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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 3,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 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를 성전에 있는 나이 많은 라삐에게 데려가 복을 빌어주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고 나자 즈카르야가 노래를 불렀듯이,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후에 시매온이 찬미합니다(라틴어 성경 첫 단어를 따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 부릅니다).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사야서(40,5;42,6;46,13;49,6;52,9-10)를 반영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성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불리기도 하고, 주로 동방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서방교회에서는 끝기도 때 바쳐집니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미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29-32)
“이제야”라는 말은 현재가 구원이 성취된 시대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40,5)의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을 반영해줍니다.
이 말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놀라워하는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35)
이는 더러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임을 밝혀줍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을 암시해줍니다.
사실 성모님은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도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문제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 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 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남편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셨다는 것,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과 구원의 길에 참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사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봉헌된 삶, 축복의 삶은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의 뜻을 깨달아 알아듣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30)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신성에 참여하는 봉헌>
주님 봉헌 축일인데, 성탄 40일 되는 날 주님의 부모가 주님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념하는 것은 주님 봉헌이 성탄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인데, 생각해보면 이 축일의 의미가 인간적으로는 인간 부모가 주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아버지가 아드님을 봉헌하시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봉헌은 하느님께 당신을 바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아버지 뜻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을 바치시는 것이고, 이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의 의미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신을 우리에게 봉헌하심은 우리도 우리를 당신처럼 봉헌하라는 뜻인데,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를 봉헌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람이 되신 그분의 신성에 우리가 참여하라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른 것에 바치지 않고 하느님께 바치면, 감히 말하지만 우리는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주님께서는 처음 당신을 바쳐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심으로 인간인 우리가 당신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고, 마지막 만찬 때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당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길을 열어주시기는 하셨는데, 아무리 열려 있어도 우리가 들어가야 들어가는 것이듯 열린 길에 들어설지 말지, 신성에 참여할지 말지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우리에게 길은 열려있지만, 갈림길이라는 뜻입니다.
술만 먹으면 개차반이 된다는 말이 있듯 우리는 자신을 마구 굴려 개차반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을 귀히 여겨 귀인이 될 수도 있는데, 이 갈림길에서 신성에 참여하는 길을 택하면 될 것입니다.
오늘 저의 강론은 원래 여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청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그러니 뒤의 얘기는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효녀 심청에게 자신을 바치면 아버지 눈을 뜰 수 있다는 제안, 곧 아버지의 눈과 자기의 목숨을 바꾸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심청은 물론 많이 망설여졌겠지만, 자신을 바치는 쪽으로 고귀한 선택을 했고 그 결과는 아버지의 눈도 뜨고 자신도 고귀한 왕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나 요르단강물에 들어가시어 세례를 받으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같은 헌신의 의미이고 같은 구원의 의미라는 말입니다.
자신을 바침으로 가난하고 비천했던 그의 신분이 왕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눈도 뜨게 하고 전국 모든 눈 먼 이의 눈도 덩달아 뜨게 하였지요.
우리도 심청이처럼 자신을 헌신한다면 주님 봉헌에 참여하는 것이요, 주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인데, 이 주님 봉헌 축일에 주님과 같은 봉헌의 삶을 살려고 수도자의 길에 들어선 나는 그 길을 계속 잘 가고 있는지 지금은 어디에 헌신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저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기다림의 기쁨>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빕니다.
올 한해도 주님의 축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셨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쓰임 받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를 위해 모두를 내어주신 그분처럼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초는 자신을 녹여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희생을 통하여, 더 큰 사랑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 구세주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 52,10)고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였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으며,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시메온은 성령께 순명하였기에 성령께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죽어도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백 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깊이 알아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바로 구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부가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 50,14)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봉헌은 우리에게도 우리의 봉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봉헌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온 시메온은 성령과 함께 기다림의 삶을 살아왔고 그 안에서 위로와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천상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구세주가 찾아오는 자리이며, 그 자리를 가꾸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순간을 사랑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지금 순간을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언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 12,1)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히브 13,15)
온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12)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빛이 되는 데 있어서 히브리서의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히브 2,17)
주님께서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사람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혹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마더 데레사)
내 일을 하지 말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축복이 되길 바랍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려고 일어서신다.
주님은 공정의 하느님이시다.
