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520)
■ 2부 장강의 영웅들 (176)
제8권 불타는 중원
제 23장 작은 거인 (3)
BC 549년(진평공 9년, 제장공 5년)여름
진평공(晉平公)은 11개국 제후들을 이의(夷儀) 땅에 불러모아 회합을 가졌다.
이의(夷儀)는 형나라의 수도다.
형(邢)나라는 한때 적적(赤狄)의 침공을 받아 멸망 직전에 놓인 적이 있었다.
이것을 제환공이 구해주었다.
이때 새 도읍지에 성을 쌓아주어 나라를 존속시켜준 것이 바로 이의성이다.
- 제(齊)나라를 응징하자!
이의(夷儀) 회맹의 주요 안건이었다. 진(晉)나라로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진(晉)나라는 제(齊)나라에 대한 보복 조치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해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황하가 범람했다.
진평공(晉平公)은 어쩔 수 없이 회맹을 파하고 돌아갔다.
'아깝도다!'
이것을 가장 아쉬워한 사람은 제나라 재상 최저(崔杼)였다.
그 무렵, 제장공에 대한 최저의 원한은 극에 달해 있었다. 아내 당강(棠姜) 때문이었다.
제장공(齊莊公)은 암군(暗君)의 정도를 넘어서 혼군(昏君)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3년 전, 제장공은 최저의 집에 놀러나왔다가 그의 아내 당강의 미모에 반했다.
술에 취한 그는 최저(崔杼)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당강을 품에 안고 내실로 끌고가 겁탈을 했다.
그 뒤로도 틈만 나면 최저의 집으로 암행을 하여 당강과의 간음을 즐겼다.
최저(崔杼)는 이를 알면서도 어쩌질 못했다.
'언젠가는 이 치욕을 갚아주리라!'
그는 제장공의 살해를 결심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거사하기가 좋았다.
진(晉)나라 연합군이 이의(夷儀)에서 회맹을 갖고 임치로 진격할 계획이라는 소식에 접했을 때
그는, '기회다.' 라고 쾌재를 불렀다.
연합군이 쳐들어오면 제장공의 목을 베어 성문을 열고 항복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황하가 범람하는 바람에 수포 (水泡)로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이후에도 제장공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동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런 일이 있었다.
최저(崔杼)가 공무로 집을 비우자 제장공은 최저의 집으로 달려가 당강을 품에 안았다.
한창 열락에 빠져 있는데 별안간 최저가 돌아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엉겹결에 그는 최저의 관(冠)을 쓰고 궁으로 돌아왔다.
뒤늦게 관이 바뀐 것을 안 제장공(齊莊公)은 마침 나라 일을 보고하러 온 대부에게 그 관을 하사했다.
군주로부터 관을 하사받은 대부는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궁 밖으로 나갔다.
그는 궁문 밖에서 최저와 마주쳤다. 최저(崔杼)가 가만히 보니 자신의 관이 아닌가.
최저(崔杼)는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제장공(齊莊公)이 다녀간 것을 알고
더할 나위없는 치욕과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이미 제장공을 살해하기로 결심한 그였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헤어졌다.
그 후로도 그는 종종 자신의 관을 쓰고 다니는 대부들을 조정에서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이러한 제장공(齊莊公)의 무도함을 손놓고 방관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간언을 올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제장공의 측근 시자(侍者) 중에 가거(賈擧)라는 환관이 있었다.
어느 날, 가거(賈擧)는 제장공이 최저의 집으로 잠행하여 당강과 밀회하려 하자 조용히 간했다.
- 악(惡)이 쌓이면 재앙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제장공은 궁을 나가려다 말고 채찍을 들어 가거의 등짝을 1백 대 후려갈겼다.
- 네가 내 채찍을 맞은 것도 네 선조가 악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최저(崔杼)도 이 소문을 들었다.
그는 가신인 동곽언을 보내 가거를 위로했다.
가거(賈擧)는 감격하고 그때부터 최저의 심복 부하가 되어 제장공(齊莊公)의 일거일동을
감시하는 역을 맡았다.
또 한 사람, 제장공에게 간언한 사람이 있었다. 안영(晏嬰)이었다.
그는 행정이나 군사 부문에서 이렇다 할 재능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아버지 안약의 후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평소 말을 아꼈으나 한 번 입을 열면 상대를 압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작은 거인' 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 작은 거인 안영(晏嬰)이 제장공에게 다시 직격탄을 퍼부었다.
