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50/191210]오수獒樹 오일장과 재첩 캐기
5, 10, 15, 20, 25, 30일 장場이 서는 오수獒樹 5일장. 어머니 첫 기일 때 쓸 조구(조기의 방언) 10마리를 사두라는 특명이 내려왔다. 오수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의견義犬의 고장. 초등학교 방학책에 실린 설화說話일 것이나, 패관문학의 최자崔滋 <보한집補閑集>에 실렸다는, 거녕현(居寧縣· 현 임실군 지사면 영천마을)에 사는 김개인金蓋仁이 술에 취해 강둑에서 잠을 자는데, 불이 났다. 주인이 타죽을 것을 걱정한 애견이 제 몸에 물을 묻혀 주인을 살려내고 그 옆에 죽어 있었다한다. 잠에서 깬 김씨, 개의 죽음을 슬퍼하며 노래를 부른 게 <견분곡犬憤曲>이라던가. 물론 가사는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개를 묻고 늘 갖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놓았는데, 다음해 싹이 났다던가. 그 나무, 지금도 근 1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위용을 뽐내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의미를 한껏 높이려 의견비각을 세우고 원동산을 꾸몄다.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도록 동분서주한 주인공은 오수상인회장 심병국씨. 92년 전국의견제도 처음으로 개최했다. 몇 년 전 군郡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 공적비를 세웠다.
오수면, 40년 전만 해도 전국의 면面 가운데 가장 컸다. 상주인구 2만명. 군소재지인 임실읍도 따라가지 못할, 교통의 요지. 남원, 순창, 장수, 임실 등으로 가는 길목. 오수 기차역은 늘 붐볐다(광복절 특사에 출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역참驛站이 있었다. 어느 가게에서 우연히 면장과 조우했다. 대뜸 면 인구를 물었다. 13개리里에 4000명이 채 안된다며 아마도 면지面誌가 없는 면은 오수면이 유일할 거라고 한다. 그것 참. 제사공장 굴뚝이 지금도 우뚝한데, 한때 잘 나갈 때에는 오일장이 전북에서도 손꼽혔고, 한복을 입고 서빙하는 종업원이 있는 고급 음식점이 4개(남원관, 양춘옥, ?, ?)나 있었다한다. 흥청망청. 활동사진을 트는 극장도 있어, 5km가 넘는 데도 국민핵교 시절 걸어서 단체관람을 간 기억도 뚜렷하다. 그것뿐인가. 서점이 두 곳 있었으니, 얼마나 번창한 면소재지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때, 그 서점에서 대하소설 3질 15권을 사주셨다. 너무나 좋아 시오리길을 그 책을 업고 이고 들고 왔던 기억이 새롭다. 박종화의 <자고가는 저 구름아> <삼국지> 김교신의 <광복 20년>. 지금, 서점도 극장도 없어졌지만, 군소재지에도 없는 군립도서관이 번듯하게 세워져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빛좋은 개살구인가, 개발의 편자인가.
그 오일장을 어슬렁어슬렁, 이런 소요유逍遙遊가 따로 없다. 돌아갈 때에도 걸어서 가리라. 당뇨병에는 무조건 등산이나 걷는 게 최고라지 않던가. 가슴 아픈 것은, 어머니 단골 미장원은 그대로 있는데, 아버지가 늘상 드나들던 면사무소와 농협지점은 그대로 있는데, 주인공들은 어디로 갔을까, 씁쓸하기가 한량이 없다. 금방이라도 아버지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같아 자꾸 두리번거려진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가위손’세계에 뛰어든 여자동창은 다리 건너 미용실을 독립해 차린 게 90년이라 했다. 공부도 잘 했는데, 그 아버지는 ‘딸은 초등학교만 다녀도 충분하다’고 했다던가. 괜치 그 아버지를 미워했었다. 미용실에 불쑥 들어서는데 오늘따라 손님이 없어 좋았다. 처음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서로 나눴다. 2003년 부군이 남매를 놔두고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한다. 종교는 이럴 때 큰힘이 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독실한 권사라며 교회를 다니라 한다. 빙긋 웃고 만다. 아들은 올해 40. 결혼을 하지 않아 ‘애물단지’라며 담담히 말한다. 딸은 38, 남매를 두었다고. 아들에게 “네가 결혼을 해야, 내가 재혼을 하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니냐”고 재촉했으나 묵묵부답. 16년 전에 홀로 되었으니 긴긴 세월 얼마나 외로웠을까.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 세월 이겨냈을까. 낯꽃도 좋다. 다음에는 재혼이야기를 심각하게 거론해봐야겠다. 나의 두 아들 이야기도 심플하게 들려주며, 서로 손주들 자랑을 하기 바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도 않을 거라는. 흐흐.
