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기정론(理氣定論)」
「이기변증(理氣辨證)」
「성리설의록(性理說疑錄)」
「변론이기설(辨論理氣說)」
등 성리학 논문이 대량으로 들어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구는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이기호발론: 리와 기가 서로 발한다는 설명)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율곡 이이와 여헌 장현광의 이기론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초기 학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됩니다. 관련 연구에서도 이구와 유원지를 17세기 퇴계학파가 이이·장현광을 본격적으로 비판한 선구적 인물로 평가합니다. (KCI)
친구야께서 전에 제기하셨던 질문,
“이구의 이이 비판에는 서인에 대한 정치적 반감도 있었던 것 아닐까?”
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다만 현재 자료로 볼 때 직접적인 제1원인은 정치적 반서인 감정보다는 퇴계학설을 지켜야 한다는 학문적 문제의식이었다고 보는 편이 근거가 강합니다. 당시 퇴계학파와 영남 남인의 정치적 정체성이 서로 겹쳐가는 시대였으므로 정치 환경이 전혀 무관했다고 할 수도 없지만, “서인이 싫어서 율곡을 비판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은 학문과 정치가 상호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KCI)
역사학자로서의 이구
여기가 특히 재미있습니다.
『활재집』 권5·6의 「간사잉어(看史剩語·간사잉어: 볼 간, 역사 사, 남을 잉, 말씀 어 → 역사를 읽고 남긴 말)」에는 중국 역사 속 인물과 사건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습니다. (MK학종합DB)
즉 이구는
성리학자이면서 역사평론가
였습니다.
그는 역사를 단순히 사건 순서로 읽지 않고
“누가 옳았는가?
누가 의리를 지켰는가?
국가가 무너질 때 지식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읽었습니다.
그래서 활재 이구는 문경에서 ‘역사를 통해 현실을 비판한 유학자’라는 관점으로 다시 연구할 가치가 큽니다.
6. 목재 홍여하 ― 문경이 낳은 유학자이자 역사가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 1620~1674)
홍여하는 문경 출신 여부가 비교적 분명합니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안동부 성동리, 현재의 문경시 영순면 율리 일대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부계이고 아버지는 대사간 홍호입니다. (위키백과)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학맥(學脈·학맥: 배울 학, 맥 맥 → 학문이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습니다.
홍여하의 학문 계보
대체로
퇴계 이황
↓
서애 류성룡
↓
우복 정경세
↓
홍호
↓
홍여하
의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홍여하의 아버지 홍호가 정경세의 제자였고, 정경세는 류성룡을 통해 퇴계학통을 이어받은 학자였습니다. (교보문고)
정치생활
1654년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정언·경성판관 등을 역임했으나 정치적 발언 때문에 좌천과 유배를 겪었습니다.
특히 이후원 문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당시 정국의 핵심 인물이던 송시열과 충돌하였고 황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1674년 제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한 뒤 다시 병조좌랑·사간으로 등용되었으나 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여하는 분명하게 영남 남인(嶺南南人·영남 남인: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남인 정치·학문 세력) 계열의 인물로 평가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홍여하의 진짜 매력은 역사다
그는 『휘찬여사(彙纂麗史·휘찬여사: 모을 휘, 엮을 찬, 고려 려, 역사 사 → 고려의 역사를 모아 엮은 책)』를 썼습니다.
또 『동사제강(東史提綱·동사제강: 동방의 역사를 큰 줄기로 정리한 책)』 등을 편찬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즉 홍여하에게서는
유학자 ↔ 역사가
성리학 ↔ 한국사
경전 ↔ 역사
가 만납니다.
그가 우리 역사를 정리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경의 역사교육과 연결하기에 특히 좋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7. 청대 권상일 ― 현재 문경 산북에서 태어난 퇴계학파의 거목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 1679~1759)
권상일의 출생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청대일기』 해제가 정확히 밝혀줍니다.
조선시대 경상도 상주 근암리에서 출생했는데, 그곳은 현재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입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따라서 권상일은 오늘날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하면 분명한 문경 출신 유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학으로 퇴계학을 배웠다
특이하게도 권상일은 특정 유명 학자의 문하에 들어가 장기간 수업한 것이 아니라 가학(家學·가학: 집 가, 배울 학 → 집안 대대로 이어온 학문)을 통해 공부했습니다.
6대조 권대기와 5대조 권우가 이황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권상일 자신은 조부에게 학문을 배우며 퇴계학을 계승했습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따라서 학맥은
이황 → 안동권씨 가문의 퇴계학 전통 → 권상일
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관료 권상일
171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갔습니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만경현령으로 있으면서 난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여 보고하고 진압에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울산부사·대사간·홍문관부제학·대사헌 등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또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퇴계언행록: 퇴계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을 교열·간행했습니다. 이것은 권상일의 학문적 정체성을 잘 보여줍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권상일은 남인이었는가?