- 주공은 멸군(滅君)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멸군이란 멸망한 군주를 말함이다.
이에 대해 제장공(齊莊公)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환관 가거(賈擧)가 말 한마디 올렸다가 채찍 1백 대를 맞은 것과 비교하면 사뭇 대조적이다.
제장공 역시 안영의 말에 압도 당했음인가.
안영(晏嬰)은 또 간언했다.
- 군주는 경(卿)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사로운 관계를 맺어서도 안 됩니다.
최저의 아내 당강과의 간통을 빗댄 말이었다.
이때 제장공(齊莊公)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 최저는 나의 태부다. 태부(太父)는 아버지나 형과 같은 사람으로 한가족이나 다름없다.
하나의 물건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은 곧 친(親)이요, 애(愛)다.
이에 대해 안영(晏嬰)이 다시 반박했다.
- 주공의 그 말씀이 궤변인 것은 누구보다도 주공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평민의 집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고 있습니다.
하물며 주공께서는 한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모범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제장공(齊莊公)은 입을 다물었다.
안영의 논리에서 수긍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순간 제장공은 안영을 내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불호령으로 내치면 제장공 자신이 지고 만다.
'공연히 잘난 체하는 자에게 질 순 없지.'
며칠 후였다.
제장공(齊莊公)은 밤중에 술을 마시다가 느닷없이 측근 시자에게 명했다.
"안영(晏嬰)을 불러오라."
시자가 안영을 데리러 간 사이 제장공은 악사들에게 노래 한 곡을 가르쳐주며 말했다.
"안영이 오면 그 노래를 부르도록 하라."
안영(晏嬰)이 궁중 뜰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악사들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과인 기뻐할 일 주지 못한다.
그대 무슨 일로 왔는가
계단으로 올라서려던 안영(晏嬰)은 그 노랫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제장공의 의도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노래는 이런 뜻이었다.
- 그대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떠한가. 나는 그대에게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하겠다.
이것을 그대는 아직도 모르는가.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여기 올 일이 없다.
야유의 노래였다.
악사들은 그 노래를 세 번 불렀다.
노래를 듣고 난 안영(晏嬰)은 계단 앞 뜰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제장공은 의기양양하여 물었다.
"그대는 대부가 아닌가. 대부는 땅바닥에 앉지 않는 법이다."
재차 던지는 악의에 찬 야유였다.
그때 안영(晏嬰)이 태산보다도 무거운 음성으로 제장공을 향해 말했다.
"소송하는 자는 땅에 앉는 법입니다. 저는 바야흐로 주공을 소송하려 합니다."
"소송.........?"
제장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인신의 우두머리 된 사람이 의(義)를 버리고, 예(禮)를 잃고, 용(勇)만을 좋아하고, 인(仁)을 미워하면
반드시 화가 그 일신에 미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공과 같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신(臣)은 이제 주공의 이러한 비도(非道)를 소송하고자 합니다."
"그대는 지금 나에게 나 자신을 재판하라는 것인가?"
안영(晏嬰)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안영, 그대는 소송의 절차도 모르는가? 소송에는 반드시 증인이 필요하다.
내게는 증인이 있으니 걱정이 없다만, 그대에게는 증인이 없다. 그러므로 이 소송은 무효다."
"신에게도 증인 있습니다."
"증인이 있다고......? 어디?"
"저기 저 악사들이 신의 증인입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백성 기뻐할 일 주지 못한다.
그대 어찌 여기 있느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제장공에게 군주자리를 떠나라고 권고하는 노래가 아닌가.
그러나 당시의 사고방식으로 아무리 안영이라고 하지만 그런 노래를 부를 수는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대'란 제장공을 가리키기보다는 제장공의 마음속에 들어찬
'무도함'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 군주답지 않은 행동은 이제 그만두시오.
백성들은 더 이상 주공의 그러한 행동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주공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안영(晏嬰) 멋진 반격이요, 제장공으로서는 한 방 먹은 셈이었다.
제장공(齊莊公)은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분노했다.
"이 무례한..........!"
그런 제장공을 향해 안영은 두 번 절하고 궁을 물러나왔다.
그것은 곧 관직 사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 다음에 계속.........
첫댓글 ㅎㅎ 대단하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