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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05
12월10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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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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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B2bFz5sW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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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멸망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서려는 인간 측의 교만입니다!>
바깥 일을 하다보면 틈만 나면 만나게 되는 것이 벌레요, 구더기요 지렁이입니다. 처음에는 섬뜩했지만 습관이 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려니 하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습니다.
뱀이나 두더지, 고라니 정도 되면 호기심을 갖고 유심히 들여다보곤 하지만, 벌레나 구더기나 지렁이는 하찮은 미물로 여기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정녕 놀랍고도 은혜로운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갈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야서 41장 13~14절)
하느님께서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눈여겨보시겠답니다. 하느님께서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오늘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 친히 우리의 오른 손을 붙잡아주시겠답니다. 만사 제쳐놓고 우리를 도와주시겠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며 황홀한 말씀인가요?
아마도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작고 미천한 존재를 각별히 사랑하시는 특별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나름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존재들은 사정없이 내리치십니다. 대신 벌레나 구더기같은 미물인 존재들, 가련하고 안쓰러운 존재들을 눈여겨보시며 알뜰살뜰 챙기십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사람, 병고나 죽음, 실패나 좌절은 나와는 별개의 것이라며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으시고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심연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들, 한꺼번에 불행이란 불행이 들이닥쳐 주저않아 있는 사람들을 각별히 눈여겨보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들의 십자가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 친히 십자가를 나눠 짊어지시리라고 확신합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과 자리를 듬뿍듬뿍 받고 싶다면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큰 존재, 엄청난 존재,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존재, 도움이 필요한 존재, 그래서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신학에 따르면, 유다 왕국의 멸망,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서려는 인간 측의 교만’이었습니다.
주님 없이도 잘 할 수 있다는 오만, 주님을 향한 신뢰의 심각한 결핍이 결국 유다 왕국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신탁’을 강조합니다. ‘언제나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두려워 말고 주 하느님께 의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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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누가 하늘나라에 폭력을 쓰는 사람인가?>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LAPA_Q9jc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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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것이 하늘나라이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폭력배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폭력을 당하시는 이유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도 세례자 요한은 일반 대중에게 예언자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예언자라고 여기는 이가 하는 말에 귀를 막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그리스도께는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보석을 잘 감정하는 사람이 어떤 보석을 한 움큼 들고 와서 “이 보석만큼 큰 가치가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하나씩 나누어드리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콧방귀도 안 뀌고 그 말을 무시하고 받은 보석을 쓰레기통에 버린다면 이것은 예언자에 대한 폭력을 넘어서서 가장 귀한 보석과 그 보석을 주려는 마음에 대한 폭력입니다. 꼭 폭력을 써야 폭력이 아닙니다. 사랑을 삐딱하게 봐서 거부하는 것이 폭력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귀를 막는 것이 사랑에 대한 폭력입니다.
왜 세상은 그리스도께 대한 폭력을 쓰게 되었을까요? 자신들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에 역행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보석보다는 커다란 쇳덩이가 더 귀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보석은 폭력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영화가 있습니다. ‘파반’은 인도의 한 평범한 청년으로 약혼녀와 혼인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건장한 청년입니다. 장인 될 사람이 집을 마련할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결혼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 일, 저 일을 가리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5살 정도 된 길 잃은 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소녀의 부모를 찾아주고 싶었지만, 소녀는 말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과 하나를 주고 그냥 돌아섭니다. 하지만 아이는 파반을 계속 따라옵니다. 마음씨 착한 파반은 그동안 모은 돈과 아이를 데리고 장인에게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갑니다.
사실 소녀는 문니라는 이름을 가진 파키스탄 산골 마을에 살던 아이였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종교와 영토분쟁, 과거사 등으로 원수처럼 지내는 나라입니다. 문니가 절벽에서 떨어질 뻔하며 매우 놀라, 말을 하지 못하게 되자 소녀의 어머니는 돈을 모아 소녀가 말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인도의 신에게 기도하러 왔다가 소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파키스탄으로 돌아갔고 문니는 그렇게 말도 못 하면서 홀로 남겨졌습니다.
파반은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많은 돈을 내고 부모를 찾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아이를 넘깁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팔찌를 사서 다시 그곳에 가봤더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부모를 찾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를 팔아넘기는 나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파반은 끝까지 아이를 찾아내어 구해옵니다.
그리고 아이가 고기를 먹는 이슬람 전통에서 자란 것을 알게 됩니다. TV에서 파키스탄과 인도와의 크로켓 경기가 열리자 혼자서 파키스탄을 응원하는 것을 보고는 아이가 파키스탄에서 온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파키스탄 비자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모은 돈을 써가며 몰래 아이를 데리고 파키스탄으로 밀입국합니다. 이 와중에 신분이 들통나서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탈출하여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첩자가 아이와 함께 들어왔다며 지명수배를 내립니다. 도망 다니는 중에 찬드 나왑이라는 파키스탄 기자를 만나고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파반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에 왔고 문니의 부모님을 찾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영상으로 찍어 방송으로 내보냅니다. 그러면서 경찰에 잡히지 않게 여러모로 도와줍니다.
