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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학기행- 시인 허영자와 함양
꼿꼿하고 단아한 칠순 시인… 한그루 幼木으로 고향 뜰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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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자 시인이 고향인 경남 함양의 '일두' 정여창 고택 대청마루에 앉아 자신의 시와 삶에 대한 명상에 잠겨있다.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대표자로 손꼽히는 정여창 선생은 허 시인 외가의 윗대 큰 어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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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고향은 나무의 뿌리같은 거지요. 뿌리가 없으면 나무는 죽잖아요. 고향은 그와 같다고 생각해요. 오늘 마침 국제신문 문학기행 일행과 함께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에 다녀왔어요.일두 선생의 집안은 제 외가 쪽의 종가이지요. 어릴 때 외가에 갈 때 마다 '일두 자손, 일두 자손' 하는 말을 참 많이 들었어요. 집안의 긍지 같은 것이었지요. 제가 쓴 시를 한편 낭송해 볼게요. '일두 선생 고택에서'라는 시입니다."
지난 15일 저녁 제2회 지리산문학제가 함양 읍내에서 한창 열리고 있었다. 이 행사를 주관한 지리산문학회는 함양 문인들이 1979년 창립해 소박하되 쟁쟁하게 키워놓은 모임이다. 지리산문학회는 두번째로 개최하는 이 행사의 중요한 손님으로 바로 이 고장 함양에서 태어난 허영자 시인을 초청해 강연을 부탁한 차였다.
그 뜨락에 서면
잔잔한 햇빛과 바람
선생의 고결한 정신인양
옛 숨결 그대로 고여있네
맑음이 죄가 되고
옳음이 시기를 불러오던
탁류와 같은 세월 속에서도
마냥 꼿꼿하던 선비의 기상
소슬한 한 채 고택에 깃들어 있네
<일두 선생 고택에서>부분
허영자 시인은 '일두 선생 고택에서'를 낭송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문학이란 뭘까요. 제게 문학은 그 사람의 인격이고 인품입니다. 또는 쓰는 사람의 인격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무엇이죠." 1938년 생인 시인의 나이는 올해로 칠십. 그는 시와 사람됨을 하나로 보고 있었다. 자신의 호를 '좀벌레 하나'라는 뜻의 일두로 쓴 외가의 큰 어른 정여창 선생의 겸허한 문학정신은 올해 92세로 시인에게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인 어머니를 통해 허영자 시인에게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마운 고향
이번 문학기행은 꽉 찬 일정으로 진행됐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허영자 시인은 낮에는 문학기행 일행과 함께 함양 일원을 돌아보고, 저녁에는 지리산문학제에서 강연을 했다. 문학기행의 일행은 두 행사에 모두 참가했다.
참가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칠순의 허영자 시인이 하루 종일 이어지는 일정 속에서도 꼿꼿함과 단아함을 한시도 잃지 않았던 점인데, 고향 함양에 대한 감회가 그만큼 남달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알 수 있었다.
함양 휴천면의 휴천초등학교에 들어섰을 때였다. 시인의 깊은 눈이 더 깊어졌다. "아버지는 휴천초등학교의 교사이셨습니다. 저는 바로 이 휴천초등학교 한쪽의 교사용 사택에서 태어났습니다. 저 자리쯤 되겠죠. 내가 두살이 채 못되었을 때 이곳을 떠났기 때문에 뚜렷한 기억은 없어요. 그래도 부모님께 들었던 이야기는 추억으로 남아 있어요. 하루는 아버지가 수업을 하고 계셨는데 어린 내가 어떻게 왔는지 교실 창밖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방긋방긋 웃고 있더래요. 아버지는 할 수 없이 교실에 저를 앉혀놓고 수업을 계속하셨어요. 그런데 조용히 있던 아기가 그만 볼 일을 보아 버린 거죠."
