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37]
이기풍(李基豊, 1868-1942)④
이기풍이 아내 윤함애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했지만, 그의 가정은 고난과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식이 모두 육 남매였는데, 셋째 아들은 열 살 때 제주도에서 죽었고, 넷째 아들은 두 살 때 광주에서 죽었습니다. 첫째 딸은 열여덟 살 때 순천에서 죽었습니다. 자식 절반을 잃은 상황에서도 “하나님 아바디의 은혜에 감사합네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외다”라고 외치며 가슴을 칠 뿐이었습니다. 그는 제주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과로 때문에 관절염과 귓병이 생겼고, 심지어 실어증까지 생겼을 정도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노력한 끝에 30개 이상의 교회를 개척하는 결실을 얻었습니다. 그는 제주도 외에도 고흥, 순천, 벌교, 광주, 여수에서 선교와 목회를 했고, 특히 66세가 되던 1934년에는 여수시 남면 우학리에 파송되어 그 주변 크고 작은 여러 섬을 돌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1936년부터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싸웠으며, 그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참여한 순천노회 소속 목사 17명이 모두 1940년 11월 15일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의 막내딸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기 위해 학교도 그만둘 정도로 부모의 신앙을 닮아갔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힌 1940년 11월 15일부터 옥고를 치르다가 죽기 직전 1942년 6월 13일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서 여수 우학리로 향했고, 거의 다 죽어가는 74세의 허약한 노인의 몸이었지만 우학리 교회에서 마지막 성찬식을 거행하고 1주일이 지난 6월 20일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화순에 소재한 광주중앙교회 공원묘지에 안장되었고, 우학리교회는 훗날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참고도서> 김재현, 『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