파키스탄 성지에 갔을 때 엄마도 아기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러 왔었고 그것이 영상에 찍히며 아이는 엄마를 알아봅니다. 그러나 아이 엄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간 상태였습니다. 파반과 기자 나왑, 그리고 문니는 어머니가 타고 간 버스의 종착지를 알아내고 그곳으로 아이를 데려갑니다. 아이는 자신의 동네가 나오자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때 경찰들이 들이닥칩니다. 파반은 아이를 기자에게 넘겨 엄마를 찾아주라고 하고 자신은 도망치며 경찰의 시선을 끕니다. 아이는 엄마를 만나고 파반은 경찰에 잡혀 심한 폭력과 고문을 당합니다. 인도의 스파이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는 기자 나압은 다시 인터넷으로 이 모든 사실을 영상으로 올립니다. 파키스탄 사람들과 인도 사람들까지 이 영상을 보고 파반을 구하기 위해 일제히 일어섭니다.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이 증오를 끝냅시다. 우리에겐 이게 필요합니다. 두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을 위한 증오가 아닌 사랑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니 이 증오를 끝냅시다.”
결국, 파키스탄 정부도 여론에 못 이겨 파반을 인도에 양도합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파반은 양국 국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으며 인도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문니는 파반을 부릅니다. 파반은 말을 할 수 있게 된 문니를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이는 ‘카쉬미르의 소녀’란 영화고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카쉬미르라고 하는 분쟁지역의 한 소녀의 어머니를 찾아주기 위해 파반은 결혼도 미루고 결혼자금으로 남의 나라에 들어가 스파이처럼 취급당합니다. 파키스탄 정부가 왜 파반을 스파이 취급하며 폭력을 행사하였을까요? 기자의 말대로 ‘증오’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증오하는 나라에서 자기 나라의 한 아이를 위해 그런 희생을 치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증오의 나라에서 사랑은 폭력을 당합니다.
이 세상은 증오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적어도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 “행복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입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이 말을 믿는 이들은 증오의 눈이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사랑 자체이신 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돈과 경쟁과 쾌락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사랑으로 오신 분을 받아들일 수도 없을뿐더러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들과 같은 세속적 행복을 추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세상에서 성공하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려고 할 때는 사제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참 행복’임을 깨닫고 나서는 그 부르심이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귀’는 이 깨달음을 말합니다. 세상 행복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무관심하거나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만이 참 행복의 길임을 깨닫지 못한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폭행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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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1-15 :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신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즉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일 것이다.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뛰놀았으며”(루카 1,41), 그의 어머니 또한 성령을 받아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고 하신다. 즉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 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승리의 관을 받은 것과 아직 군대에 몸담고 싸우는 중인 것은 다르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절) 하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분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 완전한 말씀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유를 기다리던 이를 따뜻이 맞아들여 그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주신다면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13절)는 말이 맞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이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음에도 그렇게 어려웠다면,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 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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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와 마태오 복음서는 믿음과 희망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이는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뒤, 시인은 잔혹한 전쟁의 폐해를 시에 담았습니다.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라고 하는 독서와, 복음에서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하신 예수님의 탄식과도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나 엘리엇 시인은 ‘황무지’를 쓰며 고대의 성배 전설을 참조합니다. 늙고 병든 왕의 나라에 재앙이 일어납니다. 왕은 재앙을 물리칠 지혜롭고 힘센 젊은이를 찾습니다. 마침내 한 젊은이가 성배를 가지고 나타나 재앙을 물리치고 새 나라를 건설합니다. 시인은 현대 사회의 재앙을 황무지에 비유하면서도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듯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불의와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제시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화답송의 시편도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는 분’이라고 희망을 노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십니다. 올해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황무지’ 같았습니다. 고난을 극복할 희망을 주시는 분께서 곧 오신다는 것을 이 대림 시기에 다시 한번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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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한이 바로 엘리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1-15)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다.”라고 강조하신 것은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말라키서를 보면 이런 예언이 나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말라 3,23-24) 이 예언은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기 전에 먼저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사실상 메시아를 곧 보내신다는 예언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즈카르야에게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을 할 때 이런 말도 했습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이 말은 말라키서의 예언을 인용한 말이고, 세례자 요한은 말라키서에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 예언자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는 말입니다. <이 예고도 사실상 메시아께서 곧 오신다는 예고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엘리야 예언자가 곧 메시아’ 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요한 1,19-21)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이 엘리야요?” 하고 물은 것은, “당신이 메시아요?” 라는 뜻으로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아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했거나 메시아이기를 기대했다가, 당사자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바람에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일들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엘리야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준비하는 예언자’로 생각하긴 했지만, 어떻든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일을 체험한 뒤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되었으면서도 엘리야 예언자에 관해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7,10-13) 이 말씀도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다.’