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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근: 열왕기하(2) 아합가의 멸망. 왕하10:1-36
북 이스라엘의 악명 높은 왕 아합 가(家)의 마지막 시기입니다. 아합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종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북 이스라엘에 예후를 세워 아합 가(家)의 마지막 왕인 요람과 그를 위문하러 갔던 남 유다의 아하시야 왕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남북의 두 왕이 한날 죽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오랜 동안 영화를 누리는 것 같았던 아합의 아내 이세벨도 하나님의 예언대로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예후가 땅에 떨어진 이세벨의 시체를 밟고 궁에 들어가서 시체를 수습하라고 명하였는데 두골과 발과 손바닥만 남았고 나머지 부분들은 이미 개의 먹이가 되어 버렸습니다(왕하9:30-37).
오랜 동안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지른 아합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자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화(禍)를 푸시는데 아합의 자손들 역시 그 아비의 길과 같이 결국 돌아오지 않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악인의 최후의 모습에 대해서 아합 가(家)의 마지막을 보면서 구체적으로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당사자인 아합은 남 유다와 동맹하여 치른 아람과의 전쟁에서 죽지 않으려고 변장하여 전쟁에 나갔지만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맞아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싸움이 너무 격렬하여 전장을 빠져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온종일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피를 많이 흘려 마차 안에서 죽고 말았습니다(왕상22:29-40). 그리고 2년간 왕노릇 하면서 그 아비와 같이 악을 행한 아합의 큰아들 아하시야 왕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왕하1:16). 유탄에 맞아 죽은 아버지 아합이나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어 죽은 큰아들 아하시야 모두 죽지 않을 수 있는 일인데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이 죽고 난 후 그의 뒤를 이어 아합의 둘째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람 역시 조금 돌아올 듯 하였으나 결국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부하 예후의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화살이 얼마나 센지 살이 그 몸을 꿰뚫고 나올 정도였습니다(왕하9:24). 그리고 아합의 아내 이세벨 또한 부하 내시에게 던져져서 몸이 깨어져 결국 개들의 밥이 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왕하9:30-37).
이제 나머지 자손들의 최후를 보겠습니다. 예후가 사마리아 성에 살고 있는 70명의 아합의 자손들을 보살피고 있는 가정교사와 성(城)의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누구든지 자기를 대적할 자는 왕의 자손들 중에서 가장 유능한 자를 뽑아 그를 왕으로 세우고 그를 위해 싸울 준비를 하라고 하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며 남북 동맹 두 왕조차 당하지 못한 예후를 자신들은 감히 대적할 수 없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1-4절). 그래서 예후가 자기편이 되려거든 아합의 자손들의 머리를 잘라 보내라는 편지를 다시 보내니 70명의 아합 자손들은 자신들의 가정교사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6-7절).
아합 집안의 예로 악인은 우선 괜찮고 잘되는 것 같지만 악을 행하고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자신을 물론 자자손손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합 당사자 외에 큰아들, 작은아들, 아내 이세벨은 아합이 죽고 난 뒤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것으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이 땅에서의 삶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이후에는 더 무서운 형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 나서 자기만 죽으면 된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적당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끈질긴 분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고 나면 그 악이 모두 청산될 때까지 따라 다니면서 계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을 사람에게는 한없이 좋은 하나님이시지만 행악하고 범죄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좋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물론 아무리 무서운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모두 받아 주시지만 끝까지 돌아오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시는지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요나서의 요나를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끈질긴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갔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물고기 배속에 넣어서라도 기어이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많은 재물을 모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아쉬워하거나 속상해 할 것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계산하실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죄 중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요나를 기어이 니느웨로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나 행악한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지만 끝까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을 때 분연히 일어나시면 아무도 당할 자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합 집안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두 멸절시키십니다. 물론 후손들 중에서도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살아날 수 있었지만 기어이 돌아오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아니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포와 진노가 얼마나 두려운지 조금 더 확인해 보면 죄에 대한 징벌이 당사자와 자식 그리고 아내와 후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악한을 가까이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합과 함께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합과 동맹군이 되어 전쟁을 할 때 왕복을 입은 그가 아합으로 오인 받아 적군들에게 붙잡혀 얼마나 어려운 일을 당할 뻔했습니까?(왕상22:29-33)
그리고 여호사밧의 아들 아하시야 왕 역시 북 이스라엘의 요람 왕을 문병하러 갔다 예후에 의해 죽었고(왕하9:27-28), 유다에 있던 42명의 아하시야의 친척들은 북 이스라엘의 왕족들을 문안하러 가던 중 예후에 의하여 모조리 죽음을 당합니다(12-14절). 악인을 위문하러 갔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징벌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 악인을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악인의 죄가 얼마나 무서우며 그 죄의 빛이 얼마나 멀리 가는가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11절).
