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40] 김관해 (金官楷) - 여생도 최선을 다하리라 4. 뜻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 1 1 원주 원동산 5번지(原州 園洞山 五番地)는 입교 후 거의 10년간 보낸 교회이다. 허술한 초가교회가 왜 그렇게 매력적이었던가. 꿈같은 일이다.
2 가장 젊었던 인생의 황금 시기를 원리 강의, 설교, 기도, 가정 방문 전도, 승공 강의를 하며 보냈다. 먹을 것이나 돈이 없어도 황홀경에 취해 살았다. 이때 잊을 수 없는 분은 최정순(崔貞順) 선생(원주교회 창설자)이다. 3 강원도 초창기를 장식한 원주교회는 이 어른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진리 때문에 원주여상고에서 퇴직까지 했고, 온갖 조소와 비난을 참아가며 주님을 모시는 일편단심의 신앙심은 나로 하여금 신앙생활에 큰 귀감이 되었고 교훈을 주었던 것이다. 4 이제 뜻을 위한 본격적인 공적인 활동은 원주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유경규(柳景圭) 전도사가 서울로 떠나게 되었고, 최정순(崔貞順) 선생도 적십자사 일로 춘천으로 떠난 후부터 내가 원주교회를 맡아 인도하게 되었다. 5 1959년 제1회 협회 40일 전도사 수련회가 서울 본부교회에서 열렸다. 이 수련회에 참석하는 영광을 갖게 되어 점차 신앙의 깊음과 원리 무장을 튼튼하게 갖추게 되었다.
6 또한 교회를 책임지는 교역자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초창기 원주교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교회를 맡은 교역자로서 10년간의 오랜 시무는 우리 교회 초창기 역사에 극히 드문 일이며 많은 이동을 하고 있을 때였기에 더욱 잊을 수가 없다. 결국 많은 도를 닦은 기간이라 할 수 있겠다.
7 원주는 나의 제2의 고향이라는 점에서 더욱 잊지 못한다. 8.15 해방 후 이사를 와서 30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이다. 길에 나가 만나는 동창들 그리고 친척과 친지들의 몰이해와 많은 시험을 극복했다.
8 지금도 원주에서 뜻을 위해 10년을 어떻게 지났던가, 어떤 저력이 있어 인고를 극복했던가 생각해 본다. 친지들이 분명히 미친놈이라고 비웃었고 천하에 바보 같은 놈이라고 했음을 알고 있다. 먹을 것이 없고 돈이 없어도 기뻤다.
9 초창기 식구들의 뜨거운 사랑의 총화는 이 세상 권세, 물질, 명성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진리가 있을지니 그 진리가 너희에게 자유함을 주리라는 말씀과 같이 진리에 취해 살았다.
10 굶고 냉기 찬 방에 담요 하나 덮고도 어느 나라 임금이 부럽지 않게 순수한 진리 속에 살던 시대였다. 어떤 어려움도 참으며 ‘육천 년간 맺힌 하나님의 한을 풀어드리겠나이다.’, ‘원주 고을을 복귀하여 영광을 돌리겠나이다.’, 이런 기도가 거의 생활의 전부였다.
11 선생님께서 원주 교회를 거의 9차례나 방문하신 일이며 때로는 한 방에서 합숙까지 하는 때도 있었다. 20대~30대의 인생의 황금시기를 보내며 쓴맛 단맛 다 느끼고 살던 원주교회의 교역자 생활을 어찌 지면에 다 옮기겠는가.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몇 개만을 추려 정리해 보려고 한다.
12 첫째, 진실로 인생을 위해 기도해 본 일이다. 인생을 진실로 사랑하라, 인생을 사랑한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한 자라고 믿었다. 이 시절에 인간을 위해 울었고 인간을 위해 사랑의 실천을 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