행복하여라,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
(이사 30,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부모가 자녀를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어떻게 될까?>
tvn 예능 ‘유퀴즈온더블럭’에서 이천 시골에 사는 한 어머니(이정숙 씨)의 사연에 진행자들도 눈물을 참지 못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서울에 살던 어머니는 시골에 사는 한 남자의 끈질긴 구애 끝에 시골로 시집옵니다.
친정 어머니는 딸을 시골로 보낼 수 없다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서울로 올라와 살 것이라는 사위의 말을 듣고 시골로 시집 보낸 것입니다.
자신은 셋째라 부모를 모실 필요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자기 형이 다리에 장애가 있고 아이들이 일곱이라 지금 자기가 분가해서 밖으로 나가면 시어머니, 시아버지, 조카들까지 다 업신여김 받고 살기 어려울 것이라 하여 조카들 클 때까지만 함께 시골에 살자고 설득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의 효심에 그러자고 하였고 지금까지 평생을 시골에 살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힘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부패한 백신을 맞아 오히려 결핵에 걸려 아이를 업고 여섯 달 동안 매일 업고 통원 치료를 해야 했습니다.
매일 아이를 업고 걸어야 했던 시간이 무려 네 시간입니다.
친정 어머니가 서울에 계시다 딸이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도와주겠다고 시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러나 사돈과 같은 동네에 사는 것은 아니라며 8km나 떨어진 곳에 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딸의 집에 와서 손주들을 돌봐주시고 일을 도와주셨습니다.
임종 전날 어머니를 방문하셨을 때도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얼른 가서 사슴 밥 줘라. 나 때문에 이렇게 시간 뺏기면 어떡하냐!”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 모습에서 당신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한 시골 집에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봉헌은 어머니의 피 흘림이었습니다.
따님은 그렇게 한 가정에서 훌륭한 며느리요, 아내요, 어머니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날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인간의 부모가 자신들의 아들을 하느님 집에 봉헌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할까요?
이는 인간이 그 부모의 봉헌을 통해 성장함을 말해 줍니다.
부모가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가 성장하여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결혼하겠다는데도 반대합니다.
이것은 자녀를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내 품 안에 품고 살겠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 같지만 실제로 자녀가 성장하지 못하게 봉헌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자녀를 나라와 천주께 봉헌하는 편지는 이렇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어야 한다.
네가 상소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된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는즉 죽는 것이 영광이나,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리….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조 마리아의 편지가 원본이 없다는 이유로 거짓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안중근의 담당 간수였던 헌병 치바 도시치가 전한 말을 사이토 다이켄이라는 일본 스님이 『내 마음의 안중근』(1994)이라는 책에 기록한 내용과 유사하고, 황성신문 (1909년 12월 28일) 기사에서도 그 내용이 있습니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편지 자체가 거짓이라고 말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건 조 마리아는 아들 안중근을 천주와 나라에 봉헌하였고 그는 그렇게 성장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봉헌하지 않으면 아들은 어머니라는 감옥에 갇혀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를 어디로 봉헌하는 것일까요?
새로운 정체성으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에서 나라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체성은 또한 내가 누구냐는 믿음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성장합니다.
어머니는 내가 가진 아들을 향한 믿음에서 자녀를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보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1990년경 에렌 랭거(Ellen Langer) 박사는 70대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1959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전반적으로 5년 정도는 젊어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혹은 ‘아이는 부모가 믿는 만큼 자란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컴퓨터 게임 중독자인 아들을 끝까지 믿어주어 연세대 4년 장학생으로 입학시킨 『괜찮아 엄마는 널 믿어』의 저자 김민경씨입니다.
그런데 왜 어머니, 아버지만이 자녀를 봉헌할 자격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자녀는 부모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봉헌은 나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낳고 자신들이 키웠으니 자녀는 자신들의 것입니다.
자녀들도 부모에게 속해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봉헌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천민 아이를 사무라이로 만들겠다고 한 어머니는 자신이 성의 기둥으로 들어가 죽었습니다.
다른 어떤 이가 들어가도 자녀는 사무라이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가능합니다.
이 배가 가라앉아야 어쩔 수 없이 다른 배로 옮겨 탈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 배에 계속 머무르려 할 것입니다.
새끼 새를 자신이 떨어뜨리면 새가 날갯짓하겠지만, 다른 존재가 떨어뜨리려고 다가오면 몸을 움츠리게 됩니다.
봉헌은 부모만의 특권이기도 하고 부모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내가 자녀를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어떤 방향으로도 성장할 수 없음을 기억합시다.