네. 이 점은 연구가 비교적 분명합니다.
권상일은 퇴계학파의 정통 의식과 남인이라는 정치적 당파의식을 강하게 가진 18세기 전반 영남 관료학자로 평가됩니다. 다만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일부 남인과 달리 그는 오히려 난을 진압했습니다. (KCI)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인 = 이인좌의 난 세력
이라고 단순화하면 안 된다는 좋은 사례입니다.
『청대일기』
권상일은 24세부터 81세까지 약 58년에 걸쳐 일기를 썼습니다. 『청대일기(淸臺日記·청대일기: 청대 권상일이 쓴 일상 기록)』는 그의 관직 생활뿐 아니라 당시 상주·문경권의 향촌사회와 과거시험, 학문, 정치 상황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하나 나옵니다.
권상일은 1710년 일기에서 활재 이구의 『간사잉어』를 읽고 그의 역사평론과 의리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빛마당 산책)
따라서 문경 유학사에서는
이구 → 권상일
을 단순한 서원 배향 관계만이 아니라 책을 읽고 영향을 받은 지적 연결로도 볼 수 있습니다.
8. 근품재 채헌 ― 권상일의 학문을 금천과 석문구곡으로 옮긴 사람근품재 채헌(近品齋 蔡瀗, 1715~1795)
본관은 인천, 자는 계징(季澄), 호는 근품재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역대인물 자료에 따르면 어려서는 만송 홍상조에게 배우고 성장한 뒤 청대 권상일에게 공부했습니다. (AKS People)
지역 자료에서는 현재 문경시 산양면 현리 출생으로 소개합니다. (문경매일신문)
1753년 생원시(生員試·생원시: 유학 경전에 대한 능력을 시험하던 소과)에 합격했으나 이후 대과를 통한 중앙관직 진출에는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수직(壽職·수직: 오래 산 노인에게 명예로 내려 주던 벼슬)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습니다. (Krpia)
권상일 → 채헌
이 관계가 중요합니다.
청대 권상일
↓
근품재 채헌
으로 문경 산북·산양지역의 학문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채헌은 스승의 학문을 단순히 책 속에만 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산과 물과 정자와 시가 속에 옮겼습니다.
석문정과 석문구곡
1787년 현재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에 석문정(石門亭·석문정: 돌 석, 문 문, 정자 정 → 돌문과 같은 산세에 세운 정자)을 세웠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리고 금천과 대하천을 따라 석문구곡(石門九曲·석문구곡: 돌문 석문, 아홉 구, 굽이 곡 → 석문 주변의 아홉 물굽이)을 경영했습니다.
문경시도 석문구곡을 조선시대 문경 유학자 채헌이 경영하던 구곡으로 소개합니다. (국가브랜드종합정보센터)
시인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채헌은 친구야께서 특히 관심을 가져볼 만합니다.
그는 한시만 쓴 것이 아니라 한글 가사와 시조도 남겼습니다.
석문정에서 친족·제자·인근 문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래하는 석문정시가단(石門亭詩歌壇·석문정시가단: 석문정에서 이루어진 시와 노래의 모임)이 형성되었습니다.
채헌의 가사 2편과 시조 8수 등이 확인되고, 1787년부터 1803년까지 약 16년간의 활동은 『석문정일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따라서 채헌에게서는
성리학 ↔ 자연
유학 ↔ 시
한문 ↔ 한글
개인수양 ↔ 지역공동체
가 만나고 있습니다.
9. 이 일곱 사람의 학맥을 한눈에 보면
친구야, 이것을 계보도로 잡으면 훨씬 쉬워집니다.
① 조선 전기 사림의 흐름
김종직
↓
홍귀달
↓
홍언충
여기서는 핵심 단어가 사림·간쟁·절의·문장입니다. 홍귀달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기록되고, 홍언충은 그 가문의 학문과 정치적 시련을 계승합니다. (디지털 인문학 센터)
② 퇴계학의 흐름
이황
↓
류성룡
↓
정경세
↓
홍호
↓
홍여하
여기서는 퇴계학 → 영남 남인 → 역사학으로 발전합니다. (교보문고)
③ 문경 근암지역의 퇴계학
이황
↓
안동권씨 가학
↓
권상일
↓
채헌
여기에서는 성리학이 나중에는 금천·구곡·정자·시조·가사라는 지역문화로 확장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④ 별도의 강력한 지적 축
퇴계 이황의 학설
↓ 사숙(私淑·사숙: 직접 배우지는 않았으나 존경하고 그 학문을 본받음)
활재 이구
↓ 저술을 읽고 평가
권상일
이라는 흐름도 존재합니다. 권상일이 이구의 『간사잉어』를 직접 읽고 평가한 사실 때문에 두 인물의 연결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빛마당 산책)
10. 그러면 근암서원 칠현은 누구인가?
