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떠난 산은 쓸쓸하더라 – 잠두산,백석산,막동봉
1. 멀리 가운데 오른쪽은 백덕산, 중간 오른쪽은 절구봉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욕심을 버리기 때문이다
무수히 붙어서 푸름으로 치닫던
잎새들의 갈망이 끝났기 때문이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집착을 버리기 때문이다.
잎새들을 붙잡고 무성했던 나무도
움켰던 손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 유한나, 「가을 산은 자유롭다」에서
▶ 산행일시 : 2024년 10월 20일(일), 흐림, 찬바람이 세게 불어 추운 날씨
▶ 산행인원 : 4명(광인, 캐이, 두루, 악수)
▶ 산행코스 : 모릿재터널 입구,잠두산,백석산,막동봉,1,222.8m봉,1,020.4m봉,809.4m봉 직전 안부,
베레골 발내동
▶ 산행거리 : 도상 12.5km
▶ 산행시간 : 9시간 37분(07 : 01 ~ 16 : 38)
▶ 갈 때 : 청량리역에서 KTX 열차 타고 평창역에서 가서, 택시 타고 모릿재 터널 입구로 감
▶ 올 때 : 베레골에서 택시 불러 타고 대화로 가서 저녁 먹고, 군내버스 타고 재산1리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걸어서 평창역으로 가서 KTX 열차 타고 상봉역으로 옴
▶ 구간별 시간
05 : 27 – 청량리역 KTX열차 출발
06 : 39 – 평창역
07 : 01 – 모릿재터널 입구, 산행시작
07 : 11 – 모릿재
07 : 41 - 978.1m봉
08 : 51 – 잠두산(蠶頭山, △1,244.1m)
10 : 37 – 백석산(白石山, △1,364.8m), 휴식( ~ 11 : 05)
11 : 28 – 1,360m봉
11 : 45 - ╋자 갈림길 안부, 마랑치, 오른쪽은 영암사, 던지골 가는 길, 점심( ~ 12 : 42)
13 : 38 – 1,264.8m봉
14 : 25 – 막동봉(△1,350.2m)
14 : 57 – 1,199m봉, ┫자 능선 분기, 직진은 주왕지맥, 오른쪽으로 감
15 : 30 – 1,020.4m봉
15 : 50 – 809.4m봉 직전 안부, 왼쪽 베레골로 하산 함
16 : 20 – 베레골 임도
16 : 38 – 발내동, 산행종료
16 : 50 – 대화, 저녁( ~ 18 : 15)
18 : 40 – 평창역, KTX 열차 출발(19 : 07)
20 : 25 – 상봉역, 해산
2. 산행지도,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봉평, 도암, 1/25,000)
▶ 잠두산(蠶頭山, △1,244.1m)
평창 가는 첫 열차를 탄다. 밤으로 평창을 간다. 밤 열차나 진배없다. 차창 밖 풍경이 캄캄하다. 날이 잔뜩 흐리니
더디 새기도 한다. 뿌옇게 밝아오는 평창역이 한산하다. 역사 앞에서 택시를 탄다. 신리 농로를 달려 잠두산 들머리
인 모릿재터널 입구로 간다. 산행준비는 열차 안에서 마쳤던 터라 택시에 내리자마자 모릿재 고갯마루를 향한다.
예전에는 차가 다녔음직한 임도다. 모릿재가 준령이다. 해발 800m에 육박한다.
모릿재. 『여지도』 등 고지도에는 ‘모로치(毛老峙)’로 표기하고 있다 한다. 몰잇재 혹은 모릿재라고도 한다. ‘몰’은
‘산’의 옛말인 ‘뫼’의 뿌리말로 ‘몰잇재’는 ‘산고개’라는 뜻을 갖고 있다. ‘몰잇재’가 시간이 흐르면서 모릿재가 되었다
고 한다. 예전부터 진부면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대화면을 오갔다. 모로치에는 진부면 인락원(仁樂院)이 소재하
고 있었다. (…) 인락원을 모로원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모로치 곧 모릿재는 예전에는 더욱 준령이었다.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송담 송남수(松潭 宋柟壽, 1537~1626)가
아마 통천 군수(通川郡守) 부임길에 이 고개를 넘었던 같다. 시절이 지금과 같다. 다음은 그의 시 「모로치를 넘으며
(踰毛老峙)」이다.