라는 말씀이고,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는 것을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에 대해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 상황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한 일을 성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에 그가 사람들을 모두 회개시켰다면, 예수님의 일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텐데, 그가 실패했기 때문에 그만큼 예수님의 일도 어려워진 것이 아닌가?” 세례자 요한이 박해를 받고 수난을 당하고 순교한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이루어진 일의 전체 규모만 보고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것은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의 방식일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임무 수행은 성공이고, 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회개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고, 요한이 인도한 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의 임무 수행은 성공입니다. 물론 요한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구원의 은총’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의 탓이 아니라, 그 사람들 자신들의 탓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 복음을 받아들였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니,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은 실패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의 일은 대성공입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성공이고, 예수님 승천 뒤에 복음이 선포되는 과정과 그 결과를 보아도 성공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요한 17,4)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구원과 멸망은 우리가 선택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메시아 예수님의 성공과 승리에(메시아의 왕정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메시아의 나라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외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을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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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평화신문에 ‘박현민 신부님의 별별 이야기’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갈등, 걱정, 시기, 원망’을 사람의 성격에 맞추어서 풀어주고 있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내면의 문제들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11월 15일의 지면에 있었던 ‘설마와 혹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설마라는 말에는 지나친 낙관이 있습니다. 혹시라는 말에는 지나친 걱정이 있습니다. 한 건설회사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자재비를 아껴 건물을 짓다가 신축 건물이 무너지는 사고를 냈습니다. 경찰은 건설 관계자를 불러 조사했습니다. ‘왜 노동자들을 대피시키지 않았습니까?’ 건설 관계자가 대답했습니다. ‘설마 무너질지는 몰랐습니다.’ 경찰이 또 물었습니다. ‘회사 간부들은 왜 대피시켰습니까?’ 건설 관계자가 대답했습니다. ‘혹시 무너질지 몰라서요.’ 우리 사회에 있었던 대형 참사는 ‘설마’라는 안일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반응도 설마와 혹시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중국에서 시작되었을 때입니다. 미국은 ‘설마 미국까지 오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스크 착용에 대해서도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도 마스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별일 없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바이러스는 여권이 필요 없었습니다. 국경도 필요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된 바이러스는 3개월 만에 소리 없이 미국으로 들어왔고 우리는 지난 10개월 코로나 바이러스와 원치 않는 동거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가장 많은 확진자와 사망자가 발생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2015년 메르스를 경험했습니다. 바이러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전파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초기에 확실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은 3T(Trace, Test, Treatment), 추적, 검사, 치료를 통해서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았습니다. 한국은 확진자와 사망자가 적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성서는 ‘설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노아시대에 많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를 만들던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설마 40일 동안 비가 내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설마 바다가 넘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방주를 만들어서 착실하게 준비했던 노아는 홍수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준비된 사람에게 시련은 더 높은 곳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에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이 50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의로운 사람이 45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30명만, 20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10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로운 사람 10명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설마라는 생각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문을 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세상의 욕망과 권력을 멀리하면 우리는 구원의 방주에 오를 수 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받아들였고, 구원의 방주를 찾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의로운 사람 50명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제자들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었어도, 아무리 특출한 능력을 지녔어도, 아무리 멋진 외모를 지녔어도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외모와 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참을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힘도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저의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저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서, 천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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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
마태오 11,11-15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늘나라>
하늘나라는
가질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서서히 스미도록
맡길 따름입니다
하늘나라가
나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가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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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두려울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찬미예수님
윤리를 가르치다보면 간혹 난감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학기에 제가 가르치고 있는 과목 중 하나가 특수윤리신학인데, 보다 실제적이고 첨예한 사회의 문제들을 다루다보니 가르치기 퍽 어려운 주제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낙태 문제와 안락사, 동성애 문제가 그렇습니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대부분 신학생과 수도자라 할지라도 이 문제를 바라보는데 있어 제법 의견이 갈립니다.
대표적으로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여성의 낙태가 가능한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허용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동성애자들의 사랑을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등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민감한 문제들을 보수적인 입장에서 다루다 보면 처음에는 학생들의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 수업을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이러한 시선은 차차 사라집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그 의미를 곱씹으면 당연히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세속의 헛된 욕망이 무엇인지 인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꽤나 지난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물며 신학생들과 수도자들의 생각도 이러한데 세속의 젊은이들에게는 어떻게 이를 가르쳐야 할 것인가가 커다란 과제로 여겨집니다.