그리고 이스르엘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에 가서 거기 남아 있는 아합의 남은 친척들까지 모조리 죽였습니다. 예후가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이 악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을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중간 결론은 악인은 가까이 하기만 해도 그 죄가 자기에게 미치므로 의인은 악인과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선한 삶을 살고 있다할지라도 악인의 곁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 바로 살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인생은 약한 존재이므로 의와 선을 그리 오래 붙들고 있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어둠이 권세를 잡는 곳이기 때문에 의와 선은 곧바로 힘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의와 선을 붙들 수가 있고, 악인과 가까이 할 때는 어느덧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과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악인의 자자손손까지 추적하시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아울러 하나 더 볼 것은 이렇게 끈질긴 하나님께서 선인과 의인을 얼마나 사랑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삼사(三四) 대까지 보응 하거니와 의인은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챙겨주신다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더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들이 가끔 잘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생각하여 이스라엘의 등불을 끄지 못한다고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보여주신 결정적 증거는 왕이 된 다윗이 자기를 아껴주었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생각하여 부하를 불러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삼하9:1) 하며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을 챙겨준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잘되고 난 뒤에 이전에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고, 실제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은혜 갚을 길을 간구하기도 할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매월 한 번씩 구제 헌금을 할 때 아마 여러분은 이전의 자신의 모습과 작으나마 베풀 수 있는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마음속에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울 집의 남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였던 다윗의 마음입니다(삼하9:3). 아울러 어떻게 하든 간에 끝까지 챙겨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크신 사랑과 은사 그리고 귀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으셨다면 어쩌면 여러분의 집안의 어른들이 선한 일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돌아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시 바라기는 선을 많이 쌓아 두십시오. 선은 많이 쌓아두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듯 여러분이 행한 손길 하나 하나를 기억하셔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끈질기게 찾아가시듯이 선과 아름다운 손길도 오래오래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받을 생각으로 선을 행하지 말고 성경의 말씀처럼 빵과 떡을 떼어 물위에 던지는 것입니다. 떠내려가는 물에 챙겨 먹고 살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유랑하는 고려인들의 기사를 읽으면서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역사의 아픔 속에서 여기저기 쫓겨다니다가 아직까지 정착하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저희 교회에 모인 구제헌금으로 조금이나마 돕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물질로, 마음으로 또는 기도로 힘써 주십시오. 세계의 곳곳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들도 먹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손으로 그들 중 한 두 사람이라도 위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상하시고 끈질기신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이제 마지막으로 볼 것은 예후는 정치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일이 극심했던 북 이스라엘에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사마리아의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자기는 바알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므로 함께 바알을 섬길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모이라고 공고하였습니다. 모인 사람들 중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을 물러가게 한 후 남아 있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18-20절).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 하셨습니다(30절). 그래서 102년간 예후 가(家)가 왕좌를 이어가는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이스라엘을 찢으시매 하사엘이 그 사방을 치되 요단 동편 길르앗 온 땅 곧 갓 사람과 르우벤 사람과 므낫세 사람의 땅 아르논 골짜기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과 바산까지 하였더라(32-33절) 라는 조금 아쉬운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던 예후가 북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름진 땅인 길르앗 온 땅을 아람왕 하사엘에게 빼앗기는 것에 대하여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서 예후가 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여로보암의 죄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31절).
여러분, 여로보암의 죄를 기억하십니까? 남북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전으로 제사를 드리러 갔다가 그들의 마음이 유다 왕으로 돌아갈 것이 두려워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그 곳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왕상13:27-30). 그토록 충성스럽게 종교개혁을 하였던 예후 역시 이것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길르앗 온 땅을 빼앗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후는 왜 단과 벧엘의 금송아지를 버리지 못하였을까요? 그 역시 왕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후에게 왕위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후는 왕위나 나라를 지켜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으려고만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도 강하게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이나 사회개혁 등을 많이 부르짖고 있지만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 중 하나는 개인개혁입니다. 자기 자신을 개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 더 우리 교회가 그리고 나라의 모든 교회가 반성할 일을 개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목회자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여 많은 문제가 생겨났던 것을 함께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예후의 왕위를 주신 것처럼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알고 개인적인 개혁, 교회는 교회로서의 개혁을 다시 한 번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사회개혁은 없고 국가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가망이 없습니다.
예후의 모든 일들을 보면서 여러분이 앞장서서 개인적인 개혁은 물론 교회를 개혁해 나가면서 가정을 개혁해 나가게 된다면 상상하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크고 귀한 은혜가 여러분 개인들, 가정들과 여러분의 삶과 후손들에게 늘 이어질 것입니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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