자녀의 성장은 부모가 어디로 봉헌하느냐에 달렸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매일 가슴을 치면서 거듭 자신을 갈고 닦으며...>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억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삶 전체를 오롯이 주님께 봉헌하려고 길을 나선 수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부여받은 고귀한 성소를 기쁘고 충만하게 실현하도록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축성(祝聖, consecration)되다’ 라는 말의 의미는 성화(聖化)되다, 성(聖)스럽게 변화되다, 거룩하게 되다, 신성하게 되다, 봉헌되다 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오늘 축성 생활의 날은 맞아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이 아기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과 미래, 삶 전체를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선별되고 축성된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걸맞게 하루하루 모든 순간을 거룩하고 향기롭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도 중요하겠습니다만, 그에 앞서 한 작은 수도자로서, 주님의 겸손한 종으로서, 기도 안에 기쁘고 환한 얼굴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도자들이 자신이 발한 삼대 서원이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교회를 위해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거룩하고 맑게 살아 존재 자체로 교회와 세상 앞에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존재’ ‘신원’은 마치 날카로운 날이 서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매일 가슴을 치면서 거듭 자신을 갈고 닦으며, 주님의 종이라는 수도자로서의 신원에 걸맞게 살고자 발버둥칠 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위한 멋진 이기(利器)로 변모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망각한 채, 흥청망청, 빈둥거리며 살아갈 때, 세상의 고통과 절규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우리끼리만 희희낙락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과 교회 앞에 그 어떤 증거도 되지 않고, 그저 놀림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수도자라는 존재 자체, 신원 자체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해치는 흉기(凶器)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봉헌>
첫 아들을 주님께 봉헌하라는 율법은 탈출기 13장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
(탈출 13,2)
“뒷날, 너희 아들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그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친다.
그러나 아들들 가운데에서 맏아들은 모두 대속하는 것이다.’.”
(탈출 13,14-15)
맏아들을 주님께 봉헌하는 것은 이집트 탈출에서 비롯된 일이고, 구원과 해방을 상징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대속’이라는 말은 실제로 맏아들을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맏아들을 봉헌한다는 뜻으로 돈을 봉헌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경우에는 돈을 바쳤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돈으로 봉헌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봉헌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산모의 정결례에 관한 율법은 레위기 12장에 있습니다.
원래는 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바쳐야 하는데(레위 12,6),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 두 마리를 바쳐도 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레위 12,8).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니 정결 예물과 속죄 예물을 바치실 이유가 없는데, 왜 바치셨을까?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맏아들을 봉헌하라는 율법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봉헌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율법 실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또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해서 ‘봉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봉헌’은 인간들이 주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바치는 일이니까 ‘주님을 위해서’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사실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바칩니다.
봉헌과 관련해서 다윗과 솔로몬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임금이 자기 궁에 자리 잡고, 주님께서 그를 사방의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셨을 때이다.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2사무 7,1-2)
다윗의 말은 자기는 좋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집도 없이 천막에 머무르고 계시니 하느님께 집을 지어 드려야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어야겠다는 뜻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나탄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천막과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니던 그 모든 곳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향백나무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한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
(2사무 7,5-7)
이 말씀에는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드린다고 생색내지 말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따로 집이 있을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온 세상이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게 되는데, 건축 공사를 마치고 봉헌할 때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1열왕 8,27-29)
하느님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집이 필요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솔로몬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성전을 지어서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서 하느님께 봉헌한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봉헌이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일입니다.
온 세상이 다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것은 사실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이 더 부유해지는 것도 아니고, 바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이 가난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목숨을 바치는 일도, 인생 전부를 바치는 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한 일, 즉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생색낼 것도 없고, 대가나 보상을 받기를 바랄 일도 아닙니다.
여기서 다시 또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봉헌한다는 말을, 봉헌을 잘해야만 구원을 잘 받는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나를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주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봉헌은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일’이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봉헌 예물은 언제나 항상 기쁨으로 바치는 감사 예물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봉헌의 여정 - 참 아름답고 복된 봉헌의 삶>
주님 봉헌 축일은 동시에 우리의 봉헌 축일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한몸이 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 주님 봉헌 축일이면 으레 생각나는 25년전 주님 성탄 대축일날에 쓴 고백시입니다.
여러번 인용했지만 인용할 때마다 새롭습니다.