사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교회는 항상 이러한 처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혼전 성관계 문제, 사형제 문제 등에서 교회의 가르침은 세상의 태도와 완연히 다릅니다. 이로 인해 많은 비판에 부딪히게 되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곤 합니다. 교회의 상황과 세례자 요한의 상황이 실로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세례자 요한의 삶을 먼저 조명하자면, 그는 세상에서 인간적인 풍요를 누리지 않은 인물입니다. 유대교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음에도 그가 스스로 선택한 곳은 광야였고, 메뚜기와 들꿀이 그의 음식이었습니다. 또한 낙타가죽의 옷만을 걸치고 있었으니 과연 그의 생활이 얼마나 고독하면서도 외로웠을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한 역할은, 예수님의 공생활을 예언하며 그분의 길을 잘 닦아 놓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헤로데 왕의 불륜을 반대하다가 젊은 나이에 목이 잘려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삶을 요약하자면,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 길을 준비만 하다가, 세상의 불의를 고발하고는 죽음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과 교회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고독하고 외로운 광야의 여정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강조하다 보면, 실로 광야에 홀로 외롭게 서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윤리적 문제들이 있고, 세상은 더욱 제약없는 자유를 추구합니다. 물질적인 것들과 개인의 쾌락이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교회는 사실 외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세례자 요한을 시샘하고 질투해 결국 죽음으로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안에서 교회는 그 구성원들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 받습니다.
사제로 살아가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며 서운함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와 같은 고독하고 외로운 삶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시대에 상관없이 보수적인 입장에서 교리를 선포합니다.
즉 올바른 교회, 올바른 성직자라면 광야라는 외롭고 고독한 환경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진리임을 실제로 알고 있고 중요한 가치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 1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기억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세상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해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소한 외로움과 갈등이 어떻게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가? 나의 신앙은 과연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신앙인가?
오늘 복음말씀처럼 현재에도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습니다. 윤리적인 문제들, 폭력적이고 성적인 미디어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고 쾌락이 세상의 제일가는 행복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여러 가지 주변 상황들은 우리 안에 미움을 만들어내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겸손함을 실천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분 역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한 삶을 우리 역시 세례자 요한과 같이 기꺼이, 그리고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어 잘 영위한다면 세상의 끝 날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요한에게 하셨던 말씀을 자비롭고 따뜻하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태어난 이들 가운데 너희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단다.”
오늘 미사 중에 세례자 요한의 삶을 기억하며 우리들 역시 겸손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드러내는 소중한 도구로 쓰이기를 주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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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기다림 2>
오늘 독서를 통한 하느님의 고백을 들으면 ‘이제는 그 바보 같은 사랑을 그만 두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사랑은 결코 헤아릴 수 없다고 하지만 “벌레 같은 야곱”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인줄 뻔히 아시면서도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도와주리라”고 다짐을 하시니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세상에는 신도 많고 종교도 다양합니다. 단언하건데 그 많은 종교는 모두 뇌물을 요구합니다. 상이 잘 차려진 제사일수록 기도의 힘이 세지고 더 많은 복채를 통해 더 큰 복을 받게 된다하니 그렇습니다.
오직 그분의 이스라엘, 그리스도인들의 제사만이 ‘속죄제’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죄,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얻지 못하는 구원의 역사가 그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장이 미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믿음이며 사랑이며 희생이어야 할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한 세월이 430년입니다. 세상의 어느 민족도 400년을 꼬박 노예로 지내는 일은 인류 역사상 전무하다고 합니다.
긴 세월은 자신의 주체를 흐리게 할 것이고 긴 시간은 서로를 동화시킬 것이며 긴 시간을 참아내지 못한 민중의 궐기와 반항의 역사가 일어나기 마련이라 합니다.
말라키 예언자를 통해서 이르신 하느님의 약속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 23)는 말씀은 35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한 마태오사가의 집필시기를 따지면 거의 400년이 흘렀을 것이라 꼽아집니다.
그 긴 세월,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예언이 사라지고 역사가 뒤바뀌는 와중에서 이스라엘인들의 갑갑함이 얼마나 컸을까 싶습니다.
호세아에게 들려주신 하느님의 절규를 기억하며 죽어간 숱한 세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면서도 아무런 확신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 세대도 있었습니다. 무조건 믿고 기다린 그들의 간절한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적었던 마태오사가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에게만 들리는 복음,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메시아, 그것을 몰라보는 이스라엘이 안타까워서 펑펑 눈물을 쏟았을 것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잊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내게 와서 “두려워 마라”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은 받아들이는 마음에만 가능합니다. 이미 곁에 와 계신 그분을 두고 누구를 찾으십니까?