동네 우리집 앞을 지나는 대중교통. 무조건 천 원짜리 한 장이다. 조구 12마리를 2만원에 사면서 간을 해달라고 졸랐다. 세 군데를 돌며 값을 알아봤는데, 제법 실한 것을 싸게도 샀다. 아내에게 칭찬받을 일이다. 하루 지나 씻어서 냉동실에 넣어놓으라고 한다. 내처 홍합을 1만원어치 달라고 했다. 두 바가지. 제법 많다. 이것은 마을회관 할머니들에게 드릴 작은 선물. 오후엔 홍합파티를 하십사, 드릴 것이다. 어제 공짜로 점심을 푸짐하게 얻어먹은 데 대한 약소한 보답이다. 청국장에 꼬들배기에 조기조림에 어찌나 맛나던지, 염치 불구하고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할머니라야 열 분도 채 되지 않는다. 쪼그랑망태기가 된 우리 동네. 30가구라고 해도 50명도 안될 것이다. 이장은 전주에서 출퇴근하고, 맨날 단합, 단합 외쳐도, 어디 단합을 외쳐서 잘 되는 동네 보았던가. 우리의 농촌현실을 어느 마을이든 대변하고 있다. 하드웨에는 첨단, 소프트웨어는 구석기. 흐흐.
겨울날치고 눈도 오지 않고 제법 푹하다. 동네 앞 제법 큰 내에 물이 빠졌다. 이웃동네 친구가 재첩을 캐러 가자고 꼬신다. 뭐, 재첩? 재첩이 냇물에 있단 말이야? 솔직히 놀랐다. 섬진강 하류 하동에서나 나오는 게 재첩 아니던가. 1급수에 있다고 했다. 아니, 뒷산 저수지에는 민물새우가 득시글거려 우리를 흐뭇하게 하더니만(친구는 토하젓을 담아 그것으로 김장을 하는데 넣었더니 갱미가 있다고 자랑했다). 그럼, 우리 동네 냇물이 깨끗해져 재첩들이 위로, 위로 몇 백리를 올라온 것일까? 물이 쭈욱 빠진 냇물, 약간의 뻘이 생겼는데, 그곳에 재첩이 지천으로 있었다. 오 마이 갓! 이런 횡재가 있나. 둘이서 두어 시간 잡으니 한 말은 족히 된 듯. 고무장갑을 갖고왔으면 더 좋았을텐데. 손이 시리다. 칼같이 둘이 나눴다. 물에 담가 서너 번 헹구어 해치가 다 빠진 후 재첩국을 끓이면 된다는 것. 그래, 한번 해보자. 청약고추를 좀 많이 넣고, 대파를 숭겅숭겅 엇비슷하게 썰어넣고, 간은 천일염으로 맞추자. 다진 마늘과 생강도 좀 넣으면 괜찮으리라. 국도 끓기 전에 입맛이 다져진다. 아무래도 살기 좋은 내 고향같다. 흐흐.
첫댓글 고향에서 자연과 함께 시골스럽게 사는 친구가 부럽다.
요즘 퇴직한 교직 친구들이 전국 5일장을 다니면서 지방의 특색과 향토음식에 푹 빠져있더라. 나도 8개월 있으면 오수장을 비롯해 전국을 누비고 다니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