문경 유림의 관심사를 이해하려면 이것을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근암서원(近巖書院·근암서원: 가까울 근, 바위 암, 글 서, 집 원 → 근암 지역에 세운 교육·제향 공간)의 칠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홍언충
② 이덕형
③ 김홍민
④ 홍여하
⑤ 이구
⑥ 이만부
⑦ 권상일
1665년 홍언충·이덕형을 처음 배향하고, 1693년 김홍민·홍여하를 추가했으며, 1786년 이구·이만부·권상일을 추가 배향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근암서원 칠현 = 문경 출신 일곱 사람
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근암서원 칠현은 오히려
“문경의 유림이 누구를 자신들의 학문적 모범으로 선택했는가”
를 보여주는 명단입니다.
따라서 출생지 명단과 배향 인물 명단을 구별해야 역사적으로 정확합니다.
11. 저는 문경 유학사를 여섯 개의 주제로 묶어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보면 각 인물이 살아 움직입니다.
홍귀달·홍언충 = 절의의 유학
권력 앞에서 선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상안 = 실천의 유학
전쟁이 나면 선비는 무엇을 해야 하며, 평화로운 때에는 백성의 농사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활재 이구 = 논쟁하는 유학
스승의 학설이라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검증하고, 역사에서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가.
홍여하 = 역사를 공부하는 유학
왜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하는가.
권상일 = 공부하고 정치하는 유학
성리학적 수양과 현실 정치·목민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채헌 =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유학
학문을 산천·정자·시·노래와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12. 이들을 시대 순서로 세우면 문경 유학사의 변화가 보입니다
15세기 홍귀달·홍언충
→ 사림이 중앙 정치에 진출하고 사화를 겪던 시대
→ 문장과 절의
↓
16~17세기 고상안
→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 의병과 농업·실천
↓
17세기 이구·홍여하
→ 병자호란·예송·붕당정치의 시대
→ 성리학 논쟁과 역사인식
↓
18세기 권상일
→ 영남 남인이 중앙 정치에서 어려움을 겪던 시대
→ 퇴계학의 계승과 현실 정치
↓
18세기 후반 채헌
→ 중앙정치보다 향촌사회와 자연·문학으로 활동 영역 확대
→ 구곡·정자·시조·향촌문화
이렇게 보면 문경 유학은 정지해 있지 않았습니다.
절의 → 실천 → 철학논쟁 → 역사인식 → 목민 → 자연과 문학
으로 넓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특히 주목하는 세 사람
친구야, 문경의 유학을 전국에 소개한다는 관점이라면 저는 특히 활재 이구·목재 홍여하·청대 권상일 세 사람을 깊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구는 철학과 역사비평, 홍여하는 성리학과 한국사 서술, 권상일은 퇴계학·정치·향촌생활을 아우르는 방대한 일기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채헌을 붙이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이구 — 역사를 논하다.
홍여하 — 역사를 쓰다.
권상일 — 시대를 기록하다.
채헌 — 자연과 삶을 노래하다.
이 네 사람만 가지고도 ‘문경 선비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았는가’라는 하나의 연구주제가 성립할 정도입니다.
요점 정리
문경 유학사를 정확하게 공부하려면 ‘문경 출생’·‘현재 문경지역 출생’·‘문경 유림이 배향한 인물’을 구별해야 합니다. 권상일은 조선시대에는 ‘상주 근암리 출신’이지만 그곳이 현재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이므로 오늘날 기준으로 분명한 문경 출신이고, 홍여하 역시 현재 문경 영순지역 출신입니다. 채헌도 문경 산양·산북권의 대표적 향촌 유학자입니다. 반면 고상안은 용궁 출생이며, 이구는 출생지 자료가 엇갈리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전체 흐름은 홍귀달·홍언충의 절의 → 고상안의 실천 → 이구의 성리학과 역사비평 → 홍여하의 성리학과 역사서술 → 권상일의 퇴계학과 목민 → 채헌의 구곡·시가·향촌문화로 잡으면 가장 선명합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홍여하–이구–권상일–채헌을 한 묶음으로 연구하면, 17~18세기 문경 유학이 ‘성리학 → 역사 → 정치 → 자연과 문학’으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상당히 흥미롭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