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쌍곡선
- 상편 -
황노인이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릴없는 노년에 들어서도 그는 진득하게 집에 틀어박혀 지내지 못하고 열흘이 멀다하고 나라 안팎을 쏘다녔다. 어쩌면 인생황혼에 이르러 그 쓸쓸함을 조금이라도 떨치고자 그의 팔자에 들었다는 역마살을 들먹이면서 그렇게 떠도는 것 같았다. 그런 황노인에게 코로나 블루가 덮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굳이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이제 생의 마지막에 거의 닿았음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추억사진첩을 펼치면 평생직장이라며 함께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벌써 많이들 떠났기 때문이다.
백세시대는 여전히 희망사항일 뿐이요, 허울 좋은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사진이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황노인은 하루아침에 생활패턴까지 집어삼킨 코로나를 인내하기 힘들었다. 마스크로 입과 코를 단속해야하고 재래식시장이나 마트 은행 관공서 심지어 음식점까지 발열을 확인한다며 신상정보까지 요구하는 게 못마땅했다. 마스크가 코로나를 제대로 막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스크 물결에 휩쓸려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 없는 현실이 더욱 그는 안타까운 것이다. 평소 만나기만 하면 스마일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던 얼굴들도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으니 살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다 서로 다툴 때나 내밀던 주먹으로 악수를 나누라니 살다 살다 무슨 이런 일이 벌어지나 싶기도 하다. 코로나는 일 년을 넘기고 있지만 아직도 뚜렷한 치료제가 없다는 게 황노인을 더욱 움츠들게 만든다. 인생 황혼에 이 무슨 해괴한 재앙인가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치게 되는 그였다. 원숭이띠 황노인은 이제 곧 여든에 이를 터이다. 역병이 창궐한 속에서 맞은 소띠 해이지만 그는 기분전환을 위해 애써 ‘럭키 세븐’을 떠올려 본다. 미신을 멀리하는 그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꿈꾸는 대로라면 금년엔 행운을 뜻하는 럭키 세븐이 자신의 나이에 두 번이나 겹치니 애써 기운을 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두 번의 럭키 세븐을 맞은 여기까지 온 자신의 생이 기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사는 도시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으니 그의 인생은 근대사의 비극 한복판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복 덕분에 섬나라에서 가족 품에 안겨 귀국할 수 있었지만 얼마 못가 육이오가 터지고 말았다. 피란길 낙동강 백사장에 비 오듯 퍼붓는 총탄 속에서 초등 일 년생인 그는 기적처럼 살아남았지만 가장이 참변을 당하여 그는 전쟁고아가 되다시피 했었다. 그러곤 직장을 막 떠나온 쉰 중반엔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그의 뇌를 파고들었다. 당시 부산의 종합병원 신경과장은 그에게 신변정리를 요구했었다.
하지만 서울 아산병원 감염내과에선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그를 거뜬히 살려냈다. 2002 한일월드컵 열기가 지구촌을 달구던 유월이었다. 황노인은 오늘도 몇 차례나 지난 시절의 맹부장이 떠올랐다. 이제 생각을 그만 하자고 할수록 더 또렷이 떠오르는 얼굴이 맹부장이다. 늙으면 여성호르몬이 늘어나 눈물이 자주 난다더니 지금 황노인이 딱 그렇다. 티브이에서 드라마를 보거나 시디로 흘러간 노래를 들을라치면 시도 때도 없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주르륵 주르륵 흐르는 것이 눈물이다. 이제는 생사여부조차 불분명한 맹부장인지라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샘이 작동되니 보통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황노인은 노년사고四苦란 말을 접할 때마다 맹부장이 떠올랐다. 맹부장은 초로에 맞닥뜨린 파산으로 네 가지 고통 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빈고貧苦로 야반도주를 할 정도로 빚이 엄청났었다. 세상에 늙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노년에 겪는 가난은 더욱 고통스럽다는 게 경험자들의 한결같은 충고였다. 그런데다 평균수명까지 길어진 상황이라 그 고통은 더욱 인내하기 힘들 것이다. 맹부장은 중년에 이미 당뇨로 고생하고 있었다. 늙음도 서러운데 파산충격으로 당뇨까지 깊어졌다면 그 고통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당뇨환자는 시력도 온전치 못하다는데 여든을 넘긴 노인이 야간에 택시를 몬다면 그 고통은 또 오죽할까.