그분을 기다린다면서 무엇에 분주하며 무엇에게 휘둘리며 무엇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참으로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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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사랑으로, 사랑하신 하느님을 보는 사람들의 나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이 구세주를 예언했지만, 세례자 요한처럼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길을 내면서 직접 준비를 시킨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앞으로 일어날 구원의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에서의 그 '하늘나라'는 다름 아닌 구세주로 인해 드러나게 될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사랑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마주 보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사랑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직접 뵙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충만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전합니다.
이를 향해 전진하는 우리들은 순간순간 하느님을 포착하나 부족한 사랑으로 이내 놓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살을 취하시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을 사시면서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실 주님을 기억하니 마음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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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이현철 이냐시오 신부님]
<작은 자>
작은 자는 남들이 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자는 자신의 재능이나 덕행이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며 서슴지않고 말째의 자리에 자신을 놓을 뿐 아니라 그러면서 기뻐합니다.
작은 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는 정직하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 시간, 물질, 덕행 등 모든 것이 홀로 선하신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아무 것에 대해서도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남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시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작은 자는 남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고 자기가 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결코 흥분하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가 옳고 남이 그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자는 사람들이 칭찬해 줄 때에나 비난을 할 때에나 항상 평화중에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대로이지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자는 진심으로 통회합니다...
오늘 복음(마태 11, 11-15)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었다..."라고 하십니다만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작은 자라고 하며, 장차 내 뒤에 오실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자라고 자신의 겸손함을 보입니다.
이번에 성직자로 수품을 받은 저 젊은이들이 이러한 작은 자로서 충실한 사목생활을 하여 주님으로부터 세례자 요한처럼 큰 인물로 칭찬받기를 기도드리립니다.
그리고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보기드문 큰 키'라고 지금 칭찬을 받고 있을 민성기 신부님의 많은 저서중 '하늘로부터 키재기'라는 책에서 일부 발췌하여 퍼드립니다.
신학생 시절, 가르멜수도회의 동갑내기 신부 장석훈 베르나르도는 창경궁을 거닐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요셉아, 나이 마흔될 때까지는 나서지마라. 침묵해라. 공부해라. 세상이 너를 필요로 할 그때까지…"
그 사이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묵상한 글들을 책으로 묶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책으로 묶는 것은 어제의 삶에 애착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름방학이 끝나 다시 서울로 돌아와 혜화동 보나벤뚜라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초가을 9월 17일, 너무나 뜻밖이었던 그 여름 사건을 떠올리며 끄적이다가 아래의 졸시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하늘로부터 키재기」
세우려 한다 세우려 한다 한없이 세우려 한다
오르려 한다 오르려 한다 한없이 오르려 한다
재려 한다 재려 한다 한없이 재려 한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한없이 세우고 한없이 오르고 한없이 재려 한다
누가 더 높이 쌓았는지 누가 더 높이 올랐는지 한없이 쌓고 오르고 재려 한다
사람은 땅에 사는 동물 사람은 땅으로부터 높이를 재는 동물이다
보이는 것의 기준은 땅이기에...
허나 보이지 않는 게 있다
사람들은 그를 하느님이라 불렀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시는 분 하느님은 하늘로부터 높이를 재는 분이시다
오늘에야 사람들은 불현듯 하늘로부터 키재는 법을 알았다
하늘로부터 키재기를 시작한다
난쟁이의 키가 커져 보인다 바벨탑은 낮아지고 난쟁이의 키는 커졌다
내리고프다 무너뜨리고프다
오, 캐노시스! *
갑자기 비가 내리고 세상이 바로 보인다.
※ 캐노시스 : 어원은 희랍말의 kenosis로서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를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쓰여지고 '비움'이라는 뜻을 지닌다.
하늘로부터 키를 재는 지혜, 이러한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야고 3, 13-18)
세상의 이치에서 볼 때 작아진다는 것, 내가 작아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같아 보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작아지는 그 곳, 바로 그 곳에는 낯설음이 있습니다. 왠지 어색하게 낯설은 그 곳에서 우리는 여느 세상과는 다른 새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작아지기를 어색해 하고 낯설어 하는 것은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그 새로움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새로움과 낯설음,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육화하시어 우리와 같은 피조물로까지 작아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수모를 당하시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하셨던 세상, '새 하늘과 새 땅' (묵시 21, 1)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크게 되는 변화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의 신비입니다.(마르 4, 31)
정현종 선생의 「섬」이라는 단순한 시가 있습니다. 그 전문은 이렇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저는 이 시를 대하면서 시인이 노래하는 이 '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곧잘 이런 말을 합니다 :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디오게네스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나, 정현종 선생이 노래한 '섬'을 저는 같은 맥락에서 보고 싶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사람다운 사람은 찾기가 어려운 만큼 우리 눈에도 잘 띄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동경하고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섬처럼, 한 번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비록 드러나지 않아 우리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지 우리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분명히 있습니다. 누구일까?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렵습니다. 참으로 나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요청됩니다.
