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189호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어라 (삼상2:6~8)
지난주일 새벽까지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저는 거침없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땅에 전쟁과 지진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이 나라를 지켜주세요.”
저는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보면서 이 나라에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또 얼마 전의 튀르기예 지진 참사를 보면서 절대 이 나라에 지진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도드린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제게 “네가 원하는 게 뭐냐?”라고 물으셨을까요? 또 저는 왜 거침없이 답을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못하시는 게 없기에, 뭐든 해주실 수 있기에 물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나 지식으로 할 수 없는 것들도, 불가항력의 상황도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기에 물으신 것이고, 저는 그런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에 거침없이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제대로 알고 있다면 당신의 기도가 지금처럼 미지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한나의 고백부터 들어볼까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2:6~7). 바울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했고, 예레미야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렘32:17)라고 했으며,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42:2)라고 고백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우주 삼라만상을 지으셨고,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눅18:27).
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안 해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안 주시겠습니까? 그분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고, 능히 응답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34:15),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그렇게 지대하건만, 우리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것은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33:3) 하셨는데, 그걸 안 하니까 그런 겁니다. 어미 새도 소리를 빽빽지르고 입을 크게 벌리는 새끼에게 먼저 먹을 것을 줍디다. 입 안 벌리고 울지 않는 새끼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디다.
힘듭니까? 병 들었습니까? 문제가 많습니까? 자식 때문에 고민입니까? 사업이 어렵습니까? 부르짖어보세요. 울부짖어보세요. 하나님이 분명히 도우십니다. 홍해 앞에서 울부짖은 모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출14:15), 곧 죽으리라는 통보를 받자마자 면벽하고 울부짖은 히스기야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사38:3),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재가 몰려왔던 욥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욥10:2), 방성대곡하는 하갈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창21:16)이 당신의 부르짖음에, 당신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여러분의 생각이나 세상적인 이론과 논리를 버려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걸 앞세우는 것이 영적 교만이고, 불신앙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를 막는 견고한 진이라고 말씀했습니다(고후10:4). 그것을 깨트려야 하나님께, 하나님 말씀에 복종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
세상의 이론과 논리요?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그건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그것으로는 홍해가 갈라진 것을 설명할 수 없고, 그것으로는 소리쳐서 여리고가 무너진 것을 설명할 수 없고, 그것으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송장이 살아난 것을 설명할 수 없고, 그것으로는 날 때부터 소경인 자가 눈을 뜬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11:40)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무식하게 믿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는 말씀을 토 달지 말고 믿을 때 기적이 우리 삶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너무 쉬운데, 너무 어렵게 믿는 게 문제입니다. ‘내 생각에는~’, ‘내 경험으로는~’, ‘내가 알기로는~’, 이게 문제입니다. 내가 알아봐야 얼마나 압니까? 내가 잘나봐야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이 우쭐댄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잘난 이력과 방대한 지식이 하나님 앞에서 해가 됨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에 ‘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 배설물로 내버리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빌3:7~9).
‘부르짖어 기도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면 됩니다. ‘방성대곡’ 하라시면 그대로 하면 됩니다. “왜요?”라고 따지지 마세요. 저도 목회 38년 동안 참 많이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교단에서 제명되었을 때, 가족들이 떠났을 때, 예배드릴 장소가 없을 때, 해외집회 중에 난항을 만났을 때 제가 한 것은 오직 울며 부르짖은 것뿐이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시고 보호하시고, 길을 여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여러분, 복음은 내세의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지금, 이 땅에서도 우리가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주고 채워준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복음이요? 그것은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지금 내가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지금 먹을 것이 없는데, 지금 삶이 엉망진창이고 고난 중에 있는데 죽음 다음의 천국을 논한다면 그 천국에 대한 소망이 일겠습니까? ‘지옥이 이보다 더하겠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복음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8). 시편 107편 말씀에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107:10~11)고 했습니다. 지존자의 뜻은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존자의 뜻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겁니다. 예수님도 현실의 문제 앞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는데(눅22:44), 하물며 우리겠습니까?
하나님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물속에서 물을 찾는 어리석은 물고기가 되지 마십시오. 답을 옆에 두고 문제를 못 푸는 바보는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영·혼·육의 답이고, 길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부르짖기를 원하십니다. 귀가 둔하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간절히, 절박한 심정으로 아뢰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재판관을 찾아간 과부처럼(눅18:1~8),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대결한 엘리야처럼(왕상18:42), 딸을 고치고픈 수로보니게 여인처럼(막7:25~30) 간절히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응답은 소망의 열도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남들이 무식하다 하면 어떻습니까? 미련하다 하면 어떻습니까? 응답받으면 그만입니다. 축복받으면 그만입니다.
할렐루야!
기도의 응답은 소망의 열도에 비례한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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