맹정한이 황익구 집에 전세를 든 것은 딱 반세기 전이었다. 그러곤 그가 크게 성공하여 다시 만난 건 서울올림픽 무렵이었으니 어언 삼십 년 세월도 더 흐른 추억이 되었다. 인생황혼에 이른 지금 생각해봐도 황익구는 세입자였던 맹정한이 다시 연락해 와서 만난 일이 꿈처럼 느껴진다. 세상에서 한번 헤어진 셋집주인을 찾는 일은 드물기도 했지만 맹정한이 황익구를 찾느라 힘들었던 사실을 그대로 들려준 때문이기도 했다. 칠팔십 년대는 일 년이 멀다하고 세상이 바뀌던 격변기였으니 더욱 그러했을 터이다. 두터운 전화번호부 끄트머리에 붙은 자신의 이름을 찾아준 것이 황익구는 여간 고맙지 않았던 것이다.
맹정한이 직장을 은퇴한 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익구는 그동안의 이야기가 궁금하여 하루라도 빨리 만나지 못해 좀이 쑤셨다. 얼른 만나보고 싶은 조바심이 일자 두 가족이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았던 삼 년여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전세금 육십만 원으로 맹정한이 황익구 집을 전세계약한 건 황익구가 채 서른이 되기 전이었다. 전세계약을 체결한 아내는 상대가 서른 중반의 대기업 부장이란 사실을 자랑하듯 황익구에게 고했다. 방 두 칸에 부엌 한 칸 그리고 협소한 연탄창고가 전부인 셋집을 당시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 간부가 계약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던 황익구였다.
하지만 그 의문은 맹부장이 손수레 두 대에다 이삿짐을 나누어 싣고 도착하면서 바로 풀렸다. 서울에서 H대학 화공과를 나온 맹부장은 직장을 다니면서도 별도로 풍선공장을 차렸다가 풍선처럼 돈을 전부 날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라가 가난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던 당시엔 출산율도 높아 어린이대공원도 새로 들어섰고 가족단위로 고궁이나 유원지를 찾는 피크닉이 대유행이었다. 이때 어린 꼬마들 손엔 꼭 실로 매단 풍선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그처럼 알록달록한 어린이용 풍선은 수요가 많았는데도 그는 어떻게 공장을 운영했기에 그렇게 쉽게 부도를 맞았는지 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풍선을 만들다가 돈을 날렸다는 맹부장 사업 스토리는 코미디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파산은 엄연한 그들 부부가 겪고 있는 현실이었으니 대놓고 웃을 수 있는 일은 못되었다. 맹정한이 생산부장으로 일하는 럭키유지는 치약과 비누를 전문으로 만드는 기업이었다. 당시로선 럭키치약이 국내소비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고 비누도 시장 점유율이 치약과 비슷하게 높았다. 당시 일본이나 대만에 비해 우리 공산품 품질이 많이 낮아 제품경쟁력에서도 국산은 밀리고 있었다. 소비자들 중에선 엽전들이 만드는 물건은 할 수 없다는 비아냥거림이 쏟아지기도 했었다.
생각이 못 미치는 일부 시민들은 봉건적 인습에서 아직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스스로를 얕잡아 엽전으로 불렀으니 당시 정부에서 벌이던 새마을운동 정신과는 완전히 거꾸로인 의식이 아닐 수 없었다. 황익구 집에서 럭키유지가 붙은 찻길까진 백 미터도 채 안 될 정도로 가까워서 맹부장이 이곳에 전세를 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맹부장은 점심을 가족과 따뜻한 밥으로 해결하고도 시간이 남았던 것이다. 전력계통 수급업무를 담당하는 사령실에서 교대로 근무하던 황익구는 낮에도 집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아 맹부장의 점심시간 출입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고 가족이 행복하게 만나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었다.