나의 삶의 자세를 세상의 상식적인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 자신이 작아지고 또 작아져야 하는데 그것이 쉬울 리 없습니다. 자존심을 뭉그러뜨려야 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루카 14, 11 : 18, 14)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낮아지게 됩니다." (마태 18, 4)
작음, 작아진다는 것, 작아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이며 신앙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덕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질수록 그만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의 시간, 나의 공간, 우리의 시간, 우리의 공간을 비우면 비울수록,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면 여길수록, 세상의 눈으로 보아 바보가 되고 어리석어 보이면 보일수록,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 하늘나라가 이 땅에 내려오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 작아집시다! 우리가 작아질 때 예수께서 우리 안에 육화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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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는 제가 생각하는 대로 모두 다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장래 희망이 바뀌었습니다. 과학자, 선생님, 소방관, 운동선수…. 이렇게 계속 바뀐 저의 꿈이었습니다. 하나의 꿈을 가지고 있다가도 좋아 보이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나 친구의 꿈을 듣고는 “나도 그거 할래.”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대로 이루어질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중년의 어른들은 모두 압니다. 세상은 자기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님을 깨닫지요.
어느 조사 결과를 보니, 19세에서 24세 사이 청년의 96%는 “언젠가는 내가 인생에서 원하는 위치에 도달할 것이라고 매우 확신했다.”라고 합니다.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막연한 희망만으로는 실망만 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희망을 품어야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실제의 꿈을 이룰 수가 있게 됩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에 대해 너무 막연한 희망을 두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도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라고만 합니다.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평불만이 가득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무슨 폭행을 당하고 있을까 싶었는데, 오늘 묵상을 하면서 계속해서 폭행을 당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말하는 모든 불평불만의 모습들이 하나의 폭행이었습니다. 자기 뜻을 이루어주지 않으면 절대 믿지 않겠다면서 협박의 말도 합니다.
역시 또 하나의 폭행입니다. 이것을 할 테니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전혀 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지키라고 윽박지릅니다. 역시 폭행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이루려는 모습입니다. 지금의 자리도 내 것이고, 하느님 나라도 내 것으로 삼는 것이 아닐까요?
하늘 나라를 빼앗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실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즉, 자신이 들어가겠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길을 믿고서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를 세례자 요한은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보다 작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자리는 어떨까요? 그런데도 그 하늘 나라를 향해 폭행하고,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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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대화할 때>
나이가 들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정치’입니다. 왜 이렇게 상대방을 못 잡아먹어서 난리일까 싶습니다. 법을 위반한 것이면 법의 심판을 받으면 될 것을 서로 삿대질하며 왜 싸우는지 도대체 이해되지 않습니다. 서로 논쟁해서 상대방을 논리로 이겼다고 해서 꼭 이긴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나에게 대한 반감을 갖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계속된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보수’에 대해 그렇게 좋은 시각을 갖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타협도 하지 않는 ‘꼰대’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수’를 지지하는 분과 언성을 높이며 이야기를 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기는 사람은 상대방의 생각도 인정하고 받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갑곶성지에는 봉안당이 있습니다. 이 봉안당을 운영할 때, 정부 시책은 당연히 따라야 합니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불법이 되어서 벌금이나 심하면 폐쇄까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예외 원칙을 내세우는 분이 계십니다. 안 된다고 하면, “왜 이렇게 가톨릭은 보수적입니까? 왜 이렇게 앞뒤가 꽉 막혔어요? 그러니까 발전이 없는 거예요.” 등등의 말씀을 하시며 화를 내십니다. 내가 법이고 원칙이면 대화가 전혀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세요. 싸움이 일어나면 ‘나’를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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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다>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 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예수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고, 예수님께서 하늘이셨지만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제 욕심과 탐욕,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이웃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일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사랑을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먹질이나 욕설만이 폭력이 아니랍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잘 지키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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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상 천국天國의 삶>
-“두려워하지 마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저절로 자주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참 어둡고 혼란한 시절입니다. 이렇게 코로나로 미사 때 노래도 못하고 마스크를 하고 강론을 하는 이런 일은 사상 초유의 일로 예전에는 상상치도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블루, 우울증등 무력감을 호소합니다. 자영업자들이 겪는 고통 역시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제도 여러분으로부터 전화도 가톡 메시지도 받고 미사신청도 받았습니다. 흡사 곳곳에서 긴급 구조를 청하는,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는 ‘에스오에스SOS’ 신호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에스오에스(SOS)를 찾아 봤습니다.
SOS는 구조를 위한 대표적 모스 부호로, "우리의 영혼을 구하소서Save Our Souls," "우리의 배를 구하소서Save Our Ship"라는 영어 각 대문자를 딴 것입니다. 그대로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는 구조 요청입니다. 흡사 세상 바다에서 인생 항해중 세상 파도의 격랑에 조난 당한 이들이 곳곳에서 보내는 구조 요청 같습니다. 44년전 20대 후반 초등학교 교사 시절 제자로부터도 뜻밖에 반가운 소식을 받았습니다.