關河迢遆客魂危 관하는 너무 멀어 나그네 마음은 불안한데
雙鬂無端入鏡衰 무단히도 두 귀밑털이 쇠하여 거울에 드네.
雨浥黃花香糝逕 황국은 비에 젖어 좁은 길에 향기를 섞고
霜酣楓葉錦粧陂 단풍 잎은 성한 서리에 비탈을 아름답게 꾸미네.
奔川沒岸僮偏惧 빠른 내가 계단을 숨기니 하인들조차 걱정하고
卧樹當蹊馬亦疑 넘어진 나무가 좁은 길 막으니 말 또한 주저하네.
松上老鼯機尙在 소나무 위 늙은 날다람쥐 있는 재치 자랑하며
避人忙着最高枝 사람들 피하여 빠르게 가장 높은 가지에 붙네.
우리는 잠두산을 향한다. 간밤에 비가 내렸다. 풀숲은 비에 젖었고, 비탈길은 젖은 낙엽이 깔려 여간 미끄럽지 않다.
능선에 서면 찬바람이 세게 분다. 춥다. 얼굴을 감쌀 멀티스카프와 손을 따뜻하게 할 핫팩을 준비하지 않는 게 불찰
이다. 호주머니에 두 손 넣고 종종걸음 한다. 978.1m봉까지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세찬 바람에 등 떠밀려 오른다.
내심 오늘 산행 미션에 욕심을 부렸다. 조망, 풀꽃(특히 물매화), 버섯(능이, 노루궁뎅이버섯 등), 덕순이 등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강풍과 추위를 맞닥뜨리다 보니 미션수행은 고사하고 그저 고개 푹 수그리고 발걸음 놀리기
에 바쁘다. 마음을 비우니(?) 덕순이가 나를 시험한다. 홀로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풀숲에서 너울너울 춤춘다.
우아하다. 그 청향(淸香)은 만리에 뻗칠 듯하다.
젖은 풀숲을 헤치느라 바지자락은 금세 젖는다. 978.1m봉에 오르고 잠두산이 시야에 잡히고 아울러 북쪽으로 언뜻
언뜻 조망이 트인다. 석두산, 형제봉, 사남산, 박지산, 발왕산, 황병산이 하 오랜만이라 반갑다.
곳곳에 주왕지맥 산행표지기가 등로를 안내하지만 인적이 흐릿하다. 등로 약간 비킨 오른쪽 풀숲 사면을 누비는 건
물욕이 일어서라기보다는 세찬 바람을 조금이라도 피해가려는 고육지책에서다. 그러다 골짜기 만나면 되오르느라
갑절로 힘들다. 잠두산 정상 즈음해서는 절벽이라 오른쪽 사면을 길게 돌고, 매달린 가는 밧줄을 잡고 슬랩 오른다.
잠두산 정상이다. 누에(蠶)가 머리(頭)를 든 모양이다. 조망은 정상을 약간 벗어나서 절벽 위에 바짝 다가가면 서쪽
으로 훤히 트인다.
하늘은 우중충하지만 건너편에 거문산과 금당산, 그 뒤로 청태산과 대미산, 멀리 치악산 비로봉까지 보인다. 배낭
벗어놓고 넙데데한 북릉을 잠시 살핀다. 몇 해 전에 덕순이 향긋한 손맛을 보았기에 그들의 소식이 궁금해서다.
아, 그때가 먼 옛날이다. 다들 가고 없다.
3. 가운데는 박지산, 그 오른쪽 뒤는 발왕산
4. 멀리 가운데 왼쪽은 발지산, 그 뒤 왼쪽은 황병산
5. 잠두산 가는 길, 가을은 이미 떠났다.