여기서 물론 당신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1998.12.25.
수도자는 물론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주님 향한 봉헌의 열정과 갈망이 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참 좋아하는 봉헌성가 210장입니다.
오늘 시간되면 찾아 5절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마음으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2절까지만 인용합니다.
“나의 생명드리니, 주여 받아주시어
감사하는 맘으로, 찬미하게 하소서
나의 삶을 드리니, 주여 받아주시어
선한 일을 하도록 나를 인도하소서”
2. 며칠전 존경하는 선배 수도사제의 영명축일에 주고 받은 일부 내용입니다.
제가 은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기에 이에 대한 제 답변입니다.
다음 같은 요지의 말씀을 드렸고 내심 만족했습니다.
“수도자에게 은퇴가 어디 있습니까?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요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영적전쟁에 말씀공부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고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3. 하루하루 날마다 수도원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하늘길을 걸을 때마다 충만한 행복을 느낍니다.
아무리 하늘 높은 나무라도 하늘에서 내려보면 참 작을 것입니다.
“하늘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양사언의 시조도 생각납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보시기엔 사람들이 아무리 잘났느니 못났느니 해도 결국은 도토리 키재기일 것입니다.
이런 자각에서 비로소 참된 겸손입니다.
그래도 하늘높이 하늘 향해 쭉쭉 자란 가로수들을 보면 내 봉헌 삶의 내적성장을 묵상하게 됩니다.
정확히 2009년에 심은, 14년된 작은 애기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이렇게 거목이 된 것입니다.
하루하루 봉헌 삶의 충실성을 상징하는 나무들의 성장입니다.
과연 몸은 노쇠해가도 내적으로 끊임없이 하늘의 하느님 향해 끊임없이 성장하는 삶인지 묻게 됩니다.
4. 또 하나는 제 집무실 커다란 초록판 게시판입니다.
흡사 초록빛 하늘을 연상케 합니다.
요즘의 각별한 이용에 행복합니다.
집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참 어려운 사정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럴 때 마다 메모지에 이름을 써서 초록빛 하늘 같은 게시판에 붙여 놓고 자주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그대로 하나하나가 봉헌된 귀한 하늘의 별들같은 존재로 생각됩니다.
오래전에 써놓고 애송했던 ‘별’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아마도 우리를 그리워하는 주님의 마음이 이러할 것입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
-1997.4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주님의 봉헌과 더불어 우리의 봉헌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축복, 찬미의 봉헌, 감사의 봉헌 등 끝이 없습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더 아름답고 심오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도 봉헌뿐입니다.
사람이라하여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됐기에 봉헌이란 말을 이해하지만 하느님을 모르는, 믿지 못하는 이들은 도저히 봉헌이란 깊고 아름답고 신비한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정의입니다.
봉헌은 인간 존엄의 근거입니다.
봉헌은 우리의 신원이자 정체성을 뜻합니다.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불림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대 신비주의자 랍비 여호슈아 헷쉘의 고백이 진리입니다.
시간되면 김춘수 시인의 ‘꽃’도 읽어보시며 우리의 복된 봉헌자이자 성소자로서의 신원에 대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막연한 봉헌이 아니라 우리는 확실히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대상이 있으니 바로 주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2018.10.16
이렇게 주님을 고백할 수 있음이 바로 우리의 자랑이요 행복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런 봉헌의 모범을 오늘 말씀에서 만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 교회 하늘에는 무수한 헤아릴 수 없는 봉헌 삶에 충실했었던 성인들이 별들처럼 교회를, 어둔 세상을 환히 비추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부모가, 시메온 노인이, 한나 할머니가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다음 세 말마디가 이를 입증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예루살렘에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모두가 하루 이틀 주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우리 정주의 수도자들처럼 항구히, 한결같이 평생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지금도 이런 봉헌 삶에 항구한 이들이 곳곳에 많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하느님만이 아시는 익명의 성인들입니다.
봉헌의 축복입니다.
봉헌해서 축복도 받지만 봉헌 자체가 보상이요 축복입니다.
봉헌의 삶이 주는 깊은 내적 평화와 안정입니다.
봉헌으로 텅 비워진 내면에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니 말그대로 텅빈 충만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도대체 이보다 더 큰 행복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봉헌의 축복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제1독서 말라기의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예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 시메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감격에 벅차 찬미가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매일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기전 바치는 시메온의 찬가입니다.