“저예요. 윤숙이. 평안하신지요. 겨울 잘 이겨내는 새싹들처럼 슬기롭게 보내고 날이 따뜻해지면 찾아 뵐께요. 건강하셔야 해요.”
참으로 피해 갈 곳 어디도 없어 보이는 작금의 엄중하고 위중한 상황입니다. 매4주간 수요일 저녁 성무일도 시편이 떠올랐습니다. 참 공감이 가는 시편 내용 일부 인용합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뜷어 아시나이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시간 되시면 시편 139장 24절 까지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깊고 은혜로운 하느님 묵상 체험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도망쳐 떠나 숨을 곳은 세상 그 어디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언제 어디나 계신 하느님이니 하느님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서도 못만납니다.
중세기의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집에 놔두고 외출하여 하느님을 찾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을 떠나 어디도 숨을 곳 없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하느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안식처, 피난처, 정주처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궁극의 갈 곳은 지금 여기 성전뿐이요, 궁극의 만날 분은 성전에 계신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만이 영원한 참 쉼터요 샘터요 배움터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다 보니 휴가 안간 지가 수십년이 되었습니다. 하여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려 주님의 집 수도원을 찾습니다. 지난 11월에 써놓은 ‘오늘 지금 여기’란 고백시도 생각이 납니다.
-“가고 싶으나/갈곳이 없네
보고 싶으나/볼분이 없네
가고 싶은 곳/오늘 지금 여기 '주님의 집' 성전
보고 싶은 분/오늘 지금 여기 계신 '주님'뿐이네”-
참으로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피신처요 안식처요 정주처임을 고백하는 내용을 우리는 성서에서 무수히 만납니다. 시편 90장 서두 내용이 우리에게 참 깊은 평화를 줍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전에 땅이며 누리가 나기도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께서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러 오셨으니 바로 대림시기 고대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어제 복음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궁극의 안식처인 예수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성심만이 우리의 궁극의 안식처요 더불어 참 좋은 안식을 선물로 받습니다. 예수님 안식처를 찾아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미사를 통해 늘 확인하는 참 귀한 진리는 우리의 궁극의 안식처는 주님뿐이라는 자각입니다. 오늘 복음 전반부 말씀도 참 은혜롭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뻬앗으려 한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지상 천국의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결코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기에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지상 천국을 살지 못했습니다. 바로 초대 교회 신자들의 자부심을 보여 줍니다.
그러니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의 안식처입니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박해나 시련, 유혹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 천국의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으며 폭력을 쓰는 자는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 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는 주님의 전사가 되어 임재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를 수호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고정적 현실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끊임없는 도전과 변화가 함께하는 역동적이요 내적인 하늘 나라의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임재臨在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외방전교회 프랑스 출신 문세화 신부님입니다. 신학교 시절 강의중 ‘임재臨在’란 한자 뜻이 너무 좋다고 감탄하셨고 저 또한 공감했던 추억이 3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임재臨在는 주님께서 임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주님께서 안식과 평화를 선물하시니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걱정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늘 하시는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란 말씀입니다. 수도원 십자로에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를 격려 하시고 축복을 약속하시며 대림시기 그대로 실현될 것입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들어 주고 있다. 나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 준다.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이런 구원자 주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두려움의 어둠은 사라지고 생명의 빛 충만한 하늘 나라의 안식처가 실현됩니다. 이어지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축복 말씀입니다.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주님께서 임재臨在하셔서 함께 할 때 펼쳐지는 풍요로운 내적 변화를 상징하는 예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지상 천국의 당신 안에서 안식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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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막연히 그려오던 메시아 왕국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하늘 나라 선포로 구체화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알리는 소리의 역할을 이행하지요.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지상에서 하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완성에 이르지는 못했지요.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늘 나라는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수혜자이기도 하고 기여자이기도 하며 증거자기도 하지요.
하지만 구약의 제도와 관습 안에서 기득권을 취하며 사는 이들에게 새로움은 썩 달갑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도 자기들의 가르침이나 이익과 부합하지 않으면 베엘제불의 힘일 따름이지요. 그래서 하늘 나라는 오해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폭력은 결국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박해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분들의 죽음이 하늘 나라의 소멸을 초래하지 않고, 오히려 하늘 나라를 들불처럼 번지게 할 것임을 그들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당신 백성의 힘을 북돋우시는 주님의 위로가 반복됩니다.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3)
외세의 침략과 유배와 핍박으로 지친 백성에게 주님께서 말을 건네십니다. 주님이 진노를 거두시고, 다시 보호와 도움의 손길을 뻗치시면 백성은 그들의 지위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천군만마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 오른손을 붙잡고 계신 주님을 관상합니다. 얼마나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우신지요. 무엇이나 다 해주실 것 같고 어떤 곤경에서도 구해 주실 것 같은 관대한 힘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집니다. 세상 걱정과 두려움은 잊어도 좋습니다.
