이마다 그렇게 써 있었습니다.
"숨은 간첩 잡아내고 자주 간첩 도와 주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세상에서는 덮을 수 있었고 감출 수 있었고 속일 수 있 었기 때문에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동자 앞에서도 속일 수 있고 덮을 수 있고 감출 수 있 다고 생각하고 숨겨두면 그 죄가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나를 괴롭힙니다. 공동체를 파멸로 몰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거운 짐, 마음의 번민과 갈기갈기 찢겨진 아 픔들, 영혼의 상처와 허물들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주께서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온갖 허물들을 용서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짐승들이 장난을 하거나 싸움을 하다가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그 상처를 가슴에 끌어안고 굴속에 숨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햇볕으로 나와서 햇볕에 자기 상처를 드러 내면 치료하는 광선의 효과가 있어서 상처가 아물어 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 어리석은 인간은 자신의 상처를 끌어안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웅 크리고 주저앉아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해결의 길도 없습니다. 만왕의 왕되시고 날 위해 피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 의의 태양이신 그분 앞에 나아와 내 상처를 무거운 짐을 아픔을 허울을 드러낼 때에 주께서 이 시간에도 흘리신 보혈의 은총으로 능력있는 보혈의 은총으로 이 시간 우리를 정결케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천국은 의인이 가는 곳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이 가는 곳이요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 아니라 회개치 못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III. 여호수아의 기도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아슬아슬한 스릴과 박진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서 이런 범죄를 하게 되면 이스라엘 전체가 진멸당하게 될 것이라고 몇번이고 경고를 했 음에도 불구하고 "아간" 한 가족의 멸망으로 이스라엘이 건짐을 받았다고 하는 것, 여호 수아의 담대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는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7장 9절에 보면 "가나안 사람과 이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나 지도자 여호수아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습니다가 아니올시다. ]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패배로 하나님의 명예가 손상되 었다는 것을 더욱 중대하게 여기고 안타까와 했습니다. 나의 패배와 우리 신앙공동체의 패배는 곧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게 됩니다.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나이까?"
바로 여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관점이 있습니다. 돌을 던지 는 대신 가슴을 찢고 핏대를 올리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질을 하는 대신에 무릎을 꿇는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기도의 영웅 아니였습니까? 날이 어두워지면 우리 공동체가 패망할지도 모릅니다. 감히 하
나님을 향하여 태양이 머물도록 달이 머물도록 기도한 기도의 영웅이 아니었습니까?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수10:12)
위대한 영웅의 기도올시다. 이는 한 민족을 지도하는 지도자로서 하나 님 앞에선 담대한 인격자의 자세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응답이 들려옵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엎드렸느냐?" 다시 도전하라. 제2차 3차 공격을 다시 시도하라 내가 너와 함 께 할 것이니라.
실패의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있지 말고 일어나라. 양심의 가책이란 의자에 웅크리 고 앉아 있지 말고 돌아서라. 네가 어찌하여 웅크렸느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승리의 행진을 이 시간 시작하라.
IV. 바친 물건
이제 마지막 한가지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께 물어봅시다. "하나님, 하 나님은 한 생명이 온천하보다도 귀중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외투 한벌, 금덩이 한 두개, 이것을 이토록 거창하게 다루어야 했더란 말입니까? 이것 때문에 사람을 죽여 야했고 아간의 가족을 멸망시켜야 옳았더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7장에 "바친 물건"이라고 하는 말이 무려 8번씩 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간이 훔친 사건은 단순한 도적 행위가 아니야. 하나님께 바친 것 - 하나님이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인간이 사용하고자 했던 하나님 모독죄요 하나님께 도전장을 낸 무서운 것이 었다네." 신앙인의 삶은 언제 나 종말론적입니다. 심판론적입니다. 바쳐진 생애란 위험도 따르고 축복도 따르는 게지 요.
내심 아간은 "태워 없애는 물건, 내가 가져다가 유용하게 쓰면되는게 아닌가?" 생각했 을 겝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것들은 여호와께 구별된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곡간에 들이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금과 은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치장하는데 사용되었던 것들이었습니 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의 씨까지 멸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동과 철은 대게 가 나안의 군사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활과 창과 칼에 있지 아니하 고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성별된 후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골리앗의 힘은 활과 찰과 단창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뭐라고 지 금 얘기하고 있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오지만 나는 네가 저주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간다."
전쟁은 너와 내 손에 달린게 아니야. 전쟁 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너는 칼을 믿고 활을 믿고 창을 믿을지 모르지만 나는 전능하 신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느니라. 할렐루야!
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십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살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의 생명은 하나님께 바쳐진 생명 아니었습니까?
건강하던 사람도 젊은 사 람도 아침에 문을 열고 밝게 나갔던 사람도 주님이 부르면 오늘이라도 주님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여러분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이 가진 재능은 여러분이 만들어낸 것이었습니까?
여러분을 위해서 꾸어다 쓰는 것이었습니까?