날마다 잠자리에 들기전 이 찬가만 잘 바쳐도 선종의 은총일 것입니다.
한나 역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 부모에 그 아들입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나자렛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 봉헌 삶에 충실했음이 분명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하니 그대로 봉헌의 축복입니다.
사랑의 봉헌,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행복,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니, 봉헌의 삶이 바로 참행복의 열쇠가 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 봉헌 축일이자 동시에 우리의 봉헌 축일입니다.
하루하루 모두를 주님께 사랑으로 봉헌하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날마다 봉헌과 더불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부활의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도 있습니다.
봉헌의 빛이자 봉헌의 어둠입니다.
봉헌의 기쁨과 평화만 있는게 아니라 봉헌의 슬픔도 있고 아픔도 괴로움도 고통도 있습니다.
이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여 봉헌할때 모두가 축복이 됩니다.
성모님 역시 시메온의 예언대로 반대받는 표징의 아드님으로 인해 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병고나 상실의 아픔도 괴로움도 슬픔도 불안도 두려움도 통째로 모두 주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좋은 것만 아니라 부정적인 모든 것들도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님께 봉헌할 때 모두가 축복이 됩니다.
이래야 삶은 짐이 안되고 선물이 됩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봉헌 삶에 충실할 때 마지막 봉헌의 축복된 죽음입니다.
봉헌의 은총, 봉헌의 선택, 봉헌의 훈련, 봉헌의 습관입니다.
바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가 평생 매일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봉헌 삶의 요약과 같은 제 좌우명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2012.9.1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가끔씩 찾아오는 친구처럼 ‘감기’가 찾아오곤 합니다.
기관지가 약해서인지 목이 따끔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짧게는 이삼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있으면 말없이 떠나곤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감기는 저와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증상도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목이 잠기면서 말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미사 준비를 했는데 도저히 미사를 봉헌할 수 없었습니다.
부득이 신부님께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기꺼이 미사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몇몇 만남도 취소하고 조용히 집에 머물렀더니 감기는 예전처럼 아무 말 없이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감기로 말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언어의 문제로 말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어에 익숙한 사람들과 있으면 아무래도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잘 알아듣지 못하기도 하지만 저의 영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박해의 경우에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습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던 즈카리야는 속으로 의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요한을 출산할 때까지 말을 못하였습니다.
사막의 은수자들과 깊은 산중의 스님들은 자발적으로 묵언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감기와 함께 지내면서 꼭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 칭찬과 격려의 말을 자주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봉헌과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와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헌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봉헌은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이었습니다.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봉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와 바리사이파의 교만한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기도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바리사이파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정점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늘 겸손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제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많은 본당에서 오늘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은 초가 가지고 있는 3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성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삶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첫째, 초는 밝은 빛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진리의 빛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둘째, 초는 따뜻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이들, 슬퍼하는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셋째, 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십자가의 희생은 가장 숭고한 봉헌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솔직하게 아프다고, 원망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신앙이 있는 곳에, 당신의 몸을 성체의 모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입니다.
더 멀고 힘든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먹은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발까지의 긴 여행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책을 읽다가 여검사의 초임 검사 때의 경험을 읽게 되었습니다.
초임 검사 때이니 얼마나 사명감이 투철할까요?
그런데 조사받는 사람이 이 여검사를 향해 계속해서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 불쾌해서 “아가씨라뇨!”라고 짜증 섞인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조사받는 사람이 “아! 그러면 아줌마입니까?”라고 반문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여검사는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검사로 보이지 않으니 ‘검사’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인데 짜증을 냈던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듣고 싶은 소리가 있고, 또 듣기 싫은 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갖춰야 했습니다.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그런 듣기 싫은 말을 한다고 짜증 내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로 듣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칭찬, 사랑, 기쁨, 행복의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내가 먼저 그 말을 하고, 그 말에 적합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부끄러운 모습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 다음 사십 일째 되는 날에 주님 봉헌 축일을 지냅니다.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성전에 예수님을 봉헌하실 때, 시메온 예언자와 한나 예언자를 만나게 되십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0-32)라고 찬미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아마 아기 예수님께서도 이 말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정답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또 한나 예언자 역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보기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했기에, 실제로 아기 예수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가 먼저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하고, 보고 싶은 행동이 있으면 내가 먼저 보고 싶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주님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그에 걸맞게 생활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적합한 행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만나겠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며 지극히 부끄러운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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