"주님, 당신은 가까이 계시나이다."(입당송)
주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그 가까운 정도는 우리 가운데이고 우리 안이니 함께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공동체에, 우리 존재에 하늘 나라는 진행 중인 현실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토록 세찬 어둠의 힘에도 하늘 나라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죽음으로 잠시 어둠이 이기는 듯 보였나 우리 주님은 부활하시어 세상의 주인으로 영원히 사십니다. 하늘 나라는 그 주인과 함께 승리합니다. 하늘 나라의 주인께서 오른손을 붙잡아 이끄시는 이도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영성체송)
완성될 하늘 나라를 꿈꾸며 나아가는 우리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어느 때가 될지 모르지만 각자의 소명을 충실히 살다 보면 하늘 나라는 우리 가운데서 더 확장되고 더 자라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벗님! 당장의 고통과 어둠에 매몰되지 말고 두려움 없이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우리 오른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는 한 하늘 나라는 반드시 승리하고 완성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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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대림을 맞아 - 묵상 4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기는 매우 장엄하고 성대한 시기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듯이 이 시기는 “주께서 인자를 보여주시는 때요, 구원과 평화와 화해의 때입니다.” 이때는 성조들과 예언자들이 열렬한 갈망과 탄식으로 그리워하고 마침내 의인 시므온이 넘치는 기쁨으로 보게 된 때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매우 성대하게 이 시기를 경축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시기를 경건한 마음으로 경축해야 하고 이 시기에 기념하는 신비 안에서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자비에 대해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를 바쳐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신 것은 우리 죄인들에 대한 측량할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즉 우리를 마귀의 포악한 권세에서 해방시켜 천국으로 초대하시며 천국까지 인도하여 거기에 들어가게 하시고, 또한 진리 자체를 보여주시어 우리 마음속에 도덕의 씨앗을 뿌려 주시며 당신 은총의 보화로 부유케 하시어, 마침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성 가롤로 보르메오 주교의 「사목 서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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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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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실,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전과 후에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 구약의 시대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와 계심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그분과 함께 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 새로운 질서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 갈증을 풀어주고,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이사 41,17-18 참조)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고,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9-1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하늘나라는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 귀 기울여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에페 6,10-18)
그러니, 믿음의 귀를 지닌 우리는 이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요한이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라는 말씀은 곧 당신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미리 오기로 한 엘리야라면, 당신이 오시기로 한 구세주이심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늘나라를 폭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방치하고나 빼앗겨도 안 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마태 11,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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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12)
주님!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하늘나라가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지 않게 하소서.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당신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다스림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 안에 와 계신 당신을 거부하거나 폭행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다스림과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이오니,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 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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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11,12)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지금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묵상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면에서 격동과 혼란의 때입니다. 참 부활로 나아가는 그런 때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진짜 그리스도인,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첫째 자리에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나 사건이나 이슈를 예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미사 때나 기도 때에 "아멘, 아멘!"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예수님과 다르다면 그런 사람은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시작부터 마침까지 가짜들과 싸우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당시 기득권을 누리면서 군림하고 있었고,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강한 외침으로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정의가 바로 선 하느님의 나라를 원하고 있고,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좀 가졌다고,
좀 안다고,
좀 높은 자리에 있다고,
좀 힘이 있다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폭행과 폭력을 행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가짜 그리스도인은 아닌지?
가짜는 고통 앞에서 떠나갑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의 마음을 그만 아프게 해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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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tNRmi2bdD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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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 12)
회개와
하늘 나라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폭력이 아닌
하늘 나라이다.
사랑을
받아먹고
사는
우리들 삶이다.
언제나 과분한
사랑의
하늘 나라이다.
그 과분함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모습이다.
폭력과
욕심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하늘 나라이다.
폭력을
치유하는
회개이다.
하늘 나라를
되찾는 회개로
하느님 나라는
더욱 풍요롭다.
회개를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다.
빼앗아 갈 수
없는 회개를
요한 세례자의
삶에서 맑게
만난다.
회개하는 이가
바로
요한 세례자처럼
큰 사람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다시
성찰하게 되는
은총의
대림시기이다.
회개로
하느님 나라의
사람이 된다.
폭력으로
갈라서는
우리들이 아닌
참된 회개로
하느님
나라를 되찾는
우리들의 기쁨이길
기도한다.
하늘 나라는
회개를 통한
사랑의
나라임을
믿는다.
폭력이 아닌
기다림의
사랑이길
기도한다.
하늘 나라는
회개하는
사람들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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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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