6. 앞 왼쪽은 형제봉, 그 뒤 오른쪽은 사남산
7. 멀리 왼쪽은 황병산
8. 석두산, 형제봉, 그 뒤는 진부
9. 거문산과 금당산(오른쪽), 그 뒤는 청태산과 대미산, 가운데 왼쪽 멀리는 치악산
10. 잠두산 주변
11. 멀리 가운데는 백덕산, 그 앞은 절구봉
12. 잠두산 서쪽 자락
▶ 백석산(白石山, △1,364.8m)
이제 고원을 간다. 잠두산에서 막동봉까지 6.9km, 그 도정에 1,200m ~ 1,300m대의 표고점과 삼각점 고봉이 10좌
나 된다. 그 서쪽 산자락에는 수많은 골짜기가 지줄댄다. 20개 골이다. 모릿재골,도롱골,돌터골,칙숙박골,산토골,
천기동골,재랑박골,건해골,회골,장개골,큰섬바우골,던지골,큰골,가는골,물엄골,성골,쌍골,병골,솔골,베레골. 우리는
베레골로 내릴 것이다.
지난겨울에 이곳도 폭설과 빙화(氷禍)가 대단했다. 부러지고 꺾이고 쓰러지고 성한 나무가 없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원이 막 내닫기에 좋을 것으로 보이지만 풀숲에 그 잔해(殘骸)가 널려 있어 걷기에 무척 조심스럽다.
더구나 등로가 분명하지 않아 두 발 높이 치켜들며 누벼 다니기 일쑤다.
바람은 그 기세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이곳은 가을이 이미 떠났다. 스산하다. 빈 나뭇가지 울리는 바람소
리가 져버린 나뭇잎을 조상(弔喪)하는 소리로 들린다.
바람에 물으라
어느 것이 먼저 지는지
나뭇잎 중에서
(風に聞けいずれか先に散る木の葉)
근현대 일본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의 하이쿠다. 류시화 시인은
이 하이쿠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쉰 살에 세상을 떠나며 썼다. 위궤양 악화로 절에서 요양하던 중 피를 토하며 가사 상태에 이르렀던 소세키는 도쿄
의 단골 병원에 갔다가 병원장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어느 잎이 먼저 질지 아무도 모른다.”
풀숲 혹은 산죽 숲을 휘젓다가 오른쪽(서쪽)의 절벽 위에 다가가 수렴 걷으면 조망이 트인다. 단연 백덕산이 우뚝하
여 등대 역할을 한다. 1,208.0m봉을 느슨하게 내리고 길고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진다. 백석산 오름길이다. 다시 산
을 가는 기분이다. 쓰러진 나무를 피하다 보면 엉뚱한 잡목 숲을 헤매기도 한다. 백석산(白石山). 산에 하얀 돌이 많
다고 하는데 찾아보기 어렵다. 정상은 너른 헬기장인 풀밭이다. 가쁜 숨 고를 겸 배낭 벗어놓고 휴식한다.
13. 멀리 가운데 왼쪽은 태기산
14. 앞은 잠두산, 그 뒤 왼쪽은 백적산, 멀리 가운데는 계방산
15. 멀리 가운데는 백덕산, 앞 오른쪽은 절구봉
16. 앞은 잠두산, 그 뒤 왼쪽은 백적산, 멀리 가운데는 계방산
17. 앞 왼쪽은 금당산, 멀리 오른쪽은 태기산
18. 백석산 정상
19. 앞은 잠두산, 그 뒤 왼쪽은 백적산, 멀리 오른쪽은 계방산
20. 멀리 가운데 오른쪽은 백덕산
21. 가리왕산
22. 낙엽송 숲
▶ 막동봉(1,350.2m)
백석산을 벗어나기가 약간 까다롭다. 비슷한 표고의 봉봉을 오르내리고 그때마다 절벽에 막혀 멀찍이 돌아간다.
흐릿한 인적도 우리도 헤맨다. 점심 먹을 자리 물색한다. 능선이나 동쪽 사면은 바람받이고 서쪽 사면은 등고선 촘
촘한 비탈이다. 1,360m봉을 내린 야트막한 안부인 마랑치 ╋자 갈림길에서 영암사 쪽으로 능선 비킨 데가 그중 낫
다. 캐이 님이 돼지고기 볶는다. 익숙한 셰프의 솜씨다. 마치 산으로 먹으러 온 것 같다. 이런 날은 반주로 탁주보다
는 쐬주가 낫다. 커피까지 끓여 마시고 일어난다.