맹부장은 습관처럼 늘 귀에다 리시버를 꼽고 에이에프케이엔AFKN ‘미국의 소리’ 방송을 청취하고 다녔다. 황익구가 뒤에 럭키유지에 근무하는 친구 동생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맹부장이 직장에서 대졸사원을 모아놓고 외국어를 가르친다고 했었다.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독일어 중국어까지 능통하다는 맹부장 이야길 듣고 황익구는 놀랐다. 당시 국내시장 수요가 많지 않아 생산제품 판로를 해외시장으로 확대하려면 그 나라 말을 익히는 것은 불문가지였을 것이다. 작달막한 키에 중국인처럼 생긴 얼굴에 머리숱이 적어 중늙은이 티가 약간 났던 맹부장은 웃으면 눈까풀이 거의 붙어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비치기도 했었다.
말수가 적어 스스로 먼저 말하는 법은 없었고 황익구가 몇 마디 물어야 겨우 충청도 청양 말씨로 한두 마디를 수줍게 대답할 정도였다. 그는 직장에서 얻은 정보인지 앞으로 중국이 엄청나게 부상하리란 전망을 갖고 있었다. 맹부장의 미래준비는 여섯 살짜리 그의 맏아들을 원거리인 부산역 앞 화교유치원에 입학시키는 데서도 드러났다. 그 어린 것을 보호자 없이 시내버스에 태워서 보내는 걸 보고 이웃들은 혀를 내둘렀다. 맹부장 부인도 럭키유지에서 퇴직한 전직사원이란 사실은 이사 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일자리와 인력이 동시에 부족했던 당시로선 전공에 맞추어 사람을 뽑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맹부장 부인은 인문계인 부산여고를 졸업했지만 직장에선 시험실에 근무하게 되었고 당시 그곳 책임자였던 맹정한 시험실장과 부부로 맺어지면서 부인은 퇴사를 했다는 것이다. 맹 부장 부부는 다섯 살 나이차가 있었지만 스스럼없이 대화하며 다정하게 지내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다. 주인집과 전셋집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지만 두 여자는 낮 시간을 늘 붙어 지냈다. 서로 친구처럼 때론 자매처럼 친숙하게 보내는 두 사람은 다섯 살 나이차를 무시하고 서로 너나들이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결혼 전 대기업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는 공통점도 있었지만 그보단 둘 다 꾸밈없는 소탈한 성격 때문인 것 같았다.
풍선공장에 충격을 받았을 만도 한데 맹부장 부인 얼굴에선 그런 그늘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당시 ‘웃으면 복이 와요’ 프로그램에 나가도 될 만큼 얼굴엔 늘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여섯 살 밑에 세 살짜리 형제를 둔 맹부장네였고 황익구네는 세 살짜리 딸 밑에 첫돌을 갓 넘긴 아들이 있었다. 육아에 대한 공통관심사도 있었겠지만 부산과 마산에서 자란 두 여자는 성장기에 겪었던 추억이나 직장생활에서 체험한 얘기들을 주로 나누는 것 같았다. 인문계 마산여고를 나와 한일합섬 총무과를 거쳐 공기업 한국철강에서 근무했던 황익구 아내는 두 군데 직장 경력으로 그만큼 할 얘기가 많았는지도 모른다.
집을 신축한 후 처음으로 함께 입주했던 앞서의 세입자는 외항선원 가족이었다. 연령대는 첫 번째 가족도 비슷했지만 궁색한 생활이 보기에 측은할 정도였다. 충청도 출신 부인은 매달 부산항 가까이에 있는 사무실을 찾아가 봉급을 수령하는 날 딱 한 번 갈치를 사와서 구웠고 그럴 때면 어린 아이들은 “우리 집에 갈치 굽는다”고 동네 골목이 떠나가도록 소릴 질러댔다. 그때 선원가족의 허기진 삶을 지켜보는 황익구는 가금씩 콧잔등이 시큰하기도 했었다. 맹부장이 텃밭에 무릎높이까지 자라 꽃을 피운 결명자를 송두리째 뽑아낸 사건은 그들이 이사를 떠날 때까지 두 여자가 자주 들먹이면서 배를 잡던 단골메뉴였다.