다섯 살 때 그의 가족은 부산으로 떠났다. 허 시인은 부산에서 중앙초등학교와 경남여중을 나왔으니 부산 또한 시인 허영자를 키우는 데 요람 구실을 한 셈이다. 그러나 고향 함양은 그녀가 성장한 뒤에도 그에게 아픈 기억을 드리웠다. "잘들 아시겠지만 해방 정국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지리산을 끼고 있는 함양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전쟁의 상처였죠. 우리 집안의 고향은 함양의 손곡리였는데 이 마을 자체가 전란의 여파로 불타 통째로 없어져 버렸습니다. 나중에 다시 호적을 정리했는데 그때는 고향이 장항리로 변해 있었습니다. 고향마저 뒤바뀌어 버린 거죠. 내가 시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만약 내가 글을 쓴다면 아픈 우리 고향 이야기를 써야지 하는 마음은 늘 갖고 있었어요."
나는 오늘도 노력하는 유목(幼木)
애잔해 하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전쟁 통에 죽어간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었다는 서암정사를 오르면서도, 함양의 상징 상림을 거닐면서도 그런 느낌은 좀체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향은 시인의 문학 속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있는 것일까. 그 고리는 어머니였다.
허 시인은 얼마 전 '은의 무게만큼'(도서출판마을)이라는 시집을 펴냈다. 이 시집은 온통 어머니다. '어머니의 기도 말이 바뀌었다/평생 이웃과/가족을 위하여 올리던 기도//비로소/자신을 위하는/간절한 기도가 되었다.//"하느님 좋은 날 좋은 시에/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말고/잠자듯 가만히/저 세상 가게 하소서."('기도' 전문)
아흔 두살인 시인의 어머니는 일흔 살의 딸에게 고향같은 존재가 된 듯하다. 허 시인은 어머니께 이 시집을 헌정하면서 고향 함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함양 땅 정여창 선생 집안의 자손으로 함양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시인인 딸에게 물려줬을 테니까.
함양으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변에 함양 출신의 기업인이 고향에 헌신하고자 백암장학회라는 이름으로 '충효의 고장 함양'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그 곁에 허영자 시인이 쓴 시를 오석에 음각한 시비가 있다. 그 곁에서 시인은 말했다. "이것은 나의 시비라기 보다 고향을 찬양하는 시를 청탁받고 쓴 기념물입니다. 시비란 업적이 다대한 문학인들이 타계한 뒤에나 만드는 것이지 저같이 이룬 것이 없는 시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고향에 오니 많은 분들이 저보고 시단의 거목이니 하면서 과분한 칭찬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내게 너무 무겁습니다. 나는 지금도 끝없이 노력해야 함을 알고 나의 재능을 회의하는 어린 나무, 유목(幼木)입니다. 시 앞에서만은 한없이 겸손하게 한 획 한 점을 아껴가며 엄격하게 시 쓰는 일만이 제가 할 일입니다."
고향 함양의 산천이 그 품에서 자라난 큰 시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영자 시인은 - 박목월 선생 추천 등단, 시인협회상 등 수상
1938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때 부산으로 옮겨 중앙초등학교 경남여중을 거쳐 경기여고 숙명여대를 나왔다. 김남조 시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96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허 시인의 후배로 함양의 이웃 고장인 거창에서 태어난 신달자 시인이 역시 부산을 거쳐 숙명여대에 들어가 김남조 시인에게 배웠다.한국시인협회장과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문화예술저작권협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가슴엔 듯 눈엔 듯'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은의 무게만큼' 등의 시집을 펴냈고 월탄문학상 편운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지리산문학제 - 시·음악·연극 어우러진 속 꽉찬 지역 문학제 1979년 창립된 지리산문학회가 지난해부터 해마다 개최하는 규모 있는 문학제다. 올해는 지난 15~16일 함양 상림 등지에서 열렸다. 허영자 시인의 강연과 가수 김원중 공연, 연극공연과 시낭송 페스티벌이 열렸다. 제2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자로 유종인 시인을,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자로 박정수 시인을 선정해 시상했다. 정일근 도종환 송수권 김용택 오인태 문길 시인 등 전국에서 많은 시인들이 제2회 행사에 참석해 함양 주민들과 함께 했다.
지리산문학회는 올해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자 정태화 시인을 비롯해 5명의 신춘문예 등단문인을 배출한 저력 있는 단체다.
허영자(뒷줄 왼쪽 세번째) 시인과 국제신문 신문학기행에
참여한 독자들이 경남 함양군 휴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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