여러분이 돈주고 산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 바친 것을 내 마음대로 써 보겠다고 장롱 밑에 감추어 두지 마십시오. 온전 히 주께 맡기고 성별 받은 다음에야 주의 뜻을 따라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처지에 아들을 하나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만 만해졌습니다. 이 나이에 내가 자식을 가졌어. 내 건강을 보라 세상 사람들아. 그래서 내 자식인줄 알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식만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날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들을 내게 바치라. 내가 너 에게 준 것인데 그 아들이 네 것인줄 알았느냐. 그 아들이 너무 크게 보여서 그 아들에 가려서 내가 보이지 않는구나. 그 아들을 바쳐라"
"그랬군요.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내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치라 하면 바쳐야지요"
즉시 결단하고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장작더미 쌓아놓고 불을 준비하고 자식을 묶어 그 위에 얹어 놓습니다. 시퍼런 칼을 뽑아들고 그 아들을 향하여 내리 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 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아! 그 자식에게 손을 대지 말라.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노라. 자식까지 남김없이 내게 바쳤으니 이 자식을 통하여 하늘의 뭇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내 자손들을 축복하리라."
어린아이 하나가 굶주린 베세다 들녁에 오천 청중들을 향하여 도시락을 내어놓았습니 다. 제가 먹었으면 혼자 먹기에도 모자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맡겨졌을 때에 오천명이 먹고 열두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제자들 열두명이 광주리 하나씩 들고 거 두었으니까 열두 광주리지, 한 오십명이 저마다 한 광주리씩 아마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 을 겝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보리떡을 주님 앞에 바쳤을 때 이것을 쫀득쫀득한 찰떡으로 바꾸어서 청중들에게 나누어주지 아니하고 보리떡 그대로 쓰임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옵싸리온 물고기라고 하는 것은 집에가서 구워먹기에는 너무나도 작고 살려주자니 아까운 것 던져 놓으면 고아들이나 과부들이 주워다가 먹는게 옵싸리온입니 다. 보잘 것 없는 물고기 한 마리, 주님 손에 들렸을 때 이것을 커다란 연어나 커다란 상어로 바꾸어서 청중들에게 먹여주지 아니하시고 물고기 그대로 쓰임받기를 원하고 계 셨던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바쳐진 생애의 행복이 있습니다. 이땅은 언제나 갈증이 있고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은 언제나 풍성하십니다.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 쳐진 생애는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께 바쳐진 생애는 여리고의 금은 보석처럼 아무렇게나 쓰임받지 않는 행복이 있습니다. 오직 주님 만을 위해 쓰임받고 크게 귀하게 쓰이는 행복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바쳐진 생애는 절대로 다른 길, 헛된 길, 세상 길로 갈 수 없는 행복이 있 습니다.
일찍이 일본의 훌륭한 신앙인 우쭈무라 간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 실 때에는 질병과 실패와 고통으로 저주하지 아니하신다. 이 세상에서 악의 도구로 쓰임받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 죄를 짓고 죄를 쌓아감에 도 불구하고 그대로 죄짓도록 내버려 둔다. 지옥을 향하여 줄달음쳐 달려감에 도 불구하고 그 발을 붙들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인생들이 저주받은 인생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바쳐진 생애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은혜 받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죄 짓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무의미하게 살 수가 없습 니다. 땅에 속물들처럼 썩을 것을 위해서만은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길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바쳐진 생애의 행복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산나 여사는 당신의 자녀들을 소중하게 믿음으로 양육했던 훌륭한 어머니 였습니다. 그의 많은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소중하게 쓰임받기를 원하여 얼마 나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자식들을 양육했는지 모릅니다. 어느날 이 집에 불이 나게 됩니다. 미친 듯이 불을 끄고 있는데 방안에 어린 아들이 있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달려들어가서 아이를 살려냈습니다. 그러나 어 린아이를 끄집어 낼 때 이미 아이의 옷깃에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 자식들이 소중히 하나님 앞에 쓰 임받기를 얼마나 원하며 기도했습니까? 이 자식 하나님 앞에 쓰임받기를 원 했는데 이제 타다남은 숯덩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타다남은 숯덩이 같은 이 자식도 하나님이 받아 쓰시겠습니까? 이왕 쓰실려면 성령의 큰 불로 사용하 여 주시옵소서. 이 아들이 자라가며 나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몸이라고 그럽 니다. 어머니가 하나님 앞에 나를 바쳤데요. 성결하고 거룩하게 경외함으로 자신의 인생을 가꾸며 살았습니다. 그가 바로 타다남은 숯검뎅이라고 자처하 고 살았던 "요한 웨슬레" 였습니다. 영국이 무서운 영적인 침체의 늪에서 허 우적거리고 있을 때 영국의 커다란 성령의 불을 일으킨 사람, 감리교의 창설자 요한 웨슬레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아무리 생각해도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우리 자신이 바 쳐진 물건임을 거룩하게 선언하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순결하고 깨끗하게 우리 자신을 내어 놓을 때에 이 공동체를 주님 앞에 드릴 때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름답게 쓰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