결명자는 황익구가 화단 옆 텃밭에다 씨앗을 뿌려 잘 가꾸었는데 맹부장이 중간에 사고를 친 것이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셋집 쪽으로 돌아앉은 텃밭에서 일을 마친 맹부장이 아내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엄마야, 나 오늘 밥값 좀 했다!” 하더란다. 그는 아이들 엄마인 아내를 늘 엄마로 부르고 있었다. 집 주인인 황익구가 늘 화단에 붙어 가꾸는데 맹부장은 그 옆을 지나면서도 도와주질 못해서 속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모과나무와 감나무 대추나무 앵두나무 같은 유실수는 당시 황익구가 관할 변전소에 출장을 나갔다가 그곳에서 파는 묘목을 구해 와서 심었었다.
산수유와 목련을 비롯한 꽃나무들도 두루 심었고 양지가 발라 식물들은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쉰다섯 평에서 꽃밭과 텃밭이 서른 평 가까이나 차지했으니 식물원처럼 느껴지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맹부장은 농촌에서 태어났으나 원예식물을 비롯한 농작물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렇게 전세 육십만 원짜리 방 두 칸에 옹색하게 움츠리고 살았던 맹부장에게 어느 날 갑자기 쨍하고 해 뜨는 날이 찾아왔다. 울산 온산공단 내 규모가 엄청난 럭키유지 공장장으로 발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온산공단 공장장 임기를 마치자 수도권 안양공장장으로 영전되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퇴직을 했단다.
이제 직장생활은 끝인가 했는데 이번엔 태평양화학이 치약사업에 뛰어들면서 그를 부르더란다. 당시 그를 부른 대전의 기업 공장에다 만족할 만한 제품을 만들어 성과를 올리자 초빙 전무이사로선 선례가 없었던 고액의 퇴직금을 받아들고 나왔을 때가 그의 나이 쉰이었다. 맹부장은 이처럼 뒤에 공장장과 전무이사까지 차례로 지냈지만 황노인은 지금도 입에 익숙한 맹부장으로만 그를 기억하고 있다. 성공한 맹부장이 서울과 같은 더 큰 도시로 진출하지 않고 부산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본인이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도시에 대한 향수에다 처가가 부산에 있었기 때문일 것 같았다.
한편 십오륙 년이 지나 맹부장이 황익구를 찾았을 때 황익구는 맹부장이 근무했던 럭키유지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황익구가 맹부장을 생각하며 그 아파트를 입주한 것은 아니지만 인연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맹부장이 그토록 공들여 황익구를 다시 찾은 것도 그의 아내 성화 때문이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만큼 황익구 아내와는 친자매 이상으로 끈끈한 정을 느끼고 있던 맹부장 아내였다. 맹부장은 젊은 한때 풍선공장이 도산하여 잠시 어려움을 겪은 적은 있지만 이제 누구도 안 부러운 부를 누리고 있었다. 맹부장이 부산을 다시 찾은 무렵은 서울올림픽이 지구촌 곳곳을 달구던 때였다.
누가 뭐래도 나라의 국운은 상승일로에 있었고 오랜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국민들 얼굴마다 밝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당시 황익구는 직장에서 부산지역 올림픽지원업무 총괄책임을 맡아 요트경기장을 비롯한 구덕운동장 그리고 연습구장인 보조경기장 몇 군데 전력시설 점검을 맡아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구덕축구경기장은 그라운드 위치별로 선수들 무릎과 어깨 머리 높이별 조도를 요구했고 애써 작성한 보고서는 조직위로부터 자주 퇴짜를 맞았다. 그런데도 마흔 중반을 관통하던 그는 곧 맹부장 부부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그 스트레스를 비교젹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