어찌된 일인지 따뜻한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마셨는데 더 춥다. 하늘은 맑은 듯하다가 금방이라도 눈이나 비를 뿌릴
듯이 꾸무럭하다. 잰걸음 한다. 1,313.3m봉 넘고 평탄한 고원의 연속이다. 등로만 쫓기 따분하고 오늘의 미션이
생각나서 풀숲과 잡목 숲을 누벼 보지만 괜한 발품이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로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
(Ruth Benedict,1887~1948)가 생각난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과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는 정부로부
터 일본 사람에 대해 일본 사람의 특성에 대해 연구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나온 책인 『국화와 칼』이다. 지금도 일본을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생전에 일본을 가본 적이 없다. 그녀는 미국에 이민 온 일본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일본 문화와 일본 사람의 특성을 그렇게 잘 이해했는가를 묻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광주
리에 담겨 있는 포도가 신맛이 나는지 아니면 단맛이 나는지를 아는 데는 굳이 그 포도를 다 먹어볼 필요가 없고 몇
개의 포도만 먹어보아도 알 수 있다고.
나 또한 더 이상 잡목 숲을 누비지 않기로 한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주왕산(중왕산)인 줄로만 알았다. 가까이 다가
가니 막동봉(오룩스 맵에서는 ‘성무산’이라고 한다)이다. 좌우로 균형 잡힌 준봉이다. 봉봉을 넘지만 야금야금 고도
를 높이니 힘 드는 줄 모르고 오른다. 수렴 걷어 치악산 비로봉만 살짝 들여다볼 뿐 키 큰 참나무 숲이 둘러 별다른
조망을 할 수 없다. 낙엽에 묻혀 있는 삼각점은 2등이다. 도암 26, 2005 복구.
막동봉에서 남서진하여 내린다. 1,222.8m봉 내리고 얕은 안부 지나고 오른 1,199m봉에서 우리는 정서진한다.
주왕지맥은 정남진한다. 지도를 보면 쏟아질 듯 가파른 내리막이다. 혹시 우리가 개척하는 능선 길은 아닐까, 은근
히 기대했는데 어렴풋한 인적이 보인다. 대자 갈지자 그리며 내린다. 이곳과 저 아래 골짜기에는 가을이 약간 남았
다. 그 빛으로 어스레한 숲속길이 환하다. 암릉이 나온다. 오른쪽 사면 내리는 인적 쫓는다. 골로 갈 것처럼 내리다
능선에 달라붙는다.
가파른 능선은 1,020.4m봉에서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급박하게 쏟아져 내린다. 809.4m봉 직전 안부에서 왼쪽
베레골로 내린다. 욕심으로는 계속 능선을 타고 809.4m봉과 715.0m봉 넘어 던지1교로 내리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면 저녁 먹을 시간까지 투입해야 할지 모른다. 2km가 넘는 능선 길이다. 베레골로 내리는 0.35km가
비로소 길 없는 우리의 길이다. 가파른 사면의 잡목 숲 헤치고 잔 너덜을 지난다.
베레골. 임도 내리고 아스팔트 포장한 농로가 이어진다. 대화 택시 부른다. 광인 님의 산행계획은 언제나처럼 치밀
하다. 대화에 가서 저녁 먹고, 가평동에서 나오는 막차 타고(군내버스는 균일요금으로 1,000이다) 평창역이 가까운
재산1리에 내려 평창역으로 가서, KTX 열차 오면 좌석에 앉아 한두 역 가느니 아예 입석 칸에 자리 잡자는 것.
유한나 시인의 「가을 산은 자유롭다」의 나머지 부분이다. 가을 산은 확실히 그러하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산을 소유하고 있던 여름이
여름을 울던 풀벌레들이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자라나야 한다든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묵직한 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23. 막동봉 가는 길
26. 백석산
27. 노루궁뎅이버섯
29. 멀리 가운데는 치악산 비로봉
30. 가을이 